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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머리모양이 왜 그래요?[파블로의 필름창고] 요시노 이발관, 오기가미 나오코, 2004년 작

마을의 풍경은 여느 시골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모든 것은 평온하고 사람들은 매우 여유있고 차분하면서도 활기차다. 단 이 마을의 심상치 않은 풍경은 한결같은 아이들의 바가지머리인데, 그 아이들이 밭에 모여 <할렐루야>를 부르는 풍경 또한 범상치 않다. 요시노가리라는 이 동네 아이들의 헤어스타일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요시노 이발관의 이발사 아주머니의 작품이며, 이 마을의 전통, 정체성이며 나름대로 자랑이다. 이 마을에서 요시노 아주머니는 아이들의 규율도 관장해 방송을 통해 아이들의 바른 생활을 독려한다. 물론 아이들은 자신들의 아지트에서 어른들이 보는 책을 몰래몰래 보는 작은 일탈을 하기도 하지만.

   
▲ 한결같은 저 머리모양에 몰래 이상한 책을 보는 아이들. 어쩌면 우리 자랄 때와 하는 짓이 저리도 비슷한지. 저들에게 자신을 비출 타자가 등장한다.

아이들은 자신의 머리에 큰 불만 없이 아이들답게 잘지낸다. 균질된 사회에서 자신을 비추어볼 타자가 없기에 당연히 불만이 있을 리 없는데, 이 마을에 그런 타자가 등장한다. 바로 동경에서 온 전학생이다. 그 자유로운 머리모양이 여자아이들에게는 선풍적 인기를 끈다. 남자아이들은 처음엔 시쿤둥했지만 이 아이를 친구로 받아들이고 자신들도 멋있고 개성있는 머리모양을 갖고 싶어한다.

자유의 관점에서 이 아이는 메신저이지만, 어른들이 보기엔 참으로 어데서 굴러들어온 불순한 존재다. 마치 전향공작처럼 집요한 요시노가리 동화정책이 먹혀들지 않자 순박한 아이들을 오염시키는 주범으로 지목된다. 어른들에게는 ‘이지메’를 당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그 녀석을 보호하려 한다. 그럼에도 요시노 아주머니의 집요함은 이 녀석을 요시노가리로 만들어버리는데, 아이들 여기서 물러설 것인가?

   
▲ 요시노 아주머니의 집요함이 저 녀석도 요시노가리로 만들어버리지만. 요시노가리의 전통은 심각한 도전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일반적으로 두발에 대한 규제는 규율이나 통제와 깊게 관련되어 있다. 군인들과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두발규제가 대표적 사례겠다. 예전에 형들이 중학교에 올라가면 교복을 입고 머리를 아주 짧게 깎는 모습을 보곤 했다. 시커먼 교복을 입는 것은 그러려니 했지만 거의 빡빡 깎은 머리모양은 보기만 해도 심난했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되겠지. 1980년 초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농구경기를 보는데, 아나운서가 대통령이 두발과 교복의 자율화를 발표했다는 내용을 이야기한다. 곳곳에서 환호소리가 들렸던 기억이 난다. 어쨌거나 전두환이 발표한 그런 자율화가 있어 교복도 차츰 사라지고 머리모양도 그전보다는 좀 다양해졌다.

언제부터인가 교복이 부활하고 두발규제도 어느 정도 선에서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나는 상당히 자유로운 분위기의 학교를 다녀 교복도 없이 머리도 너무 길다 싶을 때만 내가 알아서 깎았다.(얼마 전 폭발적인 베스트셀러를 쓴 외국대학의 모 교수, 언행이 쇼킹하기 그지없던 모 장관이 나오기도 했던 그 모교는 지금도 대한민국에서 몇 안 되는 교복없는 학교다.) 그때 참으로 독특한 교련 선생님 한 분이 계셨다. 보통 군사교육을 담당하는 교련교사는 학생규제의 선두에 서는데, 그 양반은 교복과 두발규제를 부정적으로 보셨다. 한참 자라나는 너희들이 머리도 자유롭게 기르고 옷도 자유롭게 입어야 사고가 그만큼 자유롭고 유연해진다고 말씀하셨다. 군대나 중고등학교 같이 제한된 기간과 공간의 두발규제와 아울러 전 사회의 두발을 규제하려 했던 박정희 시대를 생각해보면 두발의 통제를 통해 자유보다 질서를 강조했다는 점을 엿보게 된다. 요시노가리는 아직은 스스로 자유롭게 생활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아이들을 보호하는 하나의 장치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 요시노 이발관, 오기가미 나오코, 2004년.
한 머리모양은 전통을 담보하는 표징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뎅구(天狗)’라는 일본의 전통적인 악귀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똑같은 머리모양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요시노가리의 시작이다. 전통에 대해서는 많은 시각차이가 있어 철저히 긍정되기도 하고, 부정되기도 한다. 그것은 졸졸 흐르는 물과 같아 일정한 연속성을 갖고 흘러온 것이다. 전통이 단절된 사회는 자신들의 것을 지키기 위해 그것을 박제화하려 한다. 특히 급속한 근대화로 사회적 격변을 경험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몇몇 국가에서 ‘인간문화재’를 지정하는 것이 그러하다. 이는 실질적인 의미의 전통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게 마련이다.

