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07.05~1984.07.19

7월 19일은 죽재 서남동 목사께서 돌아가신지 27주년이 되는 날이다. 한국교회가 맞고 있는 전반적인 위기 앞에서 그분을 다시 기억하고자 한다. 그분이 남긴 신학적 유산을 교회가 잇고자 일어선다면, 어쩌면 한국교회가 이 역사 속에서 다시 한 번 민족의 영혼을 사로잡는 종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 서남동 목사
1984년 5월, 67세의 서남동은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모교가 있는 캐나다 토론토를 향하게 된다. 그는 출발 직전 스승 김재준 목사에게 자신의 아호를 지어줄 것을 부탁한다. 뒤늦게 발견된 췌장암 때문에 귀국하자마자 병상에 눕게 된 서남동은 마지막 정신을 이어가는 가운데 동료 정대위 박사를 통해 아호를 전달 받는다. 오랜 스승이 준 아호를 통해 나타난 서남동은 다음과 같다.

“그의 용모와 뜻이 맑고 깨끗하며, 그의 지조와 마음은 곧고 비어 있다. 그의 학문은 넓고 사귐은 공경할 만하다. 고난을 받되 태연하고, 안정하여 학문에 힘쓰니 널리 그의 풍문이 들리는구나. 이에 그의 덕을 기리며 84세의 장공이 호를 지어 들어내노니 ‘竹齋’라.”1)

죽재 서남동은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살아가며 민중신학이라는 실천적 기독교 사상을 탄생시킨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처절한 극단의 삶을 살았다기보다는, 그의 아호가 가리키듯이 대나무처럼 올곧게 “진리를 찾아 순례하는 구도자”로 살았다. 그는 자신이 지어 이룬 것에 머물지 않고 늘 진리를 향해 새롭게 도약하는 영혼을 가진 이였다.2)

1918년 7월 5일, 죽재는 목포에서 서북쪽으로 4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자은도(현재 신안군 자은면 유천리 272번지)라는 섬에서 부친 서응렬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상대적으로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인지, 죽재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섬에 대한 영상은 어둡지 않다. 소학교 5학년 때 목포로 유학 간 죽재는 처음으로 기독교를 접하게 된다. 이때 성경을 통해서 배운 기독교 신앙은 나중에 ‘민중’에 대해서 눈뜨고 깨닫게 된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즈음, 성경에 나온 지역(地域)이 지구 위에 실재한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으니 죽재의 삶과 사상의 시작은 평온하고 순박했다고 할 수 있다.

소학교를 마친 죽재는 전주로 옮겨 신흥학교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이수한다. 이 학교는 호남지역을 주무대로 삼고 활동했던 미국 남장로교 소속의 윌리엄 레이놀즈 선교사가 1900년에 세운 곳으로서, 한강 이남에 있던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이었다. 죽재가 수학하던 그때까지 5대째 미국 선교사가 줄곧 교장을 맡고 있었음을 미뤄보아, 전주신흥학교는 아마도 식민지 시대 청소년에게 굴욕과 분노를 심어주기보다는 상식과 희망을 허용하는 좋은 공간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죽재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인 1937년에 이 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폐교되고 해방 이후에야 복교가 되었으니, 죽재 역시 조선 인민 모두에게 부과된 역사의 짐을 지고 있었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마친 죽재는 1936년에 일본 교토에 있는 유서 깊은 동지사 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여 예과를 1년 수료한 후, 이어서 기독교 신학을 배우게 된다. 자유로운 학풍으로 유명한 이 대학은 추상적 관념이나 전통의 왜곡된 권위에 맞서 진리를 증언코자 하는 지적 정직성에서 탁월했던 죽재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없다.3) 1941년 3월, 24살의 청년이 되어 귀국한 죽재는 평양에 있는 요한성경학교 교사로 1년 남짓 재직한다. 그리고 대구에 내려가 대구제일교회, 범어교회, 동문교회 등에서 십 년간 목회자로 활동한다. 목회를 하면서도 그의 학문적 열정을 식지 않았다. 그는 당대를 선도했던 국내외 신학자들의 사상을 섭렵하는 일에 남달랐다. 이점이 그 당시 신학적 차이로 인해 교단분열의 길을 걷고 있던 장로교단 가운데, 진보적인 노선을 고수하며 새롭게 출발하던 한국신학대학(현재 한신대학교)의 교수로 발탁된 이유였을 것이다.

