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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란 그런 것, 한 여인 앞에서 무력해지는[파블로의 필름창고] 카사블랑카, 감독 마이클 커티즈, 1942년 작

한참 어렸을 때 주말 저녁이 되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영화를 시청하곤 했다. 대부분 미국 헐리우드 영화로 그때 보았던 영화 속 몇 장면들은 한참 자라고서도 기억이 생생하다. 인디오와 악당을 무찌르는 멋있는 존 웨인, 기껏 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했는데 검문 중 ‘땡큐’했다가 다시 잡혀가는 미군 장교, 떠나가는 자신의 우상에게 ‘셰인~’하며 외치는 어린아이 모습 등 그런 잔흔들 하나하나가 내 머릿속 어딘가에 박혀 있다가 어떤 식으로든 드러날 법하다.

   
 
1980년대 ‘양키 고 홈’을 외치면서 ‘美國’을 ‘尾國’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헐리우드 영화의 문화제국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넋놓고 영화를 보는 사이에 우리 의식에 젖어드는 미국적 사고를 응시하자고 했다.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어린 시절 감동적으로 보았던 영화들이 우리 마음속에 생생하게 담겨버린 추억의 영화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은 돌이키기 힘든 것이기도 하다.

험프리 보가트를 인구에 회자하게 했던 <카사블랑카>는 그런 추억의 영화 중 하나인데, 띄엄띄엄 보다가 2006년에야 제대로 보았다. 또랑또랑한 영화배경 내래이션이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프랑스 파리는 독일에 점령된 때라고 설명한다. 많은 유럽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떠나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돈 있고 권세 있는 자들은 후딱 떠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오랑을 거쳐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 머문 다음 리스본을 거쳐 미국으로 떠난다.

카사블랑카에는 망명자, 사기꾼, 도박꾼, 살인자 게다가 프랑스 식민지였던 곳이라 프랑스의 관리들이, 그런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된 상태라 독일군, 독일군의 동맹군인 이탈리아군까지 온갖 사람들이 모여 있는 복잡한 도시다. 여기서 닉(험프리 보가트)은 흔들림 없이 일처리도 깔끔하게 하면서 차분하게 카페를 운영한다. 한 여인과 한 남자가 나타나는데, 이 여인네가 피아노 연주자 샘에게 <세월이 흘러가도>라는 곡을 요청한다. 닉이 호통을 치면서 다시는 연주하지 말라고 했잖아 하는데, 그 곡을 요청한 여인이 바로 자신의 옛 여인 일자 린드(잉그리드 버그만) 아니던가.

   
▲ 폼생폼사 닉이 일자의 등장 이후 많이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하여튼 그렇게 의연했던 닉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한다. 여자가 떠난 뒤에 이왕 버린 몸이다 싶었는지, 호통치며 말리던 <세월이 흘러가도>를 부탁한다. 어찌 보면 닉에게 일자는 여신과도 같은 존재다. 아주 일반적으로 이야기하기엔 무리가 따르지만, 세상의 많은 남자, 특히 약간 철없는 남자에게 사랑하는 한 여인은 여신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자신 앞에 서 있는 그녀에게는 어떠한 결점도 없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것마저 받아들이고 좋아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아주 심각한 경우에는 그렇게 반복되면서 자신만의 만신전(萬神殿)이 만들어진다. 그 안에 여러 여신상 중 현재 숭배 중인 여신상은 온전하나 예전의 여신상은 대부분 파괴되어 있다. 더 이상 자신의 여신이 아니며 우상이라 생각했을 때 나타나는 일종의 반달리즘이겠다.(마치 탈레반의 불상 파괴 반달리즘도 그것이 자신들의 유산이 아닌 우상이라 여겼기에 이루어졌던 것처럼.)

여신숭배가 한참 진행되는 와중에 그녀와 관련된 모든 것이 성스러워진다. 그녀와 추억이 가득한 곳이 성지가 되고, 그녀와 관계된 추억의 물건은 성물이 된다. 닉에게 파리는 일자와의 추억이 가득한 성지였으며, <세월이 흘러가도>는 그녀를 기억하는 성가였는지 모른다. 심지어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라는 기가 막힌 주문까지 구사한다.

일자와의 재회로 흐트러지기 시작한 닉은 처음엔 일자와 레지스탕스의 지도자인 그녀의 남편 빅터 라즐로를 별로 도와주고 싶지 않았다. 빅터가 레지스탕스 지도자인 것을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는지, 독일군들이 군가 비스므리한 것을 부르니까,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힘차게 부르면서 사람들의 애국심을 부추긴다. 이 때문에 조속히 도망가야 할 처지가 된다. 닉은 일자를 통해 자신이 몰랐던 사실을 알아 오해를 풀고 파리의 추억을 다시 찾았다 생각한다. 그리고 흔들리는 일자를 본 뒤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도와주려 한다.

닉은 뭐 대충 세상과 타협하는 생활력이 강한 남자다. 그런 닉도 가끔 자기 내면의 소리를 감당 못해 파격적인 행동을 하고, 그로 인해 낭만주의자라는 비아냥의 소리를 듣곤 했다. 아름다운 한 여인이 그를 또다시 낭만주의자로 만든다. 남자들이란 그런 것 한 여인 앞에서 힘이 쭈욱 빠져버리고, 그러다가도 용감해지는 법.

이렇게 험난한 시절에 삼각관계는 별로라며, 자기도 뭐 이래저래 할 일이 많다며. 흔들리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아주 깔끔하게 정리한다. 겉으로는 아주 쿨한 척하지만 그 속마음이 얼마나 썩어들어가겠는가. 사랑하는 여인은 비행기를 타고 떠나가지만 그래도 마지막 썰렁한 반전 때문에 영화는 비교적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닉은 이제 여신숭배에서 진정 한 여인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 닉은 이 험난한 시절에 삼각관계는 별로라며 이 두 사람을 떠나 보낸다.

이 아련한 흑백영화 속 배경음악 <세월이 흘러가도>보다 이브 몽탕이 불러 더욱 유명해진 자크 프레베르의 시로 만든 <고엽>이 이 영화에 웬지 더 어울릴 것 같다. 지나간 사랑에 대한 성찰을 담은 노래라는데, 모든 것은 다 변해가고 사라져가거늘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언제나 힘들다는 점이 묻어난다.


고엽

-자크 프레베르

기억하라 함께 지낸 행복했던 나날들을
그때 태양은 훨씬 더 뜨거웠고
인생은 훨씬 더 아름다웠지.

마른 잎들을 갈퀴로 모으고 있네.
나는 그 나날들을 잊을 수가 없어.
마른 잎들을 갈퀴로 모으고 있네.
모든 추억과 모든 뉘우침도 다 함께
북풍은 그 모든 것을
싣고 가느니
망각의 춥고 어두운 밤 저편으로
나는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는 없었지.
네가 불러준 그 노랫소리
그건 우리 마음 그대로의 노래였고
너는 나를 사랑했고 나는 너를 사랑했고
우리들은 언제나 함께 살았었네.

하지만 인생은 남몰래 소리도 없이
사랑하는 이들을 갈라놓네.
그리고 헤어지는 연인들이 모래에 남긴 발자취는
물결이 다 지워버리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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