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의 빛>, 김춘희 수녀, BG북갤러리, 2011

“오늘을 사는 세상 사람들은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과 자신들을 무신앙인 혹은 무종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조차 물질과 과학이라는 두 신을 함께 섬기고 있는 듯하다. 상대적으로 인간의 드높은 정신과 영성은 억압되고 무시되고 고갈되어 가고 있으며, 기존의 종교들은 인류의 성장과 진화라는 우주적 목표에 힘찬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 무아의 빛_무아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의 해석적 생애사, 김춘희.

무아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한국순교복자수녀회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의 창설자)에 대한 ‘해석적 생애사’를 집필한 김춘희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가 <무아의 빛>이란 책에서 내비친 말이다.

한창 시성시복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김춘희 수녀는 오히려 한국교회가 초기신앙인들과 순교자들의 비전과 영성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일갈했다. 김 수녀는 “보통의 신자들이 신앙적 의식성장이나 영적 성장을 통해 신앙적 가르침의 핵심에 도달하지 못하고 아직도 기복적 의식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대로라면 유럽교회처럼 한국교회도 앞으로 하향선을 그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김 수녀는 1900년에 태어나 1986년에 선종한 무아 방유룡 신부의 영성에 주목하라고 제안한다. 방 신부는 1946년 부활대축일에 한국 최초의 방인수도회인 한국순교복자수녀회를 창설하고 1953년에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를 창설했다. 김 수녀에 따르면, 한국교회는 선교사에 의해 전래되지 않고 학문적 성찰을 통해 스스로 신앙적 진리에 도달한 유학자들이 직접 세운 교회이며, 진리를 향한 숭고한 정신과 순교를 마다하지 않는 영적 힘을 가진 교회였으나, 차츰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의 영향권에 들어가면서 초기 신앙인의 정신적 가치가 퇴색되고 서구화되었다고 비판했다.

이에 방유룡 신부는 유불선(儒佛仙) 문화가 녹아든 한국적 정신 토양에 맞는 영성과 수덕체계를 세워 초기 신앙인들의 창조성과 영성의 맥을 이었다고 말한다.

▲ 1926년 5월 23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삭발례, 수단을 입고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는 방유룡.(두 번째 줄 가운데)

“오늘부터 나는 성인된다”

김춘희 수녀는 <무아의 빛>에서 방유룡 신부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며 그 영성의 독특함을 드러내고 있는데, 한마디로 ‘금욕적인 중세적 성인상에서 벗어나 현대적 감성에 적절한 성인상’을 제시한 사람이 방유룡 신부라는 것이다. 김 수녀는 먼저 방 신부의 별명에서 그 독특함을 찾아낸다.

17살의 나이에 용산 소신학교에 입학한 방유룡의 별명은 ‘종로 깍쟁이’였다. 궁내부 주사로서 영국공사관의 통역관을 지낸 아버지(방경희)와 한학자이자 뮈텔주교와 브로이어 주교에게 한문을 가르쳤던 할아버지(방제원)를 둔 서울내기 방유룡은 ‘촌놈’이라고 불린 동기생 노기남과 다르게 행동거지에 거침이 없는 멋쟁이였다. 신학생 때도 빳빳한 모시두루마기를 입고 맥고모자를 쓰고 단장 집고 금테 안경 쓰고 귀또구두를 신고 다녔으며, ‘감히’ 교수화장실을 사용하던 방유룡은 엄격한 신학교 분위기상 ‘사제되기 글렀다’는 평을 받았다.

