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영화] <돼지의 왕> 연상호 감독. 2011. 상영중

▲ <돼지의 왕> 연상호 감독. 2011
올해 극장가에는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의 성취가 두드러진다. 아련한 1970년대 소품들로 아득한 첫사랑을 떠올렸던 <소중한 날의 꿈>이 노스탤지어를, 자유로운 세상을 꿈꾸는 암탉과 오리의 모험담 <마당을 나온 암탉>이 판타지를 자극했다면, 이제 잔혹하고 끔찍한 스릴러 세상과 마주하는 애니메이션이다.

중학교 1학년 남자아이들의 학교생활을 소재로 하지만, 청소년 관람 불가로 철저히 성인용 애니메이션인 <돼지의 왕>. 이 작품은 지난달에 폐막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넷팩상, 한국영화감독조합상, 무비꼴라쥬상 등 3개 부문을 수상하여 올 하반기 최고의 화제작으로 기대를 모았다. 1억 5천만 원의 저예산으로 연상호 감독이 1인 작업 시스템 하에 완성한 이 독립 애니메이션은, 권력의 위계질서로 유지되는 어른들의 비열한 세상과 똑같은 정글의 법칙이 아이들의 교실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섬뜩하게 보여준다.

아동을 소재로 한 성인용 애니메이션이다. 애니메이션이 예쁘고 따뜻하고 상쾌하고 부드러울 것이라는 편견을 완전히 걷어버리고 이 작품의 묵직한 무게와 거친 호흡이 주는 압박감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대한민국 지금 여기를 생생하게 관찰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악당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더한 악’이 되어야

회사 CEO인 경민은 부도 후, 분을 참지 못하고 아내를 우발적으로 살해한 후, 중학교 동창인 종석을 찾는다. 꿈꾸던 소설가가 되지 못해 자서전 대필 작가로 근근이 먹고 사는 종석은 15년 만에 찾아온 경민의 갑작스런 방문에 당황하지만, 이들은 술집에서 마주앉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감추고 싶어서 잊고 있었던 과거 학교시절에 대해 하나씩 꺼내놓는다.

중학교 시절, 돈 많고 공부 잘하고 덩치 큰 패거리들은 선생들의 비호 아래 권력을 쥐고 있었고, 체구가 작고 성적이 좋지 않으며 가난하거나 떳떳하지 못한 직업을 가진 부모를 둔 종석과 경민은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한다. 끔찍한 학교생활을 하던 이들에게 존재감이 전혀 없었던 철이가 느닷없이 등장, 단숨에 패거리들을 제압하고 그는 종석과 경민의 우상이 된다. 악당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더한 악’이 되어야 한다는 철이의 인생철학 앞에서 종석과 경민은 머뭇거린다.

“돼지는 인간이 던져주는 먹이를 먹고 살을 찌우는 게 인생의 목표가 되었지만, 그 살이 인간을 먹이기 위한 것이라는 걸 모른다.” 돼지일 수밖에 없는 무력한 이 아이들에게 철이는 ‘왕’으로 다가온다. 권력자 패거리 아이들을 보며 종석은 외래종의 미끈한 사냥개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들은 인간의 비호 아래 약한 것을 물어뜯지만 인간의 사랑을 받는다. 먹히기 위해 살을 찌우는 존재인 돼지와 사랑받기 위해 현재의 룰과 시스템에 복종하는 개의 모습은 현대 사회의 우화이고, 중학교 교실은 사회의 축소판이다. 돼지보다 약해서 처참하게 죽게 되는 길고양이의 영혼은 종석의 초자아가 되어 가끔씩 나타나 흔들리는 그를 괴롭힌다. 그는 돼지의 왕을 따라 이 권력 시스템으로 유지되는 세상에 복수할 수 있을 것인가.

예민한 아이들의 분노와 슬픔

교실, 집으로 걸어가는 거리, 철이의 아지트 등 제한된 공간 안에서 밀도있게 펼쳐지는 권력게임 드라마는 예민한 아이들의 분노와 슬픔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렇게 사실적인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해야 했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날 것이다. 그러나 실사영화로 끔찍하게 리얼한 장면들을 마주해야 하다면, 그 압박감을 과연 1시간 40여분 동안 견딜 수 있을까?

만화로 배경과 인물의 표정을 간단하게 처리하고, 사운드를 단순하게 처리하며, 사건 진행의 호흡을 한 템포씩 느리게 전개하니 오히려 숨이 쉬어진다. 두 친구의 회상 장면이 교차편집으로 이어지는 속에서, 거침없이 폭력적이고 야수적인 학교 세상이 눈앞에서 리얼하게 전개되는 것을 본다는 것은 더욱 힘겨운 경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상호 감독의 거친 작화와 날 것의 목소리로 연기하는 배우들의 목소리는 영리한 선택이다.

영화는 예리하게 대한민국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이 먹이사슬 가장 아래에 존재하는 아이들은 끔찍하고도 유일한 방식으로 권력자들에게 되갚아 주려고 계획한다. 그러나 그 계획은 제대로 실행될 것 같지 않다(아마도 권력자 패거리들은 기억도 못할 터이니). 그리고 결국 비천한 아이들은 성인남성이 되어 알량한 힘을 더 약한 자에게 쏟아 붓는 비겁한 짓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평범한 어른이 되었다. 억압된 것은 귀환하여 자기 자신을 정의한다. 어린 시절 불쌍한 길고양이에게 애먼 해코지를 하듯이, 그들은 약자인 아내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이 세상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한다.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은 거친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으로 추동되는 사회, 이곳에서 개혁을 꿈꾸다 좌절하였던 많은 이들, 우리들의 ‘돼지의 왕’을 벼랑으로 내밀고 비겁하게 침묵하던 우리. 꿈과 환상, 사랑을 노래하는 애니메이션이 잔혹한 악몽이 되는 것은 이 시대의 필연이다. 돼지와 개의 우화는 완벽하게 우리 사회의 권력 구조를 가리키는 지표다. 1990년대를 게스 청바지와 워크맨으로 정겹게 기억한다면, 그 게스 청바지와 워크맨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의 트라우마였는지도 기억해야 한다.

<똥파리>, <말죽거리 잔혹사>의 강렬한 자극이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파리대왕>의 팽팽한 긴장감, 그리고 <도가니>의 사회적 의식성을 영화에서 기대한다면, 이 영화는 기대 이상일 것이다.

정민아 (영화평론가)
영화학박사. EBS 국제다큐영화제 프로그래머. 동국대, 숭실대 출강 중.
쉽게 정보가 눈에 뜨이지 않는 영화들 추천을 통해
영화로 닥치고 소통하는 명랑한 공동체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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