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 영도 타워크레인이 희망의 상징 되도록 같아져야"

가을이다. 바람이 불고 하늘은 파랗다. 산의 색이 변하고 있다. 그 자체가 아름다운 계절이다. 그러나 그 일상의 단순한 행복도 사치처럼 여기게 하는 이 사회가 점점 두렵고 무서워진다.

올여름, 한국사회의 근본적 문제를 드러나게 해준 두 가지 상징적인 사건은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의 타워크레인에서 고공 농성을 하는 김진숙 씨와 제주 강정마을을 지키는 사람들의 고향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저항이었다.

이 두 사건에서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 노동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자본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에 대한 깊은 회의와 절망감이다. 또 하나는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존재하는 국가라고 하는 권력이 우리에게 과연 무엇이며 그들의 무력 앞에 당하는 고통은 언제까지 계속되는 것인가에 답답함과 무력감이다.

한국사회에서 밑바닥을 살아가는 노동자의 삶이 어디에 있는지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냉혈을 먹고 사는 자본, 민주주의가 사라진 국가권력과 그것에 포로가 된 사람들, 그리고 그 대척점에서 싸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 국가 권력의 폭력성과 자본의 횡포에서 벗어나고 그리고 그들에 의해 상처받고 좌절한 사람들을 일으키고 위로할 곳 역시 침묵과 힘없는 꿈틀거림만 있을 뿐이다.

시간이 꽤 흘러도 이 두 사건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추운 겨울, 지상에서 35m 떨어진 타워크레인에 오른 해고노동자는 자신과 똑같이 해고당하는 노동자들이 생겨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8개월이 넘게 고공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리고 타워크레인 중간에는 네 명의 노동자가 농성을 한 지 3개월이 다가오고 그중 한 노동자는 건강이 안 좋은 상태에서 단식 한 달이 넘어가고 있다.

▲ 2011년 7월 30일 3차 '희망의 버스'에 오른 천주교인들. 경찰이 봉쇄했으나 타워크레인 앞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고공을 향해 올라야 하고, 굶어야 하며, 더위와 추위에 노출되어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도 잔인한 시간이다. 그러나 해결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마지막에 ‘희망’이 있을 거라고 믿고 행동한다.

그리고 기적처럼 전국각지에서 그들과 같은 마음의 사람들이 85호 타워크레인을 향해 수없이 몰려들었다. 희망비행기, 희망버스, 희망 자전거, 도보를 해서라도 사람들은 그 ‘희망’을 버리지 않기 위해 고공에 외롭게 서 있는 해고노동자를 구해야 한다는 연대의 마음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제주 강정마을에서는 4년 반이 넘도록 주민과 평화 운동가들이 해군기지를 막아내고 구럼비를 지키려 했지만 공권력에 의해 마을은 초토화되었다. 구럼비는 파헤쳐졌고 중덕해안은 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 힘없는 주민들은 죄인처럼 끌려가고 평화 운동가들은 감옥에 갇힌다. 평화를 위한 기도소는 경찰에 의해 파괴되고 미사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강정에 모인 사제들이 끌려가고 길거리에 가두는 일이 빈번히 발생했다.

각 교구의 주교들이 강정을 내려오고 그분들의 연대와 지지가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지언정 현실을 바꾸는 데는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 시대의 고통 받는 사람들의 상징이 되어버린 해고 노동자 김진숙과 국가권력에 의해 파괴되는 강정은 부산과 제주라는 공간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도 한국사회라고 하는 같은 공간 내에서 소금꽃 김진숙과 같은 사람들, 국가권력의 반칙과 왜곡으로 파괴된 강정 같은 공동체는 한두 군데가 아니다. 다만 끝까지 저항하지 못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수없이 절망했던 사람들은 그래서 타워크레인 85호에서, 제주 강정에서 그 희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많이 변했다. 그동안 국가권력과 자본의 가치와 힘이 세상을 지배하고 사람들을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로 유혹하고 무장시킬 때 오랫동안 교회는 침묵하고 있었다. 자본, 권력중심의 세속의 가치와 교회가 추구하는 가치가 대립할 때 분명하게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았고 오히려 별반 다르지 않은 교회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나갔다.

다시 희망과 절망을 생각한다. 절망과 희망은 서로 다른 모습이지만 같기도 하다. 절망하지 않으면 희망을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아직 우리는 처절하게 절망하지 않았다. 그래서 감히 ‘희망’을 말하기가 두려운 이유이다. 희망은 살아도 죽어도 같아질 때만 얻을 수 있다. 강정, 영도의 타워크레인이 희망의 상징이 될 수 있도록 우리는 같아져야 한다. 그것이 희망이다.

한상욱/ 프란치스코, 인천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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