순종에 익숙한 여느 신학생과 다르게 자존감이 높았던 방유룡은 신학교 생활의 위기를 경험하면서 급기야 깊은 성찰 끝에 “오늘부터 나는 성인된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예전엔 사제가 되는 게 목표였다면, 이제는 성인 되는 게 목표가 되면서 사람이 완전 변신한다. 동정도 없는 까만 무명저고리를 입고 학교에 다시 나타난 방유룡은 이른바 ‘루나 띠꾸스’가 된 것이다. 싸움 잘하던 그가 침묵을 지키고 화도 내지 않고 학교 규칙을 지키고 멋 부리는 일이 사라졌다. 그래서 동창들은 ‘달에서 사는 사람’이란 뜻의 별칭을 붙여준 것이다. 삭발례를 하고 찍은 사진에서도 방유룡은 정면을 바라보지 않고 삐딱하게 몸과 시선을 모두 왼쪽으로 향하고 있다.

이를 두고 김춘호 수녀는 “왼쪽은 자의식이 강함을 의미하고, 여성적이며 현실보다 회피, 공상과 이상과 동경을 나타내며, 내향적이고 내면적인 것을 상징한다”고 말하면서, ‘종로 깍쟁이’ 시절처럼 명랑하고 재미를 추구하고 용감했던 오른쪽에 반대방향에 서서, ‘대극일치’로 나아가는 도상에 있었다고 전한다. 이 당시 ‘방수사’라는 별명이 덧붙여질 정도로 방유룡은 열심히 기도하고 묵상하고 침묵을 지켰다. 그렇다고 해서 방유룡이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엄격하며 음울하게 고독한 생활과 침묵만 지킨 것은 아니었다. 기도생활과 아울러 ‘공상당(空想黨) 당수’라고 불릴 만큼 낭만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쌍뚜스’는 아니었다.

주교직도 거절하고 천만사에 자유롭고 싶었던 영혼, 방유룡

방유룡 신부는 1930년 사제품을 받고 강원도 춘천성당에서 첫 사제생활을 시작했으며, 이후 황해도 장연, 재령, 해주, 개성에서 사제생활을 하고, 서울 가회동, 제기동, 후암동 성당을 거치면서 25년 동안 본당사목을 했지만 그의 꿈은 수도생활을 통한 ‘성인됨’에 있었다.

▲ 무아 방유룡 신부가 작사작곡한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노래 친필 초고.

김춘희 수녀는 방유룡 신부가 참된 자유인이 되기 위해 먼저 “하느님께 자신을 묶어두려고 했다”고 전한다. “인간은 때대로 하느님께 자신을 묶지 않으면 돈이나 권력이나 인간이나 자신이나 무엇에든지 숭배하고 절하기 마련인 것을 너무나 잘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방 신부는 ‘순명하는 하느님의 종’이 되기를 원했다.

실제로 방유룡 신부는 ‘돈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물질에서 자유로웠으며, 인간관계에서도 자유로워서, “교제술이 성직자나 수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인가?” 묻는다. 방 신부는 수도회를 설립하고도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통회하고 정개, 보속하면 늘 용서해 주었지만, 회개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때로 매우 엄격했다”고 한다.

또한 인습에서도 자유로웠다. 그는 권위와 위엄을 아니라 온화한 미소로 사람들을 대하며, 신자들과 후배 성직자들에게도 항상 경어를 사용했다. 특별히 음악에도 관심을 보여, 공의회 이전인데도 우리말 가사로 전례곡을 작곡해 가르치고, 1935년 해주본당에서는 젊은 여성성가대와 혼성합창단도 만들었다. 한편 방유룡은 신부는 한국교회에서 처음으로, 신자들에게 아직 성인품에 오르지도 않은 한국 순교복자들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

일제식민지 말기에는 원 라리보 주교에게서 주교직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대신에 2살 아래인 노기남 신부가 교구장이 되도록 도왔다. 그러나 불행히도 노기남 주교가 교권에 집착하면서 동창신부인 윤형중 신부와 방유룡 신부를 압박한 것은 교회사상 불행한 일이었다. 방 신부가 한국순교복자수녀회를 창설했다면, 윤형중 신부는 ‘한국천주교순교자현양회’를 만들었다.

