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수도원 기행-2]

나는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어떤 미묘한 분위기를 잘 알아챈다. 같은 눈을 뜨고 있어도 내 눈은 사물을 보는 눈이 아니라 사람 속을 들여다보는 눈 같다. 그래서일까, 아무리 뛰어난 예술 작품을 봐도 별 감흥이 안 생긴다. 하지만 그 작품을 만든 사람에 대해서 알게 되면, 희한하게도 방금까지 무미건조했던 작품이 갑자기 흥미롭게 보인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굴곡지고 험난했던 작가의 인생까지 이해하는 순간, 저절로 눈을 감게 된다. 왜냐하면 눈으로 볼 수 없는 삶의 진실은 마치 영화처럼 내 앞에 생생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유럽 수도원 기행을 쓴다고 일부러 이탈리아 남단 시칠리아까지 찾아가서 성삼일을 지낸 성 마르티노 수도원(L'Abbazia di San Martino delle scale)은 이런 의미에서 정말 생각지도 않게 발견한 대작이었다.

▲ 산 마르티노 수도원 전경.

친절한 아빠스

▲ 파코미오 신부.
시칠리아의 주도州都인 팔레르모Palermo 공항에 내렸을 때는 “오, 뜨거운 시칠리아의 태양이여!” 하고 마중 나온 수사한테 너스레를 떨었다. 차를 타고 산기슭으로 삼사십 분쯤 올라가는데 숲속 공기가 에어컨을 틀어놓은 듯 시원했다. 산길을 굽이굽이 돌며 오를 때마다 여기저기 모퉁이 주위로 서너 집씩 다닥다닥 붙어 있는 조그마한 동네들이 나타났다. '매의 부리'라는 이름을 가진 산악 진입로를 넘어가자 녹음이 짙은 기슭으로 떨어졌고, 갑작스런 방문객에 놀란 듯 수도원이 부스스 눈을 뜨고 동행한 박 블라시오 신부와 나를 맞아주었다.

약 700년쯤 된 성당은 복원 공사 중이었는데, 교통사고 환자마냥 철골 구조물로 고정된 채 시멘트가 반창고처럼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수도원 출입문 안으로 들어서자 몬떼까시노 수도원 복도처럼 거대한 복도들이 전후좌우로 펼쳐져 있었다. 일반인들이 마치 박물관을 둘러보듯 수도원 복도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에 살짝 충격을 받았다.

이리저리 어수선한 분위기에 놀라 어리둥절해 있는데, 어디선가 아빠스께서 나타나셨다. 살바토레 아빠스, 2년 전 왜관 수도원 100주년 행사 때 한국에서 처음 뵈었던 분이다. 한국을 다녀가신 뒤로 이탈리아 수도원들을 다니시면서, 한국 자랑을 그렇게 많이 하셨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아빠스는 인정 많고 구수한 동네 아저씨처럼 몸소 우리를 데리고 다니며 수도원을 소개해 주었다. 수도원 복도에 문화재 복원 학교와 본당이 함께 있었고, 여러 복도 중 하나만을 따로 구분해서 수도원 봉쇄구역으로 쓰고 있다. 참 이상한 구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수도원의 역사에 대해 나중에 설명 듣고 나니 좀 이해가 되었다.

▲ 수도원 회랑의 성 베네딕도 상.

화려한 과거의 영화

전해 내려오는 말로는, 6세기 때 그레고리오 대교황의 뜻으로 이곳에 수도원이 세워졌다고 한다. 9세기 들어 사라센인들의 침략을 받아 수도원도 파괴되어 사라졌는데, 14세기에 들어 옛 수도원 터 위에 자리한 몬레알레Monreale 대교구가 다른 곳에서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을 초대했다. 이때 수도원이 재건축되었고, 수도원 이름도 걸인에게 자기 망토를 잘라준 일화로 유명한 성 마르티노의 이름을 땄다.

