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수도원 기행-1]

▲ 독일 바이에른의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박현동 블라시오 신부

로마에서 첫 방학을 맞고 독일로 향했다. 나중에 필요할 테니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방학을 보내며 독일어를 배우라고 했다. 이탈리아어도 시원치 않은 판에 독일어라니, 그래도 우리에게 언제 선택의 여지가 있었던가? 서원장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유학을 떠난 터라 순명의 정신은 그때까지도 팔팔하게 용솟음쳤다. 여하튼 여행의 감동이 식기 전에 써야할 기행문을 5년이나 지난 묵은 추억을 반추해 쓴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머문 시간이 합쳐서 반년 가까이 되니 체류기에 가까운 글이다.

동구 밖 가로수 길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을 가려면 뮌헨에서 광역전철을 타고 교외로 빠져나와 한 시간 정도 가야 한다. 종점인 겔텐도르프 역에 내려서 역사를 빠져나와서 수도원 표지판을 따라 조금 걷다보면 수도원 성당 종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드물기는 하지만 날씨가 좋은 날에는 종탑 뒤로 알프스 산맥이 펼쳐진 장관을 볼 수 있다.

종탑이 보인다고 수도원이 지척이겠거니 짐작하겠지만, 처음 가보는 사람들에게는 꽤나 멀게 느껴지는 거리다. 역을 벗어나서 만나는 굴다리부터 수도원 입구까지 이르는 길은 아름드리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포장도 하지 않는 흙길이다. 길에 들어서자마자 지금껏 보았던 세상과는 다른 특별한 곳으로 들어간다는 느낌이 든다. 입구에 차단막이 있어 보행자와 자전거만 다닐 수 있는 길이라 호젓하기 이를 데 없다.

▲ 수도원 입구의 가로수 길. ⓒ박현동 블라시오

겔텐도르프에서 수도원까지는 차로 가기에는 조금 짧고 걸어가기에는 조금 먼 애매한 거리다. 수도원에 오래 머무는 손님들에게는 자전거가 하나씩 지급된다. 하지만 길은 역시 걸어야 제 맛이다. 자전거를 타고 다닐 때보다 걸어 다닐 때가 더 운치가 있다. 정작 이 길이 좋은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놀랍게도 그런 시골구석에 중국집이 있었다. 가끔 한국음식이 그리우면 겔텐도르프까지 걸어가 중국음식을 사먹곤 했는데, 가는 길은 기대감으로 오는 길은 포만감으로 행복했다. 깔깔대고 웃으며 가로수 길을 따라 오고가던 시간은 유쾌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농부 수도원

누가 유럽에서 다녀본 수도원 중 어디가 가장 마음에 드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주저 없이 상트 오틸리엔이라고 대답한다. 상트 오틸리엔은 유럽의 다른 수도원만큼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렇다고 주거환경이 쾌적하거나 음식 맛이 특별히 좋지도 않았다.

상트 오틸리엔에서 나는 지붕 바로 밑에 방을 배정받고 살았는데 천정이 낮고 한쪽은 경사가 져 있었다. 음식은 아마도 유럽 수도원 중에서 꼴찌를 주어도 시원치 않을 정도였다. 그래도 상트 오틸리엔이 좋았다. 다른 수도원에 비해 세련되지 못하고 촌스러운 맛이 풍겼지만, 촌놈인 나에게는 오히려 그런 분위기가 편하게 다가왔다.

무엇보다도 소박하고 부지런한 수도형제들이 마음에 들었다. 나중에 로마로 돌아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친한 독일 수사 하나가 자기들끼리는 상트 오틸리엔이 ‘바우어 클로스터’(농부 수도원)로 통한다고 알려주어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난다.

▲ 수도원 항공사진. ⓒ박현동 블라시오

수도원 안에 기차역이?

수도원 주위에는 민가가 없다. 옥수수 밭과 호밀 밭이 아니면 목초지가 펼쳐진 벌판 위에 수도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 어마어마한 땅들이 전부 수도원 소유였다. 옛날 부자들이 사방 십리를 자기 땅만 밟고 다녔다는데, 상트 오틸리엔 수사들도 인근 마을까지 수도원 땅만 밟고 다닌다.

