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모니터링 자료는 1월 13일자 평화신문 953호와 가톨릭신문 2582호이다.

 

언론을 가리켜 ‘거울’과 ‘횃불’로 비유하기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거울’은 눈으로 보는 바깥 모습만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내시경처럼 안에 묻힌 것, 특히 고의로 감추어진 것을 바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이다. 또 하나는 ‘횃불’로서 여론을 이끌어가는 기능이다. 마치 출애급때 밤을 밝히던 불기둥이 연상된다. 언론은 횃불을 들고 앞장서면서 독자들에게 방향을 제시한다. 멀리 그리고 자기 발밑을 비추고 가야하는 횃불은 바른 길로 함께 호흡하며 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교회용어로는 언론을 흔히 예언자직을 행하다고 한다.

2003년 1월 이후로 일반 언론에 천주교와 관련된 보도중의 압권은 ‘꽃동네’에 관한 일이다. 천주교회는 스스로 이 문제를 일컬어 ‘꽃동네사태’라고 불렀다. (2003년 6월 16일 주교회의 사회주교위원회 성명 ‘꽃동네사태에 관한 입장’) 아마도 그것은 이와 관련된 일의 심각성을 인식하였고 그 파장을 우려했다고 볼 수 있다. 교회언론 역시 ‘꽃동네’ 문제를 충격적으로 받아들였고, 평화신문은 그 해의 ‘가톨릭계 10대 뉴스’중의 하나로 선정하였다.(2003년 12월 21일) 그 이후 5년 동안 1심과 2심을 거치며 법정공방을 진행하였고, 지난 2007년 12월 27일에 대법원은 ‘꽃동네’ 설립자 오웅진 신부의 ‘국고보조금 예산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과 업무상 횡령’ 등의 혐의에 대해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와 관련하여 평화신문은 1월 6일자 1면, 2면 기사와 사설을 통해 소식을 전했고, 가톨릭신문은 1월 13일자 23면의 기사와 4면 사설을 실었다. 교회언론은 ‘무죄’ 확정에 따른 그간의 피해와 오명에 대하여 중점 분석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번 일을 통해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얻은 것인가? 이번 일을 통해 주님께서는 무엇을 우리에게 알리려고 했던 것인가? 사람 사는 세상에 억울한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하다면 일의 해결과정 속에서 무엇인가 한 가지라도 배워간다면 덜 억울할 것이다. 당시 주교회의 사무처 사무국장은 ‘꽃동네사태와 인터넷언론’(가톨릭신문 2003년 7월 13일)이란 기고에서 문제를 제기한 언론을 ‘황색언론’ 운운 한 바도 있다. 물론 화가 나겠지만 언론의 거울 기능을 생각해야 한다. 원인분석이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가톨릭신문은 대법원의 판결 후에도 1월 13일자 23면 분석기사인 ‘오웅진 신부 법적 공방이 남긴 것’을 통해 이번 일이 2003년 1월 MBC와 오마이뉴스 보도 때문에 논란에 휩쓸리게 되었다고 억울한 지난 일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에 반해 같은 교회신문이지만 평화신문은 사건초기인 2003년 2월 9일 사설을 통해 ‘언론의 보도태도와 검찰의 피의사실공표’를 나무람과 동시에 ‘부동산 구입과정에서 타인의 명의사용등 일반적 통례를 따른 일련의 사안들은 꽃동네 측에 대해 갖는 아쉬운 대목’이라고 말하며 ‘공적임무를 수행하는 기관이고 그 목적이 아무리 정당하다 하더라도 준법수준에서 이뤄지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이번 사건을 계기로 꽃동네를 포함 여타 시설들이 이 같은 문제 해결에 보다 고민해 주기를 촉구한다’라고 주문하였다.

이후 ‘꽃동네’가 2004년 2월 ‘꽃동네회지’를 통해 전년도의 수입, 지출내역 등 자체 운영결산을 처음으로 공개하였다. 평화신문은 2004년 2월 22일 사설을 통해 ‘꽃동네가 회계내역을 공개한 것을 환영하며 다만 이번 공개가 사회복지시설을 인가받은 1984년 이후 처음이라는 점에서 좀 더 빨리 공개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표시하며 ‘투명성을 담보로 하는 공개적 절차를 그동안 확실히 하지 않은 점에서는 유감이 없지 않다’고 말한바 있다. 솔직한 진단이고 정확한 판단이다. 평화신문은 대법원 판결에 즈음한 2008년 1월 6일자 사설에서도 ‘모든 것이 더 반듯하고 더 투명해야 하며, 꽃동네는 이번 시련을 쇄신과 성장의 기반으로 삼길 기대’하였다.

참으로 긴 시간을 힘들게 지내온 오웅진 신부와 ‘꽃동네’ 관계자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번 일을 통해 교회와 단체들은 ‘수단이 목적을 결정한다’라는 말이 주는 무게를 다시금 되새겨봐야 할 것이다. 무죄라는 판결이 오명에 대한 희생양을 찾으라는 말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라는 말로 새겨들을 수 있게 교회언론은 바른 횃불을 들라.

/김유철 2008-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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