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박정호 스테파노, 김규희 베로니카 평신도선교사

골롬반외방선교회는 한국교회 안에서 국외로 평신도선교사를 파견하고 있는 유일한 선교단체다. 골롬반에서 파견한 선교사들은 대부분 30-40대의 독신이 주류였는데, 최근 칠레 산티아고 대교구에서 3년 동안의 선교활동을 마치고 귀국한 부부평신도가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박정호(스테파노, 35세)와 김규희(베로니카, 32세)가 그들이다. 이들 부부선교사는 앞으로 결혼성소에 기반을 둔 평신도선교사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유난히 ‘독신’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가톨릭교회의 관행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시사적이다.

해군장교와 교리교사, 하느님 찾아 새로운 땅으로

 

▲ 박정호 스테파노.

대구가 고향인 박정호 씨는 경남 진해에서 해군장교로 근무하면서 진해 중앙성당에서 김규희 씨를 만나 결혼하고, 골롬반외방선교회를 통해 칠레에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박정호 씨는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잠수함 전투정보관으로 2000년에 임관되었으나, 줄곧 성소로 고민하다가 성당에서 청년활동을 하면서 김규희 씨를 만났다. 박정호 씨는 본당 청년미사에서 기타반주도 하고, 청년회장도 지냈으며, 청년분과장까지 맡을 정도로 신심이 대단했다. 모태신앙이었던 김규희 씨는 대학 졸업을 전후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면서, 신실한 신자였지만, 교리 중심의 머리로만 하는 신앙생활에 가슴이 공허해지는 걸 느끼던 차에 박정호 씨를 만났다.

 

▲ 김규희 베로니카.

김규희 씨는 학업을 마치고 샘바위 공부방에서 2년 동안 실무자로 일하면서 새길찾기에 나서고 있었는데, 박정호 씨를 만나면서, 의기투합해 결혼성소를 지니면서 투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이들에게 새길을 열어준 것은 인터넷 검색으로 발견한 골롬반외방선교회 평신도선교사 교육과정이었다. 당시 골롬반을 빼고는 평신도선교사를 찾는 곳이 개신교회 선교단체뿐이었다.

이들이 골롬반 평신도선교사 관심자 모임에 나가면서 “국외에 선교사로 나가는 것은 다른 문화를 접하는 것인데, 결혼도 새로운 문화를 만나는 것이니 결혼 전에 바로 선교사로 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답변을 듣고, 결혼생활에 들어섰다. 그 후 박정호 씨가 해군에서 전역한 것은 2005년이었다.

“저는 어떻게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는지 고민해 왔습니다. 사관학교 졸업 전 4학년 때 원양 나가서 개신교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성경 열심히 보면서 기복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내 눈으로 직접 하느님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교리적인 하느님 말고요. 그 방법을 찾다가 골롬반에 오게 되었죠. 그게 결혼하고 평신도로 활동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어요. 평신도선교사 관심자 모임에 나가면서, 안정된 직장이었지만 해군에서도 전역하고, 사회경험을 하고 싶어서 고속도로에서 CCTV와 전광판 수리하는 일을 한 일 년 정도 했습니다. 거기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다른 동료로부터 ‘해군에서 사고치고 나왔느냐’는 오해도 받았지만, 배운 게 많습니다. 사람들은 무뚝뚝한 내 성격 때문에 ‘장교 기질 못 버렸다’고 핀잔을 주기도 했습니다.”