그런 측면에서 요시노가리는 이 마을에 면면히 흘러온 전통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아이들의 대화 속에서 이 전통을 비집는 발언이 나온다. 산신에게 제를 올리는 산의 날에 웬 <할렐루야>를 부르냐며. 전통 속에 이질적 요소가 습합될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전통은 가끔 발명되기도 한다. 16세기에 ‘맥주순수령’이 내려질 정도로 독일 하면 맥주를 떠올리지만, 사실 맥주의 원조는 체코이며 수많은 쪼개진 나라를 통일한 뒤에 맥주가 독일의 상징처럼 부상되었다고 한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천민 취급받던 팜파스의 목동 가우초가 어느 순간 국가이미지를 낭만화하는 민속영웅으로 부상하기도 했다. 찾아보면 그런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는 전통의 조작 가능성을 이야기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전통이 또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

동아시아의 역사상 구한말의 단발령이나 중국 청초의 변발령은 새로운 지배층이 기존의 전통을 차단하고 새로운 질서를 성립하려 했던 예다. 을미개혁 당시 단발령이 내려지자 곳곳의 유생들은 심하게 반발했고, “머리카락을 자르려면 차라리 내 목을 잘라라”할 정도였다. 중국에서 청은 자신들의 헤어스타일을 한족에게 강요했으니 그게 변발령인데, 변발령을 내리자 명나라 시인이 이런 시를 썼다고 한다. “하늘에 해와 달이 없구나.” 해(日)와 달(月)을 합치면 명(明)이 되기 때문에 명나라가 없다는 뜻으로, 그 시인은 바로 참수를 당했다고 한다. 이처럼 머리모양은 시공을 뛰어넘어 통제와 전통의 함의를 듬뿍 담고 있다.

영화 속에서 요시노가리는 요시노 아주머니의 가업과도 연관된다. 할아버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요시노 이발관 거기서 지속되었던 요시노가리는 일본사람들의 가업전통의 한 단면을 연상한다. 일본사회를 인류심리학적으로 접근한 프란시스 슈의 <이에모토(家元)>를 보면 일본의 자본주의 발전, 경제기적이 이에모토[기예(技藝)의 세계에서, 한 유파의 정통(正統)을 잇는 집. 또는 그 주인. 종가(宗家)]라는 특유의 전통사회에서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집안을 잇는 데 혈통이 절대적이 아니라 자식이 만약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지 않는다면 양자라도 들여 가업을 잇게 한다. 거기서 우리가 속어로 많이 쓰는 ‘오야붕(父分)’, ‘꼬붕(子分)도 나온다. 확실히 일본에서 가업의 전통은 놀랍다. 그러니 예전에 화투장을 만들던 닌텐도가 세계적인 게임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겠다.

   
▲ 아주 오랜 전통을 가진 요시노 이발관은 이 마을의 정체성을 담보하는 거점역할을 했다.

요시노 아주머니는 이처럼 가업을 이으면서 요시노가리의 전통이 아이들을 지켜준다 믿었고, 그것이 마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하나의 풍경이라 생각해 이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다. 그녀에게 요시노가리는 지켜야 할 중요한 가치였기에 그것을 충실히 지키려 했다. “오랜 시간을 통해 발전되어온 연속성과 안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전통적인 제도와 관습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브리태니커 백과사전)를 지녔다는 점에서 요시노 아주머니는 진정한 의미의 보수주의자다.

아이들은 머리모양을 바꾸기 위해 저금통도 다 털어 이웃마을에 가서 머리를 깎으려 하지만 턱도 없다. 딱 머리모양만 봐도 옆동네 아이들이라는 게 티가 나 놀림만 받고 돌아온다. 급기야 아이들은 가출을 하고 대대적인 반란을 준비한다. 그들의 반란은 전통의 한복판인 마을축제의 장에서 일어난다. 아이들은 축제가 한창일 때 마을사람들이 깜짝 놀랄 머리모양으로 나타나 자신들이 자유로운 머리모양을 가질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아이들은 아주 가혹한 대가를 치루지만 드디어 두발의 자유를 얻는다. 아이들의 머리모양만 달라졌지 모든 것은 그대로다. 머리카락 별로 안 남아 있지만 요시노 이발관을 열심히 찾는 한 할아버지는 요시노 아주머니를 위로하며 이런 말을 한다. “그게 시대의 흐름인걸. 이 세상은 변해가니까. 그렇게 전통은 전설이 되어버리는 거지.”

아름다운 전통도 자연스럽게 흘러가지 않고 시대에 맞지 않게 고집스럽게 지키려 한다면 사람들의 발목을 잡게 된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는 새로운 시대에 발 맞추어가야 하지 않냐는 인상을 주지만, 그러면서도 전통을 소홀하게 다루지 않는 느낌도 그에 못지않게 깊게 전해준다. 이런 문제는 언젠가는 참 어려운 접점에 놓이게 된다. 고집스런 전통 고수가 새로운 가능성을 봉쇄할 수도 있고, 함부로 시대에 처진다고 폐기하면 자칫 ‘아이를 목욕시키고 목욕물만 버려야 하는데, 아이까지 버리는’ 처사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부모와 자식 사이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이 다른 사회보다도 훨씬 적어진 우리의 모습을 보자니 요시노가리 같은 것이 그나마 공감의 가능성을 열어줄 여지가 있지 않나 싶기도 하고. 스토리도 간단하고 재미있어 그냥 넋놓고 보아도 상관없지만, 보다 보니까 이런저런 여러 가지를 떠올리는 복잡한 영화라는 생각도 들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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