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도서관 나들이] <우상의 눈물>, 전상국, 민음사, 2005

남자들은 힘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거나 자랑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 힘이라는 게 단순한 물리적 힘(power)일수도 있고 지식(knowledge)이 될 수도 있고, 경제력(financial)이 될 수도 있다.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화될 수 있는 것이 바로 남자들이 말하는 힘이다. 필자도 그랬다.

성적 정체성이 확고해지는 15살 정도의 남자 아이들에게는 물리적인 힘을 자랑하는 것이 아마도 그 시절엔 가장 큰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남자들의 학교에서는 사소한 오해가 주먹다짐으로 가기도 하고, 힘의 크기를 겨뤄보는 결투도 진행된다.

여기까지는 인간의 본성에 충실하는 남자들의 세계라고 볼 수 있지만 조금 더 이 '학교'라는 공간에 들어가 보면 희한한 일들이 벌어지고, 그것은 어른들의 세계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된다. 덩치가 큰, 그래서 싸움을 잘 하는 학생이 그 반(班)을 장악하게 된다. 독재가 시작되는 것이다. 온갖 나쁜 짓은 다하고, 아이들을 괴롭히는 정도도 잔인해지고 악랄해진다. 아이들은 그런 독재자가 몰락하기를 바란다. 선생님이 해결해 주면 좋겠지만 쉽지 않다. 그냥 조용히 1년을 보내고 진급하기만을 바라고, 그 진급한 반에서는 그런 독재자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대안? 대안이라는 게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 <우상의 눈물>, 전상국, 민음사, 2005

지금 소개하려는 책은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이다. 학급 내 학생들의 위에서 군림하는 기표와 그에게 대적하는 주인공 나(유대)와 형우, 그리고 담임선생이 위에서 언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소재는 학교 폭력을 다룬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이 소설은 전체주의적 폭력에 대한 고찰이다.

새 학기가 시작된 학교, 주인공 유대는 ‘자율’과 ‘공동 운명체’를 강조하는 담임을 만나 임시반장이 된다. 이는 재수파의 리더인 기표를 화나게 만들게 되고 유대는 린치를 당한다. 일주일 후 가정방문을 한 담임은 유대를 반장으로 임명하고 싶지만 유대는 친구인 형우를 추천한다. 담임은 형우를 반장으로 기표를 부반장에 임명한다.

모든 학생들이 유급을 당하지 않기 위해 형우는 기표를 포함한 재수파들을 구제하려고 계획적인 부정행위를 모의하지만 오히려 기표는 이를 시험 감독교사에게 신고한다.

이후 기표는 형우를 린치해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그러나 형우는 잔인한 린치를 당했지만 끝까지 기표를 두둔하고 지켜준다.

유대는 이 같은 상황이 모두 담임과 형우가 치밀하게 계획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혼란에 빠진다. 학교에서는 기표의 어려운 가정 형편이 알려지면서 기표를 돕는 운동이 진행되고, 언론에 알려진다. 그 결과 각지로부터 성금과 위문편지가 답지하고, 급기야 영화 제작까지 진행된다.
학급은 마치 평온하면서도 순탄한 항해를 하는 듯 보였지만 기표는 한마디를 던지고 사라진다. “무섭다. 나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담임은 겉으로 보기에는 학교 폭력을 해결하기 위해 기표를 교화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 제거해야 할 걸림돌에 불과했다. 이것은 곧 이 소설이 출간될 당시의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던 전체주의적 폭력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된다. 게다가 다수에게 물리적 폭력을 입히는 악의 축에게(소설에서 기표를 악마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적절한 응징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것은 정의라고 생각했는데, 그 방법이 전체주의적 폭력으로 귀결되면서 필자는 충분히 무섭고 혼란스러웠다. 당시의 전체주의적 폭력을 경험해보지 않았기에 그 공포는 더 크게 느껴졌다.

최근 몇 년, 우리는 경제가 어렵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한다고 한다. 우리 민족이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말이다. 살아남기 위한 많은 과정 속에 그에 반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사라져야 한다는 메시지도 함께 듣고 있다. 그래서인지, 몇 년동안 우리는 혹은 필자는 보이지 않은 틀 속에 가둬지고 있는 것 같다. 마치 기표가 미화되는 것처럼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주인공 유대가 담임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과연 담임선생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선생님, 기표 한 개인을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기표의 힘을 빼어 반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까?"
담임은 무슨 소리냐는 듯 내 얼굴을 뻔히 치어다보다가 음모의 한 귀퉁이를 드러내 보인 무안감을 감추기라도 하듯, "여러 사람에게 해가 되는 그런 힘은 아예 빼어버리는 게 좋은 거다"

분명한 것은 소설에서 기표는 가해자다. 학생들 위에 군림하면서 학생들을 폭력으로 괴롭힌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기표의 몰락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실제 우리 학교에서 일어나는 같은 상황에서 기표와 같은 존재가 몰락하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기대는 더욱 컸다. 어쨌든 기표는 몰락한다. 그러나 그 몰락이 통쾌하거나 시원스럽지 않았다. 몰락이 더욱 불편하게 느껴졌다. 책을 덮는 순간 기표는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변해 있었다.

▲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이문열, 문학사상사.1987

‘우상의 눈물’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다른 한 가지는 바로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었다. 두 소설 모두 학교라는 한정된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폭력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모습이 너무나 닮아 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비교대상이 됐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외부(선생님)세력이 폭력의 상징(엄석대)을 보기 좋게 무너뜨리는 것으로 독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고 있다. 속이 시원한 결말이자 어린 학생들이 원하는 그런 모습을 던져주고 있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결국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우리가 거대한 힘에 의존해야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소 씁쓸한 일이다.

‘우상의 눈물’에서 선생님은 학생들이 폭행을 당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한 직접적인 응징이 없다. 대신 교화를 통해 폭력의 대상을 자신의 목적 안에 가둬두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그 폭력으로 대변되는 기표가 담임선생을 무섭고 두려워한 것이다.

아직도 기표의 말이 떠나지 않는다. “무섭다. 나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최용식 (DGIST 대구경북과학기술원 홍보팀. 전 대구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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