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8월에 「미디어 흘겨보기」를 시작했다. 우리신학연구소의 주간지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 지면과 함께 인터넷 교회 언론 ‘지금여기’에도 동시에 게재를 했다. 신문비평을 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보다는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심정이었다. 일반신문에는 ‘지면평가위원회’나 ‘독자권익위원회’ 혹은 ‘시민편집인실’ 등등의 이름으로 독자가 신문제작에 참여할 길이 넓어지고 있다. 직접 참여한 경험으로는 이런 조직에 의한 평가마저 신문사는 썩 달가워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사는 알게 모르게 독자들의 평가를 신문제작에 반영한다. 돌이켜 생각해보자. 독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단순한 독자가 아니라 ‘유료독자’가 무엇을 위해 대금을 지불하고 신문을 구독하는가? 그런 질문은 신문사로서는 외면할 수 없는 문제다.

현재의 교회신문은 독자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가? 꼭 필요한 신문, 좋은 신문,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좋은 신문, 일방적 신문,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신문, 나쁜 신문, 없어야 할 신문, 있는지 없는지 관계없는 신문, 무관심…… 그 와중에 교회신문은 자리하고 있다. 교회신문은 꼭 필요한 신문 ‘이어야’ 한다. 교회신문은 그들의 창간 이념(미디어 흘겨보기-1 참조)에 비추어 볼 때 ‘있어야’ 하는 존재다.

「미디어 흘겨보기」가 평가를 한 것과 할 것은, 무엇보다 다양한 독자의 눈높이를 생각하고 발로 뛰는 기사의 완성이다. 자세하고 적극적이며 구체적인 보도, 전문적이거나 편향되지 않은 적절하고 정확한 용어의 사용,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교회신문의 정체성, 창간 정신의 실천, 읽기 쉬운 편집, 외래어 어투의 사용 견제와 우리말 사용, 사실관계 확인과 검증된 기사 등을 지향하고 제목과 기사 혹은 기사와 사설의 불일치, 교구청 제공의 행사 위주 기사 혹은 사진의 한계, 일부 교구 중심의 보도, 신자 정치인 혹은 성직자에 대한 지나친 배려, 기사에 의한 간접 광고, 관성적 보도, 모르쇠 보도 혹은 재활용 보도를 지양해야 한다. 그뿐인가 사진과 지면의 인쇄 상태, 광고, 오탈자에 이르기까지 24면 모두가 평가의 대상이다. (아, 작전 노출인데~.)

8월부터 시작한 「미디어 흘겨보기」는 연말까지 한 주도 쉬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은 교회신문에 지적할 것이 끊임없이 있었다는 뜻이 될 것이다. 마치 ‘보물 상자’처럼 열 때마다 그곳에는 ‘깜’이 있었다. 비평자의 눈으로 교회신문을 펼치면 만족보다는 2% 부족함이 읽힌다. 왜일까? 교회신문사 위치의 특수성이 제일 먼저 눈에 띤다. 성직자가 대표이사로 있기에 교회의 다른 면을 보도하는 것이 쉬울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주간신문의 형태는 느긋한 기획기사에는 어울리지만 속보성엔 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비평자로서 아쉬워하는 것은 ‘교회의 눈으로’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으로’ 바라보는 보도의 실종이다. ‘예언자’의 눈은 앞에 말한 보도관점을 가질 때 그렇게 멀리 있지 않을 것이다.

이제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기관이나 학교, 병원, 연구소, 교회 등의 사무실에서 교회신문을 보기보다는 집에서 구독료 내고 보자. 지금 현재 교회신문을 집에서 보는 개인독자가 어느 정도인지는 비평자는 자료를 갖고 있지 않다. 많은 이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교회신문을 멀리하고 있다. 특별히 교회가 그토록 자랑하는 청년들의 교회신문에 대한 생각은 절망적이다. 그러기에 애정 어린 비판을 신문사는 가슴을 열고 수용해야 할 것이다. 신문사를 바꿀 수 있는 힘은 독자에게서 나온다. 당당한 독자가 되는 유일한 길은 돈 내고 신문 보는 것이다. 그리고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말하자. “유료독자입니다. 신문논조 바꾸어주세요..”

새해를 맞으며 교회신문들의 발전을 기원한다. 한국식 파이팅이 아니고 말 그대로 Fighting이다.

/김유철 2008-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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