그 무렵 이탈리아의 베네딕도회 수도원들 안에서 가난과 복음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자체 개혁운동이 일고 있었는데, 성 마르티노 수도원도 그 영향을 받아 처음부터 거룩하고 가난한 수도승답게 열심히 살았다고 한다. 창설자는 훗날 복자품에 오르고, 수도원은 수사들로 넘쳤으며, 사람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다. 귀족들이 죽으며 수도원에 헌납한 땅과 재산도 갈수록 늘어났고, 수도원의 규모 또한 점점 커져갔다.

영성과 탄탄한 인맥에다 재력까지 겹쳐지니, 이제는 너 나 할 것 없이 이곳 수사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애썼다. 그 당시 몬레알레 대교구는 부유한 교구로 전 서방 세계에서 명성이 자자했다는데, 성 마르티노 수도원이 교구와 재력을 놓고 막상막하였다고 하니, 그 영향력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 몬 레알레 주교좌성당 전경.

▲ 부활 축제용 수레.

참 재미있는 수도원

수도원이 크다고는 하는데 여기 와서 지내는 동안 막상 성당은 공사 중이라 못 들어가서 복도에 딸린 큰 방에서 기도를 바치지, 복도도 이곳저곳 복원 중이라 곳곳이 막혀 있지, 식사도 사람 적다고 손바닥만 한 식당에 옹기종기 모여서 하지, 진짜 그 옛날에 그토록 번성하던 수도원이 맞나 싶었다.

▲ 몬 레알레 주교좌 성당 내부.
수도원 곳곳은 관리가 제대로 안 되어 산만하기만 했다. 이런 환경에서도 전혀 개의치 않고 기도할 것 다하고 일할 것 다하면서 묵묵히 웃으면서 사는 수사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사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곳 수도 공동체의 힘이 놀랍다고 느끼게 된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이곳에 도착한 첫날 저녁식사 때의 일이었다. 식당이 좀 외진 곳에 있어서 시간 맞춰 가려면 미리 방에서 나서서 긴 복도를 한참 걸어야 했다. 다들 종종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가고 있는데, 한 노인 수사님이 세발자전거를 타고 우리 앞을 휙 지나가셨다. 그러곤 식당 쪽 회랑으로 통하는 복도 끝에 자전거를 멋지게 후진 주차한 다음, 자전거에서 내려 뒤뚱뒤뚱 식당으로 앞서 걸어가셨다. 다리가 불편하신 노인 수사님 한 분이 수도원 복도에서라도 틈틈이 운동하실 수 있도록 한 아빠스의 배려였다.

‘참 재미있는 수도원이군’ 하고 생각하면서 식당으로 계속 걸어가고 있는데, 아빠스께서 우리 곁으로 다가오셔서 뭔가 머뭇머뭇하시는 태도로 말씀하셨다. "우리 수도원에 정신이 조금 이상한 수사님이 한 분 계신데, 식당에서 자꾸 큰소리를 내시거든, 빠코미오, 블라시오, 그러니까 이따가 이분이 고함을 치셔도 절대 놀라지 마."

이게 또 뭔 소린가 싶었는데, 식당에서 정말 깜짝 놀랄만한 쇼킹한 일이 있었다. 식사를 시작하고 한 5분쯤 됐을까, 갑자기 한 70대쯤 돼 보이는 수사 한 분이 포크를 든 손을 마구 떨면서 "아빠스!!!" 하고 고함을 쳤다. 순간 나도 맞은 편 수사 쪽을 바라보았다. 젊은 수사 한 명이 옆에서 접시 위에 놓인 그 노인 수사님의 음식을 드시기 좋게 잘라 주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빠스!!! 여기 좀 봐! 고기가 없. 잖. 아." 나는 놀라 아빠스를 바라보았다. 아빠스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하긴 했지만 이런 일이 일상사가 됐는지 그냥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식사를 계속 했다. 이제 한 번 소리치고 잠잠해지시나 싶었는데, 갑자기 또 큰소리가 들려왔다. "✕✕✕!!!". 참 듣기 민망한 육두문자였다. 다른 수사들도 민망했는지, 애써 태연한 척했다. 아빠스도 우리 쪽 얼굴 한 번 보고, 욕쟁이 수사 얼굴 한 번 보고 그러시면서 계속 식사를 이어가셨다.