한편 윤형중 신부가 방 신부처럼 부주교 제안을 거절하고 양기섭 신부에게 양보했는데, 노기남 주교는 양기섭 부주교와 한패가 되어 윤형중 신부를 미리내 본당으로 귀양보내고, 상심한 윤 신부가 순교복자회에 입회하려는 것도 막았다. 또한 방유룡 신부가 양성한 박성종 신부가 유학에서 돌아오자 박성종 신부의 복자회 입회도 가로막았다.

방유룡 신부의 침묵과 윤형중 신부의 외침

김춘희 수녀는 노기남 주교와 윤형중 신부와 방유룡 신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노기남 주교가 교권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면, 방유룡 신부는 “수도원 담 안에서 수도자의 고요와 침묵의 길을 간 사람”이며, 윤형중 신부는 “사회를 향해 소리를 내고 외치는 언론인”이었다는 것이다. 즉 방 신부와 윤 신부는 “침묵과 외침”이라는 대극(對極)을 살았던 동지였다.

방유룡 신부가 “성인은 평범한 사람들 누구나 될 수 있다”는 ‘영성의 대중화’ 또는 ‘영성의 민주화’를 이루려고 노력한 사람이라면, 윤형중 신부는 유신정권아래서 ‘민주회복국민회의’를 맡고, 선종하면서까지 유산을 ‘민주화’를 위해 써달라고 한 예언자적 삶을 살았다.

이를 두고 김춘희 수녀는 “지금 한국교회는 촉발하는 영적 갈증을 해결해 주지 못하고 전통적인 의식의 틀만 고집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한국 가톨릭은 일시적이고 상업적인 영성프로그램이나 뿌리 없는 사이비성 종교에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신자들이 증가하고 있는 사태의 심각성을 하루빨리 자각하고 대비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아울러 “교회도 사회를 향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던 윤형중 신부의 혜안에 주목해야 한다면서, “현재 가톨릭은 학교, 병원, 사회복지 등 여러 분야에서 사회를 향해 응답하고 있으면서도 민주사회의 건설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언론, 방송매체는 가지고 있지 않다. 있어도 신자들을 위한 신문과 방송에만 국한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 1968년.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녀들에게 종신서원 반지를 수여하는 방유룡 신부.

하느님 안에서 ‘즐기는’ 수도생활

김춘희 수녀는 무엇보다 “유럽의 수도원은 이제 거의 망했다. 왜 우리가 망한 수도개념과 수도신학을 오늘에 와서도 맹목적으로 따라야 하는가?”하고 통탄하며, “우리 수도생활은 공자 왈 맹자 왈 하던 시대의 옷과 로마와 유럽 전제군주시대의 옷을 아직도 입고 있다. 변화하지 않으면 유럽의 수도회들과 같은 전철을 밟을 게 자명한 일”이라고 비판하며, 다시금 방유룡 신부의 삶과 영성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수도생활의 목적은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다. 그런 면에서 방 신부는 자유로움 안에서 하느님과 더불어 ‘즐기며’ 살았다. 행복했다는 말이다. 수도생활로 인해 행복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 길을 따라 살지 않는다. 수도생활 자체가 지금여기에서 ‘지복직관(至福直觀)’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는 전쟁의 폭음 속에서 고요와 침묵을 즐겼으며, 관상을 통해 하느님과 신비적 합일을 즐겼음은 물론 음악과 노래를 즐겼고, 자연과의 합일을 즐겼으며, 영가(靈歌)와 시를 짓는 일을 즐기고, 유머를 즐겼으며, 커피는 마귀처럼 까맣게 먹어야 좋다고 하면서 커피를 즐겼고, 술과 담배, 육식, 스포츠를 즐기고, 성당과 감실, 성광을 제작하고 꾸미는 일, 기계 뜯어보고 맞춰 놓는 일, 묵주 만드는 일, 무엇보다 돈이 안 드는 바둑을 즐겼으며, 또한 휴식 시간에는 자연을 즐기고 특히 나무와 대화하며 전정하는 일을 무척 즐겼다.”

