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수도원 기행-3]

▲ 수도원 성당.

2007년 유학생활의 첫 여름 방학을 이탈리아 동북부의 쁘랄리아 수도원에서 보냈다. 유학을 했던 우리 수도원의 여러 형제들이 거쳐 갔던 곳이기에 방학을 앞두고 제일 먼저 연락을 했던, 섭외 1순위의 수도원이었다. 석 달 동안 머물 수 있을지 문의했더니, 8, 9월에는 수도원에서 이콘 강좌가 개설되기 때문에 지낼 수 없고, 7월 한 달 동안은 지낼 수 있다고 회신이 왔다.

로마 성 안셀모 수도원의 부원장인 스테파노 신부에게 방학동안 내가 자신의 수도원에 가서 생활할 거라고 하니까, 여름 내내 덥고 습기가 많아서 고생할거라는 말을 했다. 7월 2일 첫 방학의 설렘과 낯선 수도원에서의 생활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함께 갖고 기차에 올랐다. 수도원은 파도바 시외에 있었기 때문에, 역 앞 버스 정류장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40분 정도 더 가야했다. 초행길에 혹 수도원을 지나칠까 싶어 긴장하며 창밖을 바라보는데, 차창 밖으로 넓은 들판과 산들이 지나가곤 했다. 이 지역은 유명한 온천이 있어서 독일에서도 관광객들이 많이 온다고 한다. 수도원은 산을 끼고 있는 넓은 들판에 크게 자리 잡고 있어서 금방 눈에 들어왔다. 쁘랄리아라는 명칭도 '풀로 덮인 장소'라는 말에서 왔다고 한다. 그 큰 수도원이 높은 담으로 모두 둘러싸여져 있는 것도 특이하였다.

기도하고 돌아서면 다시 기도

▲ 수도원 복도.
쁘랄리아 수도원은 11세기에 설립되었지만, 1810년에 나폴레옹에 의해서 첫번째로, 1866년에는 새로 통일된 이탈리아 군대(올해가 이탈리아 통일 150주년이 되는 해이다)가 파도바에 주둔하고 종교단체의 해산을 명하는 법이 베네토 지방에서 발효되면서 두번째로 폐쇄되기도 했다. 그러다 1904년 다시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 후 많은 발전을 거듭하여 파도바의 산타 쥬스티나 수도원(1943년)과 베네치아의 산 조르죠 수도원(1957년)이 독립 수도원으로 분가했고, 1990년대에는 방글라데시에도 작은 공동체를 설립하였다. 현재 수비아코 연합회에서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베네딕도 수도원들 중에서 가장 활력이 있는 공동체로 꼽힌다.

방학 한 달 동안 그 활력이 무엇인지 몸(!)으로 깊이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마치 왜관 수도원에 처음 입회하여 대구 신학교 기숙사에서 1학기를 마치고, 방학을 맞아 수도원에 돌아온 느낌? ‘기도하고 일하라’는 베네딕도회의 모토를 다시금 실감했다고나 할까!

쁘랄리아 수도원에서는 시편 150편을 1주일 만에 모두 바치는 시편 배열을 사용하기 때문에 기도 때 마다 시편 수가 많고 기도 횟수도 더 많았다. 아침 5시 15분부터 근 한 시간에 걸친 독서의 기도와 그 이후 렉시오 디비나 시간, 그리고 다시 성당에 모여 아침 기도를 바치고 미사를 봉헌하였다. 로마에서 라틴어로 기도를 하기 때문에 라틴어로 바치는 시간전례가 크게 어색하지는 않았지만, 기도 시간과 횟수가 많아지면서 하루가 시간전례를 중심으로 촘촘하게 짜여진 듯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기도 마치고 돌아서면 기도, 또 돌아서면 기도,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젊은 수사들 중에서도 라틴어 시편을 책 없이 그냥 줄줄 읊는 사람들이 있었다.

8시 40분쯤 미사를 마치고 곧 오전 일을 시작하기 때문에 아침 식사를 언제 하는가 싶었는데, 독서의 기도 마치고 6시 20분쯤 잠시 하거나, 미사를 마치고 하는 것 같았다. 수도원에 도착한 다음날 처음으로 형제들의 안내를 받아 아침식사를 하는데, 모두 식탁 주위에 선 채로 간단하게 커피나 빵부스러기, 비스켓으로 아침식사를 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처음에는 그게 참 이상해서 식사를 했는데도 뭔가 늘 허전한 느낌이었다. 알고보니 이렇게 아침 식사를 하는 것이 수비아코 연합회의 방식이라고 했다. 이제는 수비아코 연합회에 속한 수도원에 가면 자연스럽게 서서 아침 식사를 하면서 ‘이게 너희들 전통이지!’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 수도원 식당.

▲ 식당 식수건 꽂이.

▲ 수도원 허브밭과 양봉장.

순간의 선택이 한 달을 좌우한다..  '농장 일'

2,3일 지나니까 손님담당 수사가 일을 하고 싶으면 자신에게 말하라고 한다. 그래서 흔쾌히 그러자고 했는데, 순간의 선택이 한 달을 좌우하고 말았다. 나는 즉각 농장 일을 하는 80대 중반의 에우세비오 수사에게 배속되었다. 하루 종일 7월의 이탈리아 뙤약볕 아래에서, 자연산 비누와 화장품을 제조하는데 사용하는 허브를 채취하는 작업을 하였다. 중간에 잠시 쉬자고 하거나, 아니면 오후에 일을 마치고 간식이라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평생 농장 일과 양봉 일을 하신 그 분은 항상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그 여름에도 수도복에 앞치마만 두른 채 묵묵히 일만 하실 뿐이었다.