허나 비옥하게 보이는 수도원 땅 중 상당부분은 원래 늪이었다고 했다. 수사들이 늪을 말리고 개간하여 농토를 만드느라 오랫동안 수고를 들였다. 그 넓은 땅을 경작하려니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수도원의 근면한 가풍은 이미 설립초기부터 자리 잡은 모양이다.

수도생활에서 노동이란 생계의 수단일 뿐 아니라 수행의 방편이다. 베네딕도 성인께서도 자기 손으로 일해서 살아갈 때 진정한 수도승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상트 오틸리엔에서 노동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상트 오틸리엔은 선교활동을 표방하고 해외로 진출한 첫 베네딕도회 수도공동체였다. 동아시아와 동아프리카에 있던 거대한 선교지의 선교활동을 관장했으며 선교지원활동을 아직까지 계속하고 있다. 그러므로 상트 오틸리엔 수사들의 노동은 직간접적으로 선교활동을 지원하는 성격을 띤다.

▲ 상트 오틸리엔 역. ⓒ박현동 블라시오

당시 활발했던 선교활동은 수도원 구내에 설치된 기차역이 대변해준다. 지금은 이용하는 사람들이 드물어 간이역으로 쇠락했지만, 아우구스부르크로 향하는 완행기차가 정차하는 상트 오틸리엔 역은 한때 선교지로 떠나는 선교사들과 물품들로 북적거렸을 것이다. 한국 전쟁 후 우리가 독일에서 받은 구호품이 이 역을 통해 함부르크 항으로 운송되었다고 한다.

박물관의 박물관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어낸 덕택에 상트 오틸리엔은 한 세기 밖에 안 되는 짧은 역사에 불구하고 유럽에서 손꼽히는 수도원으로 성장했다. 한때 겸재 정선의 그림이 전시되었던 선교박물관에는 전 세계에 퍼져 있던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수집한 풍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아프리카에서 온 동물박제와 표본들 그리고 생활용품과 사냥도구들이 주종을 이루는데, 선교하지 않고 수집하러만 다녔나 싶을 정도로 전시물의 종류와 숫자가 엄청나다.

심지어 한국에서 수집한 화투짝이 끼어 있을 정도니 할 말을 잃는다. 선교박물관은 60-70년대 전형적인 박물관 모습을 하고 있는지라 ‘박물관의 박물관’ 이란 별칭이 붙었다고 했다. 오래된 박물관을 소장하는 박물관이 있다면, 선교박물관이 그곳에 전시할 될 만한 골동품이란 소리다. 아마도 조만간 새 단장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올 듯싶다.

▲ 선교박물관 내부. ⓒ박현동 블라시오

두 분의 수석 아빠스를 배출한 저력

상트 오틸리엔은 보이론 수도원 출신인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가 1884년 레겐스부르크 인근 라이헨바흐에 세운 선교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지역 교구장과 생긴 마찰을 피해 1887년 선교회를 아우크스부르크 인근의 엠밍으로 옮겼다. 선교회가 옮겨 온 후 지명은 상트 오틸리엔으로 바뀌었다. 그곳에 성녀 오딜리아에게 봉헌된 조그만 경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베네딕도회 수도생활에 선교활동을 접목시키고자 했던 암라인 신부의 이상은 상트 오틸리엔에서 실현되었다.

▲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 묘소.ⓒ박현동 블라시오
1887년에 동아프리카(현재 탄자니아)로 첫 선교사를 처음 파견한 후, 상트 오틸리엔은 한국, 중국, 미국, 베네주엘라, 남아프리카 공화국, 콜롬비아, 필리핀으로 선교활동의 범위를 넓혀갔다. 상트 오틸리엔은 1902년에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서울 백동 수도원,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 슈바이클베르크 수도원을 설립했고, 1914년에는 총아빠스좌 수도원의 칭호를 얻었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은 현재 20개의 자치 수도원으로 이루어진 오딜리아 연합회의 모원이자 총원이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은 베네딕도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높다. 전세계 베네딕도회를 대표하는 수석 아빠스를 두 분이나 배출했고 그 가운데 한 분은 아우구스부르크 교구장까지 역임했다. 빅톨 담메르츠 주교와 현임 노트켈 볼프 수석 아빠스가 상트 오틸리엔의 역량을 상징하는 분들이다.