특별히 방유룡 신부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프란치스코 성인을 존경해서 순교복자회 로고에도 새겨넣었다. 데레사 성인은 일상의 작고 평범한 생활 속에서 극기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 거룩함에 이른 성녀다. 이는 순교복자회의 ‘점성(點性)정신’과 통하는 영성이다. 만물은 가장 작은 점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점은 보이지 않지만 점에서 선이 나오고 길이, 넓이, 높이, 깊이 그리고 차원이 생긴다는 것이다. 수도자는 점처럼 작은 일, 작은 순간, 작고 평범한 일상을 승화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방유룡 신부는 먹고 자는 것, 청소하고 빨래하는 등 일상의 아주 작은 일에, 지금여기에 온전히 머무는, 그래서 점 같은 순간을 성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함과 순진무구함은 방유룡 신부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말년에 보여준 방 신부의 미소 안에 담겨 있다.

한편 방유룡 신부는 프란치스코처럼 너그럽고, 단순하고, 천진하고, 겸손하고, 자연친화적이고, 하느님께 헌신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그의 금욕주의는 배우지 않았다. 방 신부는 소박하게 살았지만 가난과 금욕적 태도에서도 해방되어 세상의 주어진 모든 것을 즐기며 살았다. 이 점에서 김춘희 수녀는 “성인도 진화한다”고 표현한다.

▲ 방유룡 신부는 많은 영가를 지어 자신의 사상을 음유시인처럼 표현했다. 

대극일치를 통한 무아의 삶

방유룡 신부의 영성은 한마디로 ‘대극일치를 통한 무아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진지함과 가벼움의 통합, 신실한 믿음과 행복의 추구, 천진함과 깊이의 통합이다. 이는 상징적으로 물과 불의 통합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방 신부는 “자주 불타는 가슴”을 체험했다. 그에게 하느님은 “사랑이 병들었을 때 그 옆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밤새도록 돌보시는..” 분이다. 그래서 방 신부는 “주변을 환하게 비추어 주었고, 따뜻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왔으며, 때로는 거침없이 불길처럼 용맹한 삶을 살았고, 자신 안에 있는 거짓된 사욕을 모두 태워버렸다.” 그러나 그 열정은 “물로 정련된 것”이어서, 겸손하고 겸허한 낮은 데로 나아간다.

“주는 천만사에 모든 것이 되시더니
불도 되시고 물도 되셨네.
물이 되시어 우리를 정화하시고
불이 되어 우리 갈 길 비추셨네.
피땀과 눈물로 우리를 씻어주시고
사랑의 불로 끓고 타게 하셨네.
물이 되시어 물같이 내려만 가시더니”
(방유룡, 영가 중에서)


물은 예수의 하강하는 이미지로 육화(肉化)의 신비를 드러내고, 불은 하느님에게로 상승하는 신화(神化)의 신비를 드러낸다. 자신의 분노의 뿌리인 사욕(邪慾)을 자각하고, 그것을 불로 태우고 물로 정화하고 새롭게 빛을 받아 소생하는 모습이다. 방 신부는 이 불과 물이 절묘하게 하나 되는 신비를 체험했다. 그렇게 살다 1986년 1월 24일 <고별노래>를 지어놓고 ‘청파동 엄마’로 이승을 하직했다.

이제 나는 떠나가네. 죽지 않고 떠나가네.
시공 넘어 은하건너 길이길이 살러가네.
믿음이 죽지 않는다면 하물며 사랑이야
사랑은 사랑으로 가 그립든 그분을 모신다네.
떠나가는 이 길은 점성으로 알아 낸 길
침묵으로 꽃이 피어 관상으로 빛난 꽃길
복음훈시 따라 살면 천만사가 형통인데
하늘엔들 길 만나리. 신지신비(神知神秘) 신속로(神速路)-ㄹ세
이 몸이 아톰 가서 신선되고 이 얼은 면형 가서 무아 되면
면형무아 하나이니 임과 나는 하나라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