35세에 교수가 된 죽재는 아직 사상적으로 무르익지 않았다. 교수진의 수준향상을 위해 장려되었던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3년 동안 그가 쓴 글은 짧은 논문 한 편에 불과했다.4) 그러나 1955년 가을부터 2년 동안 토론토에 위치한 빅토리아대학교의 임마누엘대학에서 대학원 수업을 마치고 복교한 이후부터 죽재는 자신의 신학을 체계화시켜가기 시작한다. 1961년 9월에는 연세대학교 신학과 교수로 이직하여 종합대학이라는 보다 풍요로운 학문적 분위기에서 연구하며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이 주로 강의했던 현대신학과 역사철학의 세계적 동향에 누구보다 민감했기 때문에 “현대신학의 안테나”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현대신학의 세계적인 흐름과 함께 나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대학원 시절부터 붙들고 있었던 자신의 학문의 주제인 ‘역사와 기독교 신앙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끊임없이 심화 확대시켜 갔다.

죽재는 15년 동안 연세대학교에서 교수로 봉직하면서 교목실장, 신과대학 학장, 연합신학대학원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학문에서는 치열했지만, 직접적인 사회적 실천문제에 대해서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대학원장으로 있던 1969년 말, 많은 기독교 인사들이 삼선개헌반대투쟁으로 일어섰을 때에도 그는 “비교적 냉담했다”고 한다.5) 어쩌면 이때 죽재는 과학철학과 유기체사상을 통해 그 정신의 지평을 우주론으로까지 넓혀감으로써 마침내 있을 창조적인 분출을 마지막으로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죽재를 한국역사의 한복판으로 끌어낼만한 상황은 사실상 이미 전개되고 있었다. 1960년대 중반, 대부분의 개신교회가 한국사회의 산업화 과정에 편승하여 성장주의로 무장한 채 내달리기 시작했을 때, 선각자들은 도시산업선교회를 만들고 교회의 울타리를 뛰어넘어서 고난 받는 민중현장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죽재 역시 이러한 현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직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1970년 11월 13일, 23살의 청년 전태일의 분신사건은 이제 생명과 평화를 설파하는 모든 종교사상의 진정성을 시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절 죽재는 자신 시대를 앞서서 생태환경과 과학기술 문명에 대한 새로운 유기체적 비전을 완료해가고 있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의 직접적인 부름에 대해서도 무감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1972년 10월 박정희에 의해서 유신헌법이 선포되자, 한국사회는 말이 법이지 실상은 무법천지의 광폭한 정치폭력이 기승을 부리는 어둠의 세상이 되었다. 이즈음 세계교회가 주목한 사건이 한국에서 벌어진다. 1973년 5월 20일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이 발표된 것이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정면도전을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표방한 이 선언을 죽재가 주도했는데, 그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우리의 主님, 메시아 예수는 유대 땅에서 가난한 자들, 눌린 자들, 멸시받는 자들의 사이에 계셨고, 그들과 함께 살으셨다. 그는 로마 帝國의 대표자 본디오 빌라도 앞에 담대하게 서시었다. 그리고 진리를 증거하시는 도상에서 十字架에 못 박혀 죽으셨다. 그러나 백성들을 해방하기 위하여 죽음에서 일어나 變化의 能力을 전해주셨다. 우리는 오늘,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갈 것을 결의한다. 그리하여 주님처럼 疏外당한 동포들과 함께 살면서 정치적인 압박에 저항하고 역사의 개조에 참여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것만이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 한국 땅에서 메시아의 나라를 선포하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선언 이후 얼마가지 않아 ‘민중신학’이라고 불리게 될 한국 고유의 신학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을 때 죽재는 항상 맨 앞을 지키고 있었다.

