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판 신부의 아시아 신학 나머지 이야기(1)

전등사 경내에서, 피터 판 신부와 황경훈씨  

“글보다는 그분 하는 말이 낫더군요. 결국 그분은 종교간 대화에서 포괄주의를 지지하는 듯한데, 다원주의 입장에서는 좀 더 나아가야 한다고 봐요.”

지난 10월 15일에 있었던 피터 판 신부 초청 열린 간담회를 마치고 정양모 신부에게 전화를 드렸더니 한 말이다. 판 신부의 주장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각 종교는 종교창시자의 유일성(uniqueness)과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고 또 종교간 대화에서도 마땅히 이를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간 대화 자리에서조차 이런 주장을 하면서 어떻게 대화의 진전을 바랄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느낌과 생각이 몰려온다. 아무리 신앙고백적이고 개인적인 언어라고는 하지만 대화에 나서는 사람이 이렇게 자기주장을 해서야 과연 얘기가 서로 통할까 싶다. 이렇게 보자면 칼 라너로 대변되는 포괄주의입장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는데도, 왜 교황성 신앙교리성은 그의 책이 구원에 있어 그리스도와 교회의 역할에 “모호성”이 있다고 자체조사에도 만족하지 않고 미국 주교회의에까지 압력을 넣어 조사를 하도록 했을까?

육화를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피조물로 확대해야

열린 토론회의 발표만으로는 판 신부의 생각을 다 알기 어렵지만, 한 참석자의 질문에 “무당이 신들려 하는 행동을 ‘성령’의 작용이라 할 수 있다”는 그의 과감한 대답에서 그 일단을 추적해 볼 수 있겠다. 무교를 종교로조차 여기지 않는 보수 신학이 판을 치는 한국 현실에서, 이 같은 발언은 자신을 포괄주의 범주에 두기는 했지만 “한참 나아간” 생각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또 길희성 교수가 육화에 대해 질문했을 때, 판 신부가 육화를 예수에만 한정할 것인가 창조계 모두로 확대한 것으로 이해할 것인가가 문제라고 답한 데서도 그가 기존 교리를 따르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국에 10일정도 머무는 동안 여러 차례 만난 나는 육화를 비롯해 여러 신학사상과 특히 아시아 신학에 대한 그의 생각을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소원을 빌며 관람객들이 절집 물확에 던져놓은 동전을 보고 있다. 
“나는 육화를 그리스도에게만 한정하기보다는 모든 피조물로 확대해야 한다고 본다. 육화는 하느님의 성령 없이 불가능하고 성령은 온 우주 어디에서나 활동하신다.”

판 신부는 육화신학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육화가 구체적인 문화 속에서 해석돼야 한다면서 해석학적 육화신학을 제기한 인도 신학자 펠릭스 웰프레드(Felix Wilfred) 신부를 훌쩍 넘어선다. 이 점에서 판 신부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라고 고백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다른 종교 창시자도 그럴 수 있음을, 다시 말해서 예수와 어떤 질적 차별성을 두지 않고 있음에 대한 답을 주고 있는 셈이다. 성령은 하나요 그 활동하심도 하나며, 예수가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성령잉태”여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누구보다도 “깊이 깊이 깨닫고 맑게 맑게 드러낸” 분이라는 정양모 신부의 말과 같지 않은가 싶었다. 판 신부의 생각을 이렇게 정리한다면 그의 뜻을 오해한 것이 되는지 어떤지 알 듯 모를 듯하여 좀 더 나가보았다.

가톨릭이 지나치게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해온 것은 아닌지

생태신학자 토마스 베리(Thomas Berry)가 자신의 한 책에서 사용한 “그리스도교 정령신앙”(Christian animism)에 대한 생각을 묻자, “그 말을 꺼내줘서 반갑다”는 표정으로 긍정적으로 본다고 했다. 하긴 무당의 신내림이나 공수를 성령의 활동으로 보는데, 비록 애니미즘이 그리스도교를 포함해 유일신을 믿는 중근동 종교의 최대 적이더라도 그의 눈에는 성령의 활동으로 보일 수 있을 법했다. 그만큼 그의 성령론은 서양신학자들의 그것과 다르게 깊고 대담했다. 이런 급진적인 신학적 사고를 함에도 그가 포괄주의자로 남아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여전히 구세주 하느님으로 선포하는 그리스도교 전통에 서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하느님이라는 신념을 버린지 오래”라는 정양모 신부의 고백은, 따라서 포괄주의자임을 자임하면서도 “멀리 가있는” 그에게조차 도발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아마도 판 신부는 토마스 베리가 같은 책에서 그 동안 가톨릭이 (신학적, 교리적으로) “지나치게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해왔다”고 지적한 사실도 기억한다면 그 또한 그리스도교에 대한 도전이요 도발이라고 여길지 모르겠다.

/황경훈 2008-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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