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 삶과 거룩함, 토마스 머튼, 생활성서, 2003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죄를 거부하고 자신을 아무런 타협 없이 그리스도께 봉헌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소명을 완수하고, 자신의 영혼을 구하며, 하느님의 신비 안에 들어가 자신을 완전히 ‘그리스도의 빛 안에 잠기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 

▲ 토마스 머튼, <삶과 거룩함>, 생활성서
토마스 머튼은 결국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성인됨’에 있다”는 도로시 데이와 뜻을 같이 한다. 그래서 헨리 나웬은 토마스 머튼의 <삶과 거룩함>(Life and Holiness, 생활성서, 2003)을 두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적격인 책이라고 소개했다. 머튼이 “신앙은 그리스도가 아닌 모든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모든 삶, 모든 진리, 모든 희망, 모든 실재를 그리스도 안에서 추구하고 찾는 것“이라고 말한대로 그리스도가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게 그리스도신앙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성직자나 수도자는 성화(聖化)가 본업(本業)이며, “인생에서 성인이 되는 것 외에는 해야 할 일이 없고, 이 목표에 따라가는 것이 가장 우선적이며 시급한 일”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수도자나 성직자만이 완전한 그리스도인이고, 평신도는 어떤 면에서든 뒤떨어지는 그리스도인이며, 그리스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평신도, 지옥을 면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안티오키아와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젊은 시절 사막으로 가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훗날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거룩함으로 부르심 받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점에서 평신도들은 단순히 ‘죄를 피하기만 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고 말한다.

“신부와 수사와 수녀들은 완전함을 향해 성숙해야 하고 진전을 보여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평신도들은 은총의 상태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며, 성직자들의 옷자락에 매달리거나 홀로 ‘완전함’에 불린 전문가들에게 이끌려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평신도들이 실천하는 일상적인 절제와 정의와 자선은 수도자들의 정결서원이나 청빈서원과 마찬가지로 거룩한 것이다. 머튼은 수도자들의 봉헌생활이 좀 더 엄격하고 내적인 완전성을 지니고 있으며, 철저한 헌신을 보여주지만, 이런 사실이 평신도의 삶을 하찮게 여기도록 만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반대로, 혼인 역시 그 특성상 아주 신성한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혼인에 따르는 희생이 수도자들의 희생보다 훨씬 더 클 수 있다. 그 신분이 무엇이든 실제 삶에서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하느님과 더 가까워질 것”이라고 조언한다.

이를 두고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평신도들이 ‘지옥만 면하면 된다’는 오류에 맞서서 “나무는 단지 살아있기만 해서는 안 되며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집트를 떠나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누구나 약속된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지복(至福)은 독신생활을 하는 수도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모든 이를 위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주적 재앙’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클레멘스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국 외적인 경신례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 안에 있는 신적인 것’을 사그라지지 않는 사랑으로 보존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라며 우리 삶 전체를 ‘영적 교육의 장’이라고 불렀다. 머튼은 이 말을 받아서 “성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 주제넘은 어리석은 바람이라고 여기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사실 많은 평신도들은 물론 성직자들조차도 현실적으로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의구심을 갖고 있다”며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겸손일까? 아니면 직무유기인가? 패배의식인가, 절망감인가?” 묻는다. 덧붙여 머튼은 “우리가 성인이 되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오로지 우리가 받고 있는 은총을 활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랑은 비현실적인 상징이 아니다

▲ 토마스 머튼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거룩함에 사로잡혀야 하며,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삶을 재정립하고, 그분처럼 살기로 작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성인됨은 결코 일부 수도자들에게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모든 순간에 발생한다고 보았다.
토마스 머튼은 성인으로 가는 길에서 “하느님과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상징적이어서는 안 되고, 완전한 현실로 드러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머릿속 활동이 아닌, 우리의 가장 깊은 자아를 내어주는 선물이자 투신이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머튼은 “우리의 시대는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지만, 건설적이거나 선한 일도 거의 하지 않는 사람, 그러면서 교회는 뻔질나게 드나드는 종교인을 원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극도로 불의한 사회에서도 잘살고 있다. 그들은 모든 악에 눈을 감아 버리거나 심지어 아무런 죄의식 없이 그 체제에 동참한다. 신심이라는 울타리를 친 자신들의 삶의 공간에만 관심을 두고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른 모든 일로부터 물러나 있음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종교를 이유로 내건 이 같은 초라한 변명은 무지몽매함과 도덕적 불감증을 가중시키고, 궁극적으로 모든 나라와 사회 전반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죽음으로 몰아갈 것이다.”

