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터링 자료는 1월 27일자 955호 평화신문과 2584호 가톨릭신문이다.

 


교회신문의 외신면은 신문사 자체 취재가 아니라 외신의 인용보도가 대부분이기에 독자들로서는 큰 비중을 두지 않게 된다. 그저 세계교회에 대한 움직임을 단편적으로 알 수 있는 통로 역할로서 충분했다. 하지만 955호 평화신문의 6면을 보면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교회언론도 이런 속보를 낼 수 있고, 이렇게 사실보도를 할 수 있으며, 조금 부족한 듯해도 교회가 아닌 언론의 눈으로 분석해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였다. 물론 평화신문의 지면이지만 취재가 아닌 ‘외신종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신문은 비중 있게 그 기사를 다루었으며, 제목과 부제를 통해서 문제를 제기한 점은 높게 평가한다.

기사를 살펴보자. 앞서 말한 대로 평화신문은 6면의 세계교회 란에서 ‘로마 사피엔자 대학 교황 특별강연 왜 취소됐나?’ 기사를 외신에서 인용보도 하였다. 평화신문은 기사의 제목을 ‘18년 전 갈릴레이 재판 발언 곡해 방문 거부’로 달았다. 그것은 강연을 반대한 사람들이 과거 교황의 발언을 ‘곡해’해서 발생했다는 의미를 표현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평소의 교회신문 보도 자세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

바티칸과 주교회의에 관한 일도 ‘실시간 라이브’로 알려야

하지만 가장 먼저 눈에 뜨인 것은 보도시점이었다. 교황은 1월 17일에 로마의 사피엔자 대학에서 강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보도 10일 전이다. 하지만 16일에 강연이 취소되었다. 보도 11일전이다. 신문 편집이 통상 그 주간의 월요일이나 화요일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강연취소 5일 혹은 6일 만에 평화신문이 기사화한 것이며, 주간신문이란 것을 감안한다면 사건을 즉시 보도했다는 말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외신종합’에 등장하는 외신이 독자로서는 어느 ‘외신’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강연취소에 맞물려 즉각 보도를 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한 가지는 분명해 졌다. 교회신문도 ‘사건’에 강해 질 수 있다. 하물며 구중궁궐 바티칸의 교황에 대해서도 가능하다면 한국교회 혹은 주교회의에 관한 일 역시 ‘실시간 라이브’로 독자들에게 알권리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준거는 형성될 수 있다.

두 번째는 기사의 구성내용이다. ‘외신’은 교황의 대학 강연이 하루 전날 취소된 사건에 대하여 △무슨 일이 있었나? △또 다른 문제는 없나? 등의 단락을 이용하여 교황의 추기경 시절 발언과 종교인이 일반 종합대학의 개강식에서 특강을 하는 것은 수용할 수 없다는 반응에 대해 놀라운(?)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다시 한 가지 더 분명해졌다, 교회신문도 ‘사건’을 물 수 있다는 말이다. 경의를 표한다. 비록 외신의 인용보도이지만.....

하루아침 타의에 의해서 물러나왔던 신학자들에게
‘한국 가톨릭 신학계의 대가’라는 원하지 않는 훈장을 드리는 것보다는
사건의 전말과 명예회복이 우선이다.


잊혀진 이야기 다시 거론하자는 것이 아니라 위의 보도와 상치되는 일을 교회신문에서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1월 3일 한국교부학연구회에서 학술발표회를 했고 이와 관련하여 평화신문은 1월6일 15면에, 가톨릭신문은 1월 13일 20면에 보도한 바 있다. 평화신문은 기사를 이렇게 시작했다. “새해 벽두 모처럼 한국 가톨릭 신학계의 대가인 서공석, 정양모 신부가 삼위일체 교리와 신학에 대한 지평을 넓히는 자리를 펼쳐 흥미를 끌었다.” 교회의 언론에서 두 신학자를 ‘한국 가톨릭 신학계의 대가’라고 평가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아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두 신학자가 정년을 불과 얼마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서강대학교에서 물러나온 일에 대해서는 교회언론은 10년이 지나도록 입을 열고 있지 않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상임위원회는 1997년 7월 2일 서공석, 정양모, 이제민 신부와 관련하여 의결한 내용을 그 해의 9월 1일자 주교회의 회보에 실었으나 교회신문은 그 사건을 물지도 않았고, 물 수도 없었다. 하다못해 10여년이 흘렀으면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꼭지도 생기련만 아직 독자만 목이 길어 슬픈 사슴이 되어있다. 하루아침 타의에 의해서 물러나왔던 신학자들에게 ‘한국 가톨릭 신학계의 대가’라는 원하지 않는 훈장을 드리는 것보다는 사건의 전말과 명예회복이 우선이다. ‘외신종합’에서 교회신문의 가능성을 보는 것이 썩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그대도 할 수 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김유철 2008-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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