박정호 씨의 신앙적 갈증은 대단했다. “텔레비전에서는 대구에서도 서울에 있는 사물을 볼 수 있지만, 텔레비전을 통해서는 그 뒷모습은 볼 수 없다”면서, “교회에서 교리교육을 통해 배운 하느님은 텔레비전을 통해 보는 것처럼 그분을 만질 수도 냄새 맡을 수도 없다”고 말한다. 박정호 씨는 하느님을 직접 만져보고 느껴보고 싶었는데, 그 방법은 전적으로 투신하는 방법밖에 없었다고 전한다. 한편 김규희 씨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처음엔 각자 살았지만, 서로 호감을 갖게 되면서 사귀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이 사람이 인터넷검색으로 골롬반평신도선교사회를 찾아내고, 한번 가 보자 해서 왔는데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저도 교리교사를 오래 했지만 골롬반에서는 가슴이 탁 트인 느낌이었죠. 저는 그동안 교리교사도 하고 대학에서 아동가정학을 전공했지만 늘 신앙문제는 채우지 못했는데, 여기서는 따뜻하게 채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정작 결혼하고 남편이 안정된 직장인 해군에서 나올 때는 좀 불안했지만, 그게 우리 길이었죠.”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김규희 씨에게 새로운 시각으로 문을 열어준 사람은 당시 중앙성당 보좌였던 최경식 야고보 신부였다. 그녀는 이어 “부모님께서 씨앗을 심어주었다면 신부님과 남편은 그 길을 자유롭게 열어주었다”고 말한다.

 

먼저 자기 내면을 치료하는 선교사 양성과정

 

▲ 골롬반 평신도선교사의 집에 걸려있는 액자. 사랑 愛.

그러나 골롬반 평신도선교사로 양성되는 과정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신학교육과 사목실습, 언어습득이 문제였다. 9개월 동안 진행되는 양성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것 중에 하나가 CPE(임상사목교육)이다. 박정호 씨는 수원 빈센트병원에서 숙식하며 8주간 동안 머물렀다. 여기서 상담가로 활동하는데, 환자 및 유가족들과 만나고, 세미나도 한다. 이 과정에서 심리적으로 내면을 들여다 보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서로 피드백을 주는 데 지장이 없도록 부부는 따로 교육 받는다. 그 후 박정호 씨는 가정폭력 피해여성들의 쉼터인 ‘화해의 집’에서, 김규희 씨는 에이즈 환자들을 돌보는 곳에서 사목실습을 이어갔다.

이런 양성과정은 사목실습지에서 선교사로 훈련을 받으면서 특별히 선교사 자신의 내면을 치유하는 효과가 있어서 인상적이라고 소개한다. 실습과정 중에 발생하는 마음의 흐름을 읽어내고, 자신들의 상처를 통한 성찰로 치유하는 과정을 밟는다. 돈암동 평신도선교사의 집에서 공동체 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실패와 상처를 통해서도 배우는 작업을 지속한다. 공동체에서는 일부러 양성자들 사이에 싸움을 붙이기도 하고, 성격이 다른 이들을 한꺼번에 당번을 시켜 갈등해결 방법을 배우게 만든다.

박정호 씨와 김규희 씨는 결혼하고 나서 한 번도 다툰 적이 없었는데, 골롬반에서 공동체로 살면서 오히려 다툼이 잦았다. 그 다툼을 공동체 안에서 나눔을 통해 해결해 가면서 성숙해진다. 그래서 김규희 씨는 교육을 마칠 때에 나눔하면서 했던 말을 기억한다. “외국에 나가지 못해도 이 정도만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교육기간에 내가 많이 변한 것 같다. 돈은 못 벌지만 그래도 다른 배운 게 많아서 좋다”고 전했다.

 

 

▲ 부부 선교사가 살던 동네. ⓒ박정호

 

독신사회에서 부부선교사는 외로워….

급기야 2007년에는 양성과정을 마치고 칠레로 파견되었다. 진해를 떠난 적이 없었던 김규희 씨는 서울에서 보낸 9개월도 문화충격이었다. 이를 두고 “공동체에서 서울말만 듣다가 시장에서 경상도말을 들으면 반가왔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서울생활에서 겪은 문화충격이 칠레에서 겪은 문화충격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칠레에서의 생활은 처음에는 신기하고 놀랍기만 했다. 부부는 모두 잘 먹는 편이었다. 그런데 선교지에서 첫해에 아기를 임신하게 되면서 향수병을 비롯해 어려움이 닥쳐왔다. 특히 김규희 씨는 배가 불러오자 걱정이 쌓여갔다. 물론 골롬반외방선교회에서는 출산휴가 규정이 있었지만, 제때에 일을 하러 나갈 수 없게 되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신들이 하는 일이 표 나는 일도 아니었지만, 시간이 그냥 흘러가는 것 같았죠. 다른 동료 선교사들은 나름대로 뭘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누워 있으니 이게 뭐하는 건가? 힘들었어요. 우울증 등 호르몬 영향도 있었겠지만 너무 힘들었어요. 엄마가 된다는 것이 기쁘기도 했지만, 내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걱정도 많았고요.”

