<티끌모아 로맨스> 김정환 감독, 상영중

사랑의 계절이 왔다. 11월엔 초코 묻은 과자 줄 사람을, 12월 예수님 생일엔 선물 줄 사람을 왜 난데없이 찾아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연인이 필요한 서늘한 계절이 되었다. 이때 극장가에는 따뜻하고 훈훈한 로맨틱 코미디가 우수수 걸린다.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아픔과 상처를 딛고서, 우여곡절과 차이를 넘으며, 오해를 풀고 결국은 맺어지게 되는, 그런 발랄한 커플들을 스크린에서 구경하다가, “그래, 나도 올 겨울엔 꼭 연애를”이라고 중얼거려 보지만, 88만원 세대에게 이거 왠 사치냐.

<티끌모아 로맨스>, 이 로맨틱코미디는 여느 로맨틱코미디와 달라 보인다. 역경에도 불구하고 명랑하고 살아가는 여자주인공이 재벌가 자제로서 본부장으로 불리는 남자주인공을 만나 운명 같은 사랑에 빠지는 TV 드라마와는 전혀 다르다. 또한, 가난할지라도 예쁘게 생긴 사람들이 아기자기한 소품과 감미로운 음악을 깔고 앉아 찌질한 현실을 잊고 꿈결 같은 사랑을 하는 로맨스 영화와도 다르다. 이 영화는 88만원 세대들의 생존법에 대한 이야기다.

화려하고 도도한 이미지의 한예슬과 발랄한 꽃미남 송중기가 주인공이라니, 이 영화는 완벽하게 환상적인 한 편의 로맨스로 오해되기 싶다. 하지만 이 예쁜 배우들은 상류층 코스튬을 벗어 던지고, 이 사회의 루저요, 자본주의 시스템의 밑바닥 인생을 제대로 보여준다. 예쁜 배우들의 달달한 연애를 기대했다가는 영화 오프닝에서 그 기대감이 바로 깨져버릴 테니, 이제 이 영화를 이 땅의 청년백수들을 위한 리얼리즘 성장영화 정도로 받아들이자.

그저 그런 대학의 비인기 학과 출신인 빈털터리 청년 천지웅(송중기)은 월세 옥탑방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그러다 50원짜리 빈 병 팔고 닭을 키워 계란으로 단백질 보충하는 국보급 짠순이 구홍실(한예슬)을 만난다. 홍실은 지웅에게 자신의 옥탑방 옆에 텐트를 빌려주고 돈벌기 노하우까지 전수해주겠다고 한다. 조건은 무조건 두 달간 자기 말에 따라야 한다는 것. 그러나 뭐든 공짜는 없다는 실용적 인간형 홍실에게는 지웅이 필요한 이유가 따로 있다. 두 사람은 이제, 한 세대 전체가 백수가 되어버린 구조적 불행의 시대에서 생존할 수 있는 온갖 방식들을 보여준다. “세상에 필요 없는 것이란 없다”는 홍실의 인생철학은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구상하게 하는 튼실한 힘이 된다.

50원이 모자라 콘돔도 못 사고 연애도 못하던 백수 지웅이 푼돈 모아 저금하는 재미에 빠지고, 10km는 기본으로 걷고, 휴지와 쓰레기 봉투 아끼는 법까지 꼼꼼하게 고안하는 홍실이 이제야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될 때, 둘 앞에는 큰 위기가 나타난다. 야무진 홍실도 포식자로 우글거리는 험악한 세상의 피식자일 뿐이다. 그리고 지웅은 홍실이 왜 자신에게 도움을 줘야 했는지 알게 된다. 로맨스가 싹 트기 일보직전인 그들 앞에 나타난 커다란 위기는 “돈 때문에 나에게 잘해준 거야?”라고 서로에게 질문하게 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현실적이다. 돈 많은 로맨스 상대도 없고, 유산을 물려줄 친척이나 친구도 없으며, 잃어버린 돈을 찾아낼 방법도 없다. 사랑만으로 배부르기에는 주인공들의 허름한 옷과 초라한 방이 환영을 깨버린다. 유쾌하게 노래나 부르는 판타지는 허용되지 않는다. 깨알 같이 재미있는 장면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지지만 맘이 놓아지지 않는다. 그들 앞에 닥쳐올 위험을 영화 내내 걱정하다가 정말로 위험이 닥치니 마음 깊이 속상해진다. 그래도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균형감 있게 하는 게 보람 있는 인생임을 보여주는 상징인 큰 나무 아래, 영화는 팍팍한 현실 속에서도 청춘은 사랑을 꿈꾸어야 함을 말해준다.

독립영화를 전문으로 다루는 영화사 인디스토리가 제작하고, 이미지로 먹고 사는 스타 배우들은 화장기를 벗고 쌩얼을 드러내어 생활연기를 펼친다. 청춘의 고단함을 연기하는 한예슬과, 가볍거나 강하거나 다 되는 유연한 송중기의 호흡은 자연스럽다. 독립영화 같은 우직한 분위기에 이들은 이상하리만치 잘 어울려서 정말로 내 이웃 같아 보인다.

들판에서 들꽃을 따먹어보는 지웅, 주워온 것이 분명한 거대한 침낭 속에서 잠든 홍실, 다 쓴 고무장갑 매달아 화초 키우기 등등, 웃긴데도 슬프거나 슬픈데도 웃겨서 눈물이 났다. 종종 느슨해지는 템포는 배경을 돌아보며 여운을 느끼게 하는 장점이 된다. 돈 없어서 종교, 병, 연애는 금기어로 지정해놓은 청춘도 한땀한땀 로맨스 모아 인생 즐길 권리가 있다.
우리, 이제, 사랑합시다! 

 

정민아 (영화평론가)
영화학박사. EBS 국제다큐영화제 프로그래머. 동국대, 숭실대 출강 중.
쉽게 정보가 눈에 뜨이지 않는 영화들 추천을 통해
영화로 닥치고 소통하는 명랑한 공동체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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