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황인오]

가을비가 지나간 뒤 찬바람이 제법 서늘하게 살갗에 닿는다. 절기가 마침 상강이어서 비록 서릿발을 보지는 못했지만 기온의 변화는 어김이 없다. 산간지역에는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아 겨울을 재촉하며 무성했던 나뭇잎을 흩뜨리면서 만산홍엽의 아름다운 단풍도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다. 깊어가는 가을날의 앙상한 나뭇가지는 세월의 무상을 되뇌며 삶의 진폭을 더 해주는 사색의 훌륭한 소재이기도하다.

그들의 자유민주주의, 반공외세의존 독재정치

2013년부터 쓰일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집필 기준을 놓고 일부 정치적 학자들과 역사학계간의 공방이 격화되고 있다. 알려진 바와 같이 기존의 교과서에 '민주주의'라고 표기되어 있는 부분을 '자유민주주의'로 고치는 것을 골자로 그동안 가르치고 배워 온 현대사의 상당부분을 바꾸는 것이란다. 한 마디로 지난 수십 년 간 이 나라 민중들이 피땀흘려 얻어낸 민주주의의 내용을 축소왜곡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외세의 간섭과 독재로부터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한 민중의 피나는 투쟁에 벽돌 한 장 보태지 않은 자들이 몇 마디 개념 조작으로 역사적 반동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중국이 지난 2.000년 동안 우리 한민족의 역사로 명시적으로나 묵시적으로나 인식을 같이 하던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패권주의의 도구로 삼기 위해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왜곡을 자행하는 것을 흉내라도 내듯이.

주로 식민지근대화론을 지지하거나 이승만 독재 미화에 열중인 정치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역사교과서 개정 집필기준을 마련하는 것부터 잘못된 일이지만 이들이 자유민주주의나 제대로 이해하고는 있는지 의문이 든다. 이들이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등 민주주의를 참칭하며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거나 억압, 수탈한 자들의 ‘반공외세의존 독재정치’를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진시황 사후 환관 조고(趙高)가 진시황의 어린 아들 호해(胡亥)를 없애고 스스로 황제가 되기 위해 반대파를 숙청하려고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부르도록 한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를 연상케 하는 짓이다. ‘정의(定義)에 의한 존재강요의 오류’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앙상한 가짜 민주주의

민주주의의 공고화, 성장, 위기에 관한 연구로 이름 높은 스탠포드대학의 래리 다이아몬드 교수는 자유민주주의를 자유주의와 입헌적 민주주의의 결합으로 보면서 11가지 요소를 지표로 제시하고 있다. 그 중 두 번째가 '군을 비롯하여 민주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 기관은 선거에 의해 선출된 기관에 복종할 것'이다. 이들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한다는 자들이 1980년 5월 전두환 군사반란집단이 헌정을 유린하고 수많은 양민을 학살할 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묻지 않겠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몬 정치검찰을 비롯한 권력기관들의 행태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래리 다이아몬드교수가 제시하는 네 번째 요소인 개인들의 사상, 양심의 자유와 이를 자유로이 표명할 수 있는 토론, 출판 등 표현의 자유는 어떻게 되고 있나? 미네르바와 쥐 그림 사건은 물론 10월 26일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겨냥한 SNS탄압에 나선 최근의 사태에서 보듯이 이명박 정권 출범이래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위축되었는지는 더 말 할 것도 없다. 이렇게 자유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이들 신봉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

더 나아가 이러한 자유가 독립되고 평등한 법적용을 하는 사법부에 의하여 효과적으로 보장되고 있다고 믿어야 하는가? 또는 사법부의 결정은 존중받고 공권력에 의하여 강제되고 있으며 모든 시민은 법 앞에 정치적으로 평등하다고 체감하고 있는가. 행정 권력이 독립된 사법부, 의회, 다른 공적 기관 등에 의하여 효과적으로 견제되고 있는가. 이 사회의 수많은 소수자들이 억압받지 아니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들 자칭 자유민주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은 프란시스 라페가 <살아있는 민주주의>에서 지적한 ‘앙상한 민주주의(thin democracy)’라고 해야 할 것이다. 라페가 말한 ‘앙상한 민주주의’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사회집단의 합리적인 합의와 상호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가짜 민주주의이다.

무제한의 자유를 독점한 자본권력이 정부, 기업관료, 전문가집단과 함께 무엇이 일어날지에 대한 결정권을 갖고 시민들은 단지 투표하고, 일하고, 쇼핑한다. 최상의 보상은 주식소유자들에게 돌아가며 바로 이들이 시장을 움직이고, 시장은 부와 권력을 집중하며, 정치과정에 제한없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달리 말하면 권력과 부를 독점한 집단의 이익이 일방적으로 관철되고 수적으로는 다수를 점하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삶은 점점 궁핍하게 만드는데 봉사하는 껍데기뿐인 민주주의가 아마도 한국의 자칭 자유민주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이념일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부당하게 특권을 독점한 1%의 지배세력들이 부와 권력이 공평하게 분배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어선 99%를 진압하기 위해 갖가지 책략을 동원하고 있다. 유례없는 네거티브 선거 전략과 때 아닌 자유민주주의 논쟁으로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이 땅의 지배세력의 책략이 삶에 지친 사람들의 피로를 높이고 있다.

살아있는 민주주의, 현명한 투표로

늦은 가을날 오후, 거리를 뒹구는 낙엽과 앙상한 나뭇가지는 조락(凋落)하는 청춘과 인생을 관조하며 삶의 깊이를 더하는 향기를 주지만 ‘앙상한 민주주의’는 수많은 민중들의 삶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형해(形骸)하는 괴물일 뿐이다. ‘앙상한 민주주의’를 넘어 ‘살아있는 민주주의’를 만드는 것은 말이 아니다. 실질적으로 민중들이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구체적으로 보장하는 정치 체제를 구축하는데 있다. 그것도 민중의 힘에 의해 자율적으로 형성되어 가는 창조의 과정을 통해 구현되는 것을 요체로 하는 민주주의다.

그리 머지않은 과거의 한때 이 나라에도 라페가 말한 ‘살아있는 민주주의’가 가능성을 보인 적이 있다. 겨우 3년 반 만에 앙상하게 시들어가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회생시킬 중요한 계기가 될 서울시장 선거 투표가 몇 시간 남지 않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시민들이 직접, 구체적으로 참여하는, 미래를 향한 현명한 투표로 앙상하게 스러져 가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되살리자.

황인오 (부천@혁신과 통합 상임공동대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