그런 가운데 성찰의 기회가 주어졌다. 우리가 자랄 대 곁에 엄마만 있었던 게 아니라, 아빠도, 이웃도, 성당 식구들도 있었던 것을 기억했다. “어려서 상처받을 때도 있었지만,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만으로도 감사한 삶으로 느껴진다. 나를 이끄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격려해 준 분도 많았다.” 또한 “내가 내 안에 힘이 있어서 여기까지 걸어온 것이다. 우리 아기도 그런 힘이 없으란 법이 없다. 내가 너무 걱정했던 것이다.”

 

▲ 마티아성당 본당피정. ⓒ박정호

 


김규희 씨는 자신이 해 준 것이 없어도 아기가 쑥쑥 잘 자라주었다고 전한다. 이 부부선교사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3살 먹은 ‘박시우 마티아’다. 시우(翅優)는 날개 펼 ‘시’에 넉넉할 ‘우’자를 썼다. 한 달 동안 옥편을 뒤져 찾아낸 이름이다. 시편에 나오는 하느님 날개 아래 편히 쉬라고, 넉넉히 품고 살라는 뜻으로 지었다. 그리고 세례명 마티아는 이들이 선교하던 성당 이름이다. 마티아성당.

그러나 출산에는 고생이 많았다. 때마침 연말 휴가철이라 도움 받을 사람도 없이 병실에서 부부가 외롭게 버티어냈다. 칠레에서 일하던 한국 신부들과 선교사들이 제법 있었는데, 간간이 함께 모여 밥도 먹고 술도 마셨다. 그런데 이 부부가 아기를 낳고 나서는 으레 아기 때문에 참석하기 어려울 줄 알고 연락조차 없고는 해서 서운했다. 이런 시간이 길어지자, 박정호 씨 부부는 이방인처럼 느껴지곤 했다.

“사제들과 선교사들이 대부분 독신이잖아요. 그래서 결혼한 내 자신이 좀 이상한 것처럼 느껴졌어요. 독신들 사회에서 왕따 당하는 느낌이었죠. 그런데 희망은 다른 곳에서 왔지요, 칠레 사람들은 아기와 여자들에게는 충분히 호감을 느끼고는 하는데, 이방인처럼 거리를 두던 나를 아기아바가 되면서 주변 사람들이 친근하게 다가온 거죠. 처음에 부부만 살 때는 말도 잘 붙이지 않고 집을 들여다보는 이도 없었는데, 그 후론 아기를 본다고 마을사람들이 집에 찾아오곤 했죠. 동네 애들도 찾아오고.”

결국 이들 부부에게 아기의 출산은 선교의 지평을 새롭게 여는 계기가 되었다. 걸림돌이라 여기던 것이 은총으로 작용했다. 이제 선교사 개인이 선교사로 성장하는 게 아니라 가족선교사가 된 것이다. 이들은 동네에서 주민으로 받아들여지고, 칠레 사람들은 이들 선교사의 자식인 시우를 ‘칠레에서 낳았으니 칠레 사람’으로 보았다. 돌이켜 보면, 칠레에서 산모의 임신을 축하하고 출산용품을 미리 마련하기 위해 친정엄마가 열어주는 ‘베이비샤워’라는 깜짝 파티도 동네 아주머니가 열어 주었다. 이를 두고 김규희 씨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가 생기면서 그들 속으로 더 쉽게 들어갈 수 있었어요. 개인적으로는 하느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기회가 생긴 거죠. 아기를 안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아무 생각 없이 갑자기 눈물이 나더라고요. 나도 하느님 앞에 이렇게 사랑받는 존재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지요. 예전에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았는데 아버지도 이랬겠구나 생각했죠. 아기를 낳고 나니 하느님과 아버지에 대해서 철이 드는 것 같아요.”