이는 성인에 대한 그릇된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고 토마스 머튼은 비판한다. 그 많은 성인전들은 대체로 비현실적인 영웅담이나 기적 같은 것을 강조해 왔다. 성인들은 죄를 짓기보다 차라리 불속이나 얼음물, 가시덤불로 뛰어든다. 언제나 고상하고 교훈적인 격언을 쏟아낸다. 그들은 세상에 관심이 없고 감정에 따르지 않으며, 왕과 수행원들이 모퉁이를 도는 순간에 문둥병자의 상처에 입을 맞춰 거기 있는 사람들이 존경심으로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든다. 머튼을 이런 사람들을 추앙하는 것을 ‘사이비 예찬’이라고 말한다.

성인, 하느님 자비를 세상에 비추는 창

머튼은 이런 성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라고 요청한다. 성인이란 철저히 인간적이며, 인간적이란 더 많이 걱정하고 고통받고 이해하고 연민을 품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은총은 본능을 억압하는 게 아니라 치유해 영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 그래서 인간의 본성을 완성하는 것이다. 진정한 성인은 자신이 거룩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고, 하느님, 오직 하느님 한 분만이 거룩하다는 사실에 압도되어 승복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모든 것 안에서 거룩함을 보고, 마침내 자신 안에서도 그 거룩함을 보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거룩한 의지의 도구가 되고, 하느님 자비를 세상에 비추는 창이다.

이런 성인은 자기부정과 선행으로 평정심을 회복해 그분을 찾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를 더 간절히 찾아 헤매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결국 찾아내시고’ 더 나아가 ‘우리를 소유하시도록’ 해 드리는 사람이다. 결국 그런 사람들에게 성령은 ‘우리 영혼의 반가운 손님’으로 현존하며, 우리는 그분과 맺는 친밀함을 통해 끊임없는 기쁨과 힘과 평화를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약함을 극복함으로써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약함과 고통을 성령의 힘과 순수함으로 맞바꾸도록 허용함으로써 성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힘과 성령의 탄식을 잊은 채 우리 자신에게만 관심을 집중시켜 우리의 삶을 복잡하게 만들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머튼은 우리가 성인이 되기 위해 “하느님을 냉정한 입법자, 단순한 통치자, 주인이나 심판관이 아니라 아버지, 압바라고 믿는데서 시작하라”고 제안한다. 그 믿음 없이는 ‘좁은 길’로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성인은 그가 감당한 고통의 크기나 자책감으로 가늠되는 게 아니다. 성인은 상처를 치유하는 사랑의 크기로 가늠된다. 그분처럼 세상의 가장 가련한 사람들에 대한 연대와 연민의 크기로 가늠된다.

그런 뜻에서 이사야 예언서의 발언은 여전히 의미가 깊다. “너희가 지키는 초하루 행사와 축제들이 나는 정말로 싫다. 귀찮다. 이제는 참지 못하겠구나.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내가 보지 아니하리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손은 피투성이,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 내 앞에서 악한 행실을 버려라. 깨끗이 악에서 손을 떼어라. 착한 길을 익히고 바른 삶을 찾아라. 억눌린 자를 풀어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이를 두고 토마스 머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최종적인 완전함'이란 "우리 삶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드러나시는 것"이라며, 우리의 모든 삶을 그리스도 안에서 재정립하고, 그분처럼 말하고 그분처럼 생각하고 그분처럼 행동하는 것이라고 전한다.

얼마 전에 젊은 철학자인 강신주 씨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철학자란 매사에서 만일 장자가, 스피노자가, 예수가, 붓다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는 어떻게 말했을까? 어떻게 생각했을까? 어떻게 행동했을까? 분명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우리도 그 철학자처럼, 우리가 스승으로 삼고 있는 예수처럼 느낄 수 있다면 그제서야 성인의 길에 입문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현주 목사가 지은 책 가운데 '대화체'로 쓰여진 글이 많이 있음도 그가 그분처럼 생각하기 위한 연습일 것이다. <아직도 쓸쓸하냐>는 물론이고, 마르코 복음을 읽어 내려간 <예수에게 도를 묻다>란 책도 그러하다. 이 책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대화체란 결국 내가 묻고 내가 답하는 것이다. 내가 그분처럼 답하는 가운데 내 꼴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나와 다른 이치를 깨닫는 것이다. 자기 자신과 대화하지 않고서야 그분을 따라나설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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