비온 후 허브가 제대로 말라있지 않은 날에는 꿀을 병에 담는 작업을 하였다. 몇 시간 동안 꿀을 담고, 마개를 닫는 작업을 하다보면 손이 조금 비틀어진 듯 얼얼하였다. 토요일이면 다시 손님 담당 발터 수사에게 배속되었는데, 식당과 복도, 손님방 대청소, 정원 잡초 제거 등의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1시 반경 점심 식사가 끝나면 모든 형제들이 주방에서 함께 설거지를 한다. 그리고 기진맥진하여 방에 돌아와 쓰러져 있다 보면 어김없이 구시경(3시)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기도하고 다시 일. 저녁기도와 식사를 하고 나면 다시 함께 설거지를 한다. 그리고 식당 앞 복도에 놓인 의자에 앉아 공동휴게를 하는데, 콩깍지를 까거나 편지봉투를 부치는 등의 손일을 하면서 그날 있었던 일이나 형제들의 건강 문제, 중요한 수도원 문제들을 나누곤 하였다. 그 시간은 아주 인상적이었고 형제애가 넘치는 시간이었다. 여름철에는 끝기도가 9시 반 정도가 되어야 끝이 났다. 방에 돌아오면 아침 5시부터 시작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나 싶을 정도로 빡빡한 하루였고, 덥고 끈적끈적한 밤의 열기를 느낄 새도 없이 잠이 들곤 했다.

▲ 수도원 내부 정원.

주일 오후에는 수련자들이나 유기서원자들과 함께 인근에 있는 성모성지들을 방문하거나, 성 블라시오 성당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곳 수도자들은 오래 전에 방문했었던 우리 수도원 형제들도 곧 잘 기억하고 있었다. 휴게 시간이나 함께 산보를 가는 시간에 우리 형제들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들려주곤 했다. 이런 인연 때문에 2009년 수도원 100주년 때 특별히 이 수도원 아빠스도 초청을 했었는데, 아빠스를 대신하여 루이지 수사가 한국을 방문하였다. 평소 말수가 적은 루이지 수사는 서울분원에서 지내며 혼자 서울 구경도 하고, 왜관과 독도도 방문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즐기는 것 같았다. 아마 우리 형제들이 다시 쁘랄리아 수도원을 방문하게 된다면 이 수사의 한국에서의 무용담을 듣게 될지도 모르겠다.

허브밭에서 일하니 허브향기가.. 수도승의 향기로 묻어난다

쁘랄리아 수도원에는 40명 정도의 수도자들이 생활하고 있다. 이 정도면 이탈리아에서 아주 큰 수도원에 속한다.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수도원인 만큼 건물의 건축양식도 다양하고 예술적인 작품들도 많다. 항상 수도원에는 방문객들이 많았다. 그래서 시간을 정해두고 수도자들이 수도원 내부를 안내해 주었다. 방문객들은 안내 시간을 기다리며 수도원 생산물품을 파는 가게에 들르곤 하는데, 수도원에서 만든 자연산 화장품이나, 꿀, 성물 등을 구입하거나, 수도원에서 출판한 책들을 구입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이 다 하루하루의 시간을 알뜰하게 살아가는 수도자들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것들이기 때문에 다소 포장이 세련되지 않다고 하더라도 신뢰성은 더 있는 것 같다.

수도원 안에는 고문서나 양피지 책들을 복원하고 제본하는 작업장이 있다. 그리고 고서적과 현대 책들로 가득찬 도서관은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어서 누구든지 방문해서 열람할 수 있고, 인터넷으로 자료를 검색할 수 있다. 수도원 안에 있는 출판사에는 인쇄 기계는 없지만, 수도생활과 영성생활에 관한 책들을 꾸준히 출판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 수도원이나 마찬가지로 손님의 집이 있어서 방문객들이 수도원의 전례에 참석하며 며칠 동안 지내다 갈 수 있다.

내가 있는 동안 한국말을 하는 로베르토와 이라리아 부부를 만났는데, 서울의 어떤 기업체에서 일을 하고 있고 휴가라서 부모와 함께 수도원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다고 했다. 손님의 집 한 쪽에는 대규모 회의를 위한 다양한 시설들이 갖추어져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해도 아무런 문제없이 회합을 할 수 있었다. 쁘랄리아 수도원에서 지내면서 이곳이 어떻게 영적 중심지로써의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기도와 일의 단순한 리듬 속에 살면서도, 그 삶의 열매를 열린 자세로 나누고 있었다.

한 달이 다 되어 수도원을 떠나게 되었을 때 수도원 당가실에서 내게 기차표를 사 주었다.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동안 일을 도와준데 대한 감사의 표시라고 한다. 아무런 댓가도 지불하지 않고 수도원에서 지내면서 좋은 체험을 하게 해 준 것에 대해 오히려 내가 감사를 해야 하는데……. 이렇게 방학 때 마다 우리 사부 베네딕도 성인의 은덕과 베씨 집안 형제들의 후한 인심과 형제애를 느끼곤 한다. 그 후 몇 차례 로마에서 이곳 아빠스와 원장 신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럴 때 마다 언제 다시 쁘랄리아에 올 거냐고 묻곤 했다. 한 달 동안 허브밭에서 일을 하다 보니 내 몸에서도 허브 향기가 배어나는 것 같았다. 묵묵히 기도하며 일하는 이 분들에게서 맑은 수도승들의 향기가 난다.

▲ 수도원 전경.

쁘랄리아 수도원 http://www.praglia.it  
베네딕도회 수비아코 연합회 http://www.subiacocongregation.com  

*이 기사는 성베네딕도 왜관수도원에서 발간하는 <분도>지의 편집진과 상의하여 연재하는 글입니다.

글, 사진제공 박현동 블라시오 신부 (성베네딕도수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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