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황인오]

세계 곳곳의 수많은 민족이 전승해 오고 있는 신화에는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 많다. 그 중에서도 창세신화, 즉 천지창조와 관련된 신화는 예외가 드물 정도로 비슷한 이야기 얼개를 갖고 있다. 구약성서에서 천지창조 이전의 태초에는 모든 것이 혼돈, 카오스였다.

6일 동안에 걸쳐 혼돈 속에서 우주를 창조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태초, 한 처음의 모습은 구약성서의 기원을 이루는 중동지방의 많은 창조신화에도 나올 뿐 아니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많은 민족의 신화에서 태초에는 혼돈이 있었을 뿐이다. 바로 그 혼돈, 무엇이 어떻게 될지 아무런 확실성이 없는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상태에서 우주의 씨앗이 꿈틀대고 생명이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범죄는 왜 생기는가. 미래의 불확실성, 예측이 불가능한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좀더 많은 재화를 보유함으로서 불확실한 미래에 닥칠지도 모를 위험에 대비하려는 본능적인 자기보존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이론도 설득력이 있다. 사회보장제도를 확충하고 민주주의를 확대, 확장하려는 것도 가장 가까운 장래에 대해서라도 예측성을 높이고 따라서 미래의 불안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는 인류의 염원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궁지에 몰린 다국적 자본

2008년 말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세계질서는 더욱 짙은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구소련과 동유럽 공산체제의 붕괴 이후 ‘역사의 종말’을 장담하며 세계를 독점적으로 지배할 유일한 체제로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 자본의 위력이 궁지에 몰리고 있다. 그리스 국가재정의 파산을 목전에 둔 것은 현대자본주의가 겪는 본격적 위기의 서막에 불과하다는 전망도 만만치 않다. 유로화를 공동화폐로 사용하는 EU국가 중 독일과 프랑스에 이어 세 번째 경제규모인 이탈리아는 물론 스페인과 남유럽 일부 국가의 재정위기가 본격화하는 순간 세계경제는 1929년의 대공황에 버금가는 대혼란에 빠질지도 모른다.

1997년 기아자동차와 한보철강에서 시작한 외환위기로 촉발된 우리나라의 만성적 경제 불안 심리도 최근의 세계경제 위기를 앞두고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작년 6.2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으로 상징되는 복지문제가 선거의 주요 쟁점이 된 것도 외환위기 이후 일상화된 불확실성이 더 이상 개발독재의 향수에 기대어서는 출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결과이다.

광우병쇠고기 수입개방 반대로 시작된 촛불문화는 계층간 격차를 확대할 뿐인 신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환상을 깨트리고 국민경제를 독과점하고 있는 재벌지배구조의 한국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열망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전히 이명박정부와 한나라당으로 대변되는 세력은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삽질경제구조에 안주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고 있고 이에 대응하는 야당들 역시 근본적인 변화에는 둔감한 태도가 이른바 '안철수 현상'을 불러 온 것이 아니겠는가.

뉴욕 월가를 향한 대중의 분노.."달러보다 사람이 먼저다"

국가나 자본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혼돈의 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와 영국에서 일어난 이민자들 중심의 격렬한 시위는 이제 미국의 한복판 뉴욕에서 월가를 향한 대중의 분노로 이어지고 있다. 금융권의 부패와 탐욕에 대한 항의로 시작된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의 시위가 장기화 조짐을 보인다고 한다.

10월 1일 브룩클린 다리위에서 시위를 벌이던 군중 700명이 교통방해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더 많은 군중들이 인근 공원에 모여 흩어지지 않고 영화 '식코‘의 감독 마이클 무어와 꾸준히 반전운동을 펼쳐왔던 <델마와 루이스>의 주인공이었던 여배우 수잔 서랜든 등이 참석한 가운데 하루 두 번의 자유총회를 열면서 시위를 이어가고 있고, 이 같은 시위는 미국전역으로 번져갈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 성미산마을극장 나루에서. 박원순 변호사는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면서 경청투어를 벌였다.
시위대는 월스트리트 인근 주코티 공원에 머물며 장기시위에 들어갈 태세를 보이고 있다. 시위 행렬은 "나치 은행가들" "달러보다 사람이 먼저다" 등의 문구가 적힌 펼침막 등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을 벌인다. 부패와 탐욕을 저지르는 '1%'의 반대 개념으로 '우리는 99%'라는 사이트를 만든 시위대는 "더 이상 잠자코 있지 않겠다"며 "우리는 현 정치경제 환경에 반대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 시위에 나선다"고 말했다.

월스트리트 시위를 모델로 다른 도시에서도 '00를 점령하라'는 형태로 자발적인 시위 인파가 형성돼 보스턴, 워싱턴,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샌디에이고 등 다른 대도시에서도 시위가 벌어지거나 계획되고 있다고 한다. 보스턴에서는 미국 최대 은행인 뱅크오브아메리카(BoA) 건물 밖에서 3000여명이 모여 금융권의 정경유착과 탐욕을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를 열었고, 이 과정에서 수십 명이 무단침입 혐의로 체포됐다. 80:20을 넘어서 세계의 99%를 지배하는 1%의 탐욕스러운 부자들, 거대자본의 횡포에 저항하는 군중 시위에는 젊은이들만이 아니라 중년층까지 가세하며 시위의 주제도 지구온난화, 유전자변형식품반대 등 다양한 주제로 넓혀가고 있다.

안철수, 박원순 현상도 변화를 꿈꾸는 이들의 열망

2008년 청계광장에서 시작된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시위에서 나타났던 양상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며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시위로 촉발되었던 68‘혁명을 연상케하는 움직임이 거대한 용암처럼 들끓고 있는 것이다.

시민운동가 박원순이 민주진보진영의 서울시장 단일후보로 선출된 것도 촛불 이후 근본적인 변화를 꿈꾸는 이들의 열망을 반영한 것이다. 이변이 없다면 내년도 두 차례의 선거에서도 이 같은 흐름이 계속될 것으로 보는데 이견은 별로 없을 것이다.

바야흐로 세계의 정치경제 체제 전반에 걸친 질서재편을 촉진하는 대혼돈이 휩쓸고 있는 것이다. 태초의 혼돈이 우주를 탄생시키고 수많은 민족들을 번성케하여 오늘의 문명을 이룬 것처럼 오늘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혼돈은 서구자본중심의 세계체제의 일대변혁을 꾀하고 있다. 우리는 이 변혁의 에너지를 어떻게 올바로 이어 나아갈 것인가.

황인오 (부천시민사회단체협의회 공동대표/ i-fir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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