잊지 못할 형제들

상트 오틸리엔은 방학이면 내려가는 시골 외할머니 댁처럼 푸근했고 정겨웠다. 수도원 곳곳이 숲과 연못이 잘 어울러져 있어서 고요하면서도 아늑한 정취가 났다. 주일 오후에는 수사들만 들어갈 수 있는 비밀연못에서 수영을 하거나 일광욕을 했고 숲길을 따라 산책을 나섰다. 어설픈 독일말로 말을 트기 시작하자 수사들과 금세 친해졌다. 철공소 책임자 로마노 수사는 독일말을 한 마디라도 더 가르쳐주려고 안달이었고, 까다롭기로 소문난 제의방의 안셀모 수사도 곧잘 농담을 걸어왔다.

어학원을 마치고 한 달 동안 빵집에서 일하면서 클레멘스 수사와 곤라도 수사와도 친해졌다. 클래식을 좋아했던 클레멘스 수사는 좋아하는 곡들을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해서 주었고, 태권도 공인 1단인 곤라도 수사는 원래 뼛속까지 친한파親韓派였다. 김나지움 기숙사 사감인 비안네 신부는 학생 중에 아일랜드에서 온 한국애가 있다며, 한글을 무척 열심히 배웠다. 시원시원하고 상냥한 그는 방학에 일이 없는지라 우리와 잘 놀아 주었다. 그는 성가대장도 맡고 있었는데,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성가대는 음반을 취입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성가대가 부르는 노래는 엠마누엘 신부의 능란한 오르간 반주와 잘 어울려 잊지 못할 감동을 주었다.

잃지 않은 활기

성소가 완전히 끊기다시피 한 유럽의 다른 수도원에 비해 상트 오틸리엔은 조금 사정이 나았지만, 고령화의 물결을 피해가지 못했다. 하지만 수도원 안에 있는 김나지움(인문계 중고등학교인데 상트 오틸리엔은 초등부까지 있다.)이 활기를 전해주는 듯 했다. 수도원 미사나 행사에 김나지움 밴드부가 와서 연주를 하거나 김나지움 학생들이 벌이는 행사에 수사들이 참여했다.

김나지움 행사 중에 ‘치르쿠스 상트 오틸리엔’이 볼만했다. 입장료까지 받는 진짜 서커스였다. 수도원 잔디밭에 커다란 천막을 쳐놓고 열흘에 걸쳐서 학생들이 써커스를 했다. 음향이나 조명도 학생들이 맡을 뿐더러 공연장 밖에도 사람들의 흥미를 끌만한 부스가 여럿 마련되어 있어 제법 분위기가 났다. 2년에 한 번씩 여는 이 축제를 위해 전문 곡예사를 불러다가 특별활동 시간을 이용해 곡예를 배운다고 했다. 수사들은 물론이고 예레미아스 슈뢰더 총아빠스까지 출연하는 깜짝 공연도 있어 흥미만점이었다. 이런 행사들은 수도원을 세상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세상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살고자 노력하는 수사들을 보면서 아직도 상트 오틸리엔의 선교정신이 사그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김나지움 축제. ⓒ박현동 블라시오


지난달 본국휴가를 다녀온 보나벤뚜라 수사가 모원을 걱정하는 소리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벌써 5년이 지났다. 수도원 입구의 가로수 길, 비밀의 연못, 갓 구운 빵 냄새가 구수했던 빵집,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갔던 김나지움 지하의 맥주홀, 모두 모두 잘 있을까? 그리고 정겨웠던 분들은 평안한지? 다시 한 번 상트 오틸리엔을 방문할 날을 기다린다.

*이 기사는 성베네딕도 왜관수도원에서 발간하는 <분도>지의 편집진과 상의하여 연재하는 글입니다.

고진석 이사악 신부/ 사진제공 박현동 블라시오 신부 (성베네딕도수도회 왜관수도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