보다 못한 다른 한 노인 수사가 이제 그만 식사하라고 조용히 나무라시자 욕쟁이 수사는 다시 순한 양이 되어 식사에만 열중했다. 이런 광경이 식사 때마다 똑같이 되풀이되었다. 이것도 자꾸 보니까, 처음의 당황스럽던 감정은 다 사라지고 나중에는 공짜로 코미디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부활 성야를 마치고 본당 신자들과 어울려 다 같이 샴페인을 터뜨리고 양고기를 뜯던 자리에서도 이분은 매한가지였다. 모든 신자들이 보는 앞에서 아빠스님에게 다시 한 번, "✕✕✕!!!" 하고 욕 한 방을 날리셨다. 회중의 눈치를 쓱 살펴보니, 다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였다. 아빠스며 여러 신자들이 오히려 그 욕쟁이 수사 곁으로 와서 샴페인을 따르며 부활 축하를 드렸다. 너무나 자연스러워 내가 더 놀랐다.

▲ 산 마르티노 수도원 정문

열심히 살기와 바르게 살기

시칠리아에는 마피아들만 득실득실할 것 같고, 믿음보다는 이상한 신심들만 있을 것 같았던 편견이 수도원에서 지낸 며칠 동안 나도 모르게 다 사라졌다. 사람 사는 것이 언제나 그렇게 멋지기만 하고 성공과 명예의 가도를 달리는 주인공이 되는 것은 아니듯이, 수도원도 마찬가지로 흥망성쇠가 있다. 과도기도 있고 침체기도 있으며 문을 닫는 시기도 있다. 그런 어둡고 힘든 시기에 수도원에서 살아가는 수사들의 고통은 참으로 크다. 폐허 같은 유적에서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는 수도원에 수도 생활하겠다고 찾아와 벌써 종신서원까지 하고 살고 있는 몇몇 젊은 수사님들이 그래서 더 대단하게 보였다.

들으니, 앞서 말한 그 욕쟁이 수사가 하도 부담스러워 몇 년 전에 공동체 회의를 했다고 한다. ‘병원에 보내버릴까’ 고심을 하다가 내린 결론이 ‘그냥 공동체 형제들이 참고 견디며 그분을 끝까지 모시고 살자’였다. 평생 수도원에서 살아왔는데, 좀 문제가 있다고 수도원 밖에서 여생을 보내게 할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늘 열심히 살자는 말에만 익숙해서 이분들은 마치 별로 열심히 살지 않는 것처럼 느꼈는데, 정말 이분들이야말로 하루하루 치열한 내적 투쟁을 하는 수도자들임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열심히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르게 사는 것이다.

복음적 가치에 따라 바르게 살고자 애쓰면 비록 수도원이 어쩔 수 없이 쇠퇴한다 해도 성령의 불꽃은 결코 꺼지지 않겠지만, 세상 가치에 따라 수도원이 열심히 살면 비록 세세대대로 사람들한테 칭찬을 듣는 다해도 하느님 앞에선 얼마나 허무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이런 이상과는 한없이 멀리 떨어져 있는 내 삶이지만, 시칠리아의 산 마르티노 수도원 공동체가 보여준 그 아름답고 적나라한 모범은 영원히 내 안에 남아 있을 것 같다. 수도자로 산다는 게 무엇인지 역설적으로 깨우쳐준 살바토레 아빠스와 욕쟁이 수사가 정말 고맙다.

*이 기사는 성베네딕도 왜관수도원에서 발간하는 <분도>지의 편집진과 상의하여 연재하는 글입니다.

최종근 파코미오 신부, 사진제공 박현동 블라시오 신부 (성베네딕도수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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