그들은 부부(가족)선교란 독신선교사와 선교형태가 다를 뿐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 봉헌하는 선교사 부부. ⓒ박정호


칠레에서 다양하게 하느님 섬기는 모습을 보다

 

칠레에서 부부는 주로 청소년 사목에 종사했다. 칠레는 시간 개념이 분명하지 않아서 일이 잘 진행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져 답답한 순간이 많았다. 게다가 언어도 자유롭지 않아서 무력감을 느끼기도 했다. 본당(공소)에서 행사를 준비할 때에도 웃고 떠드는 가운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그들이 웃고 떠드는 가운데 친교가 이루어지고, 선교란 그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함께 있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청소년 교리는 견진반 중심으로 움직였는데, 칠레에선 한국교회처럼 유치부부터 고등부까지 교리반이 운영되는 게 아니라, 첫영성체반 3년, 견진반 2년 반 정도가 전부다. 그리고 교리가 끝나면 대개 아이들은 성당에 나오지 않는다. 교리반이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여겨지는 곳이다. 지역 사람들은 70% 이상이 가톨릭신자라고는 하지만, 주일미사 참석률은 별로 없다. 일부 교리교사들과 스무 명 남짓의 젊은이들, 그리고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칠레에서는 성체신심보다 사제의 축복과 성모신심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중에서도 성지주일이 가장 인기가 많은데, 한국의 복조리처럼 시장에서는 성지가지 장식을 내다 팔고, 본당에서도 성지가지를 밤새 만들어 수입을 마련한다. 주민은 이 성지가지를 걸어두고나 선반에 얹어둔다. 이날은 모든 사람들이 성당에 나와서 축제를 즐기고, 정작 부활절에는 휴일이라 성당에 잘 안 나온다.

김규희 씨는 칠레에서의 선교체험이 “다양하게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모습을 배울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한국교회와 달리 칠레교회는 미사를 손뼉 치며 축제처럼 봉헌한다. 평화의 인사는 끌어안고 키스하며 충분한 시간을 두고 즐긴다. 미사에 참석한 모든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돌아가며 축복한다.

 

▲ 피정에서. 박정호 선교사.ⓒ박정호

 

 

▲ 피정에서. 김규희 선교사. ⓒ박정호

 

나를 선교하는 선교여행

칠레에서 이들 부부선교사가 경험한 것은 ‘일’보다 ‘존재함’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언어도 잘 안 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며, 특별난 일을 하기보다 가난한 이들속에 머물며 연대하고 지켜주는 게 중요하다. 선교사들은 주민에게 묻지 않으면 버스 타고 시내에 나가는 일조차 할 수 없다. 그들이 오히려 선교사들을 돌봐주고 보듬어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럼 점에서 이들 부부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선교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교를 받고 온 것 같다”고 말한다.

 

▲ 칠레에서. 박정호 선교사. ⓒ박정호

마지막으로 박정호 씨는 한국에서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열망과 투신을 바라는 이들에게 이렇게 조언하고 있다.

“평신도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인생에서 좋은 계기기 될 수 있습니다. 양성을 받으면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고, 평신도로서 한 번쯤 투신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평생을 투신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좋지만 한 번쯤 경험해보는 것만으로도 신앙이 성장하고 스스로 하느님 만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결국 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선교하는 의미도 있겠지만, 먼저 자신한테 선교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김규희 씨는 “골롬반 평신도선교사가 되면서, 개인적으로는 하느님의 다른 모습을 보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평소에 보던 하느님의 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하느님은 워낙 크고 넓은 분이라 모두 알 수 없지만, 조금씩 맛 들일 수 있어서 좋았다”고 감회를 밝혔다.

박정호, 김규희 부부선교사는 당분간 대구와 진해를 오가며 편안히 쉴 생각이다. 그리고 지난 3년 동안 칠레의 선교생활을 마치고, 다시 다음 3년을 더 연장하기 위해 골롬반외방선교회에 신청해 놓은 상태다. 이들은 선교사로 살면서 모아놓은 재산도 없고, 덜렁 식구만 늘어났지만 여전히 유쾌하고 걱정이 없다. 예수께서 이미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마태 6,25-34)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