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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평신도였다[생활하는 신학-유정원]

최근 평신도론에 관한 글들을 읽고 도반들과 함께 의견들을 나누면서 우리의 평신도에 대한 정체성을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에서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리스도 신앙의 뿌리인 예수 그리스도한테서 찾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내가 아는 한 예수만큼 평신도의 모범을 산 신앙인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수는 가난한 평신도였다

예수는 태어날 때부터 가난하였다. 복음서를 보면 아기 예수는 마구간에서 태어났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 역시 가난한 서민으로 보인다.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다소 떨어진 나자렛이라는 촌에서 자랐고, 공생활을 할 때는 갈릴리 호수 근처에서 농사를 짓거나 고기를 잡는 가난한 이들과 만나고 가르치고 어울렸다. 그래서 그에게 가난한 이들은 친밀한 이웃이었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에 속한 하느님 아빠의 선량한 자녀였다.

나는 이런 예수의 정체성에 기초해서 오늘날 교회(제도교회든, 신자들로서의 교회든)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한국 가톨릭교회는 이미 가난과는 거리가 멀다(교계통계). 미사나 교회 행사에 참석하는 이들은 이미 사회의 중상층에 속한 이들이고, 가난한 이들은 교회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거나 냉담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피곤한 현실생활에 놓여 있다. 현재 우리 교회에는 예수 같은 평신도가 별로 없을지도 모른다. 

예수는 잘못된 권위주의에 맞선 평신도였다

   
▲ La Dormition 15cm(부분).
예수는 공생활 동안 끊임없이 기존 종교체제의 잘못된 관행과 권위주의에 맞선다. 율법주의에 갇혀 진실로 구원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을 외면하고 단죄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날선 비판을 가한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가차 없고 냉혹한 분이 아니라, 차별 없이 모두를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알려준다. 아니 오히려 가장 초라하고 죄 많은 이들에게 연민과 용서의 팔을 벌리시는 분이라고, 자신이 스스로 보여주고 체험하게 해준다.

오늘을 살고 있는 평신도들은 이러한 예수의 처신과 실천에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구체적인 자리에서 예수가 보여준 따뜻하고 작은 사랑을 실천하려고 매일매일 노력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사제나 수도자의 언행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무조건 따르려하기보다, 한 사람의 동등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의 삶을 바라보고 연구하고, 거기서 우리 삶의 방향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는 타자를 포용한 평신도였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는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당시 자기 민족인 유대인들이 천시하고 미워한 이방인들과 스스럼없이 만난다. 특히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구절은 무척 인상적이다(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이는 실제로 예수가 이방인들과 거리감이나 차별 없이 지냈다는 뚜렷한 증거일 것이다. 예수는 한발 더 나아가 이방인들이야말로 유대인보다 더 참된 신앙인이라고까지 선언하기도 한다.

나는 이런 예수 모습에서 타자에게 어떤 태도를 가지고 만나야 하는지 배운다. 오늘날 우리에게 타자란 우선 타종교인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 북한에서 온 탈북자, 외국인 노동자와 같은 타민족도 해당될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을 넘어선 동식물, 지구, 우주만물 자체도 그 동안 인간이 이기적 삶을 위해 착취해 온 타자들이다.

예수는 유대인으로 살고 죽었으나, 그가 섬긴 하느님과 이웃은 유대인이라는 민족과 종교의 범위를 넘어선 포용성과 보편성을 띤다. 오늘 한국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평신도도 그리스도인 평신도로 살고 죽겠지만, 우리가 섬길 하느님과 이웃은 그리스도인을 넘어선 타종교인, 타국가와 타민족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이들, 창조주 하느님이 끊임없이 창조하게 계신 모든 자연과 우주가 아닐까 한다.

원/ 가톨릭여성신학회. 신학박사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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