1974년으로 접어들면서, 죽재의 민중신학적 구상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어간다. 그해 연세대학교 교수퇴수회에서 “예수와 민중”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후, 여러 곳에서 동일한 주제로 강연을 하고 그것을 가다듬어 1975년 2월에 “예수ㆍ교회사ㆍ한국교회”라는 제목으로 출판한다. 그것이 죽재 민중신학의 시발이 되는 논문이었다.6) 같은 시기에 동료 민중신학자 안병무도 “민중ㆍ민족ㆍ교회”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독일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이 내한하여 “민중의 투쟁 속에 있는 희망”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는 등, 바야흐로 한국에 민중신학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시기 죽재로 하여금 새로운 사상세계로 완전히 진입하게 만든 한 일화가 있다. 그 사건은 아마 1975년 초에 생겼던 것 같다.7) 죽재는 그해 11월 말에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열리게 될 세계교회협의회(WCC) 제5차 총회를 준비하기 위한 <신앙과 직제, Faith and Order> 분과의 사전 모임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게 된다. 유럽에서는 정치신학이, 남미에서는 해방신학이, 북미에서는 흑인신학이 활발해지던 이 시기에, 이 총회는 직접적으로 “해방과 공동체,” “해방을 위한 투쟁과 불의한 구조들” 등의 주제를 다루게 될 것이었다. 준비모임에 참석한 죽재는 참가자들로부터 한국의 상황과 정치적 억압의 상징이 된 김지하에 대해서 질문을 받는다. 아뿔싸! 저항시인으로 세계가 주목하고 또 민청학련 사건으로 인해 비상군법회의에서 사형까지 언도받은 그 사람과 그의 사상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다니. 서남동은 자기 신학의 관념성에 스스로 충격을 받고, 귀국 즉시 김지하 관련 자료를 모두 수집해서 읽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서 한국 민중의 한(恨)과 희망에 관한 시인의 감수성은 죽재신학에 그대로 흡수된다. “신(神)과 혁명의 통일”이라는 지하의 사상이 서남동 신학의 토대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제 죽재는 책상머리의 서생의 아니라, 한국역사의 도도한 물결을 따라 민중신학의 이상을 실천을 통해서 실현해가는 행동하는 지성인으로서의 면모를 완전히 갖춘다. 1974년 11월 27일, 62명의 한국의 진보인사들이 발표한 <민주회복국민선언>에 참여한 이유로 정부로부터 경고조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교내에서는 구속학생과 교수의 석방을 위한 기도회를 주도하고, 밖으로는 정치집회의 강연자로 활동하면서, 이듬해 3월, 8개교단의 성직자들이 결성한 “기독교정의구현전국성직자단”에도 적극 참여한다. 결국 그해 5월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는 이유로,8) 안병무, 문동환, 이계준 교수 등과 함께 교수직 해임을 권고 받고, 6월 2일 사직하게 된다.

학교에서 쫓겨난 죽재는 그야말로 “방외의 신학자”가 되었다. 이제 그의 신학은 서재에서보다 거리에서, 머리와 손으로가 아니라 가슴과 발로 써진다. 한편으로는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를 통해 활동하면서 기독교 사회운동에 신학적 정당성을 불어넣는 작업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문동환, 안병무 등 해직교수들과 그 가족 및 해직기자 등과 함께 “갈릴리 교회”를 설립하여 고난 받는 교회의 새로운 모델을 세워갔다. 그러는 와중에 민중신학자로서 어쩌면 피하기 힘든 시련의 시기를 맞는다. 1976년 3월 1일, “3ㆍ1민주구국선언 (일명, 명동사건)”에 서명함으로써 함석헌, 윤보선, 김대중, 안병무, 문동환, 이우정 등과 함께 정부전복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어 1977년 12월 31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기까지 22개월간 수형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석방된 지 두 달 후, 죽재는 감옥에서 구상했던 민중신학을 체계화시킬 수 있는 안정된 자리를 얻게 된다. 예전에 교수로 있었던 한국신학대학의 소속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선교교육원 원장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이즈음 그의 정신세계를 가늠케 하는 한 장면이 있다. 죽재는 자신의 집무실 벽에 기라성 같은 기독교 신학자들의 사진이 아니라 처형장으로 압송되어 가는 전봉준 장군의 사진만을 걸어놓았다고 한다.9) 이제 ‘한국의’ 신학자로서 한국 민중의 영혼에 새겨진 고난과 희망을 신학적 언어로 풀어가겠다는 결심 때문이었을까? 어찌됐든, 1979년에는 죽재 민중신학의 핵심사상이 담긴 “두 이야기의 합류,” “恨의 사제,” “恨의 형상화와 그 신학적 성찰” 등의 논문이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여기에서 사용된 신학적 방법론은 더욱 구체화되어 이어지는 4년 동안 민중신학을 이어갈 후세대들에게 큰 영향을 준 10여 편의 논문으로 구체화된다.

죽재의 마지막 5년 동안의 삶은 한국의 문화와 역사가 지닌 고난의 숨결을 종교사상으로 형상화한 탁월한 시기였지만, 그 고난은 또한 바로 자기 자신의 고난이었기에 학문적 언어 역시 매우 구체적인 것이었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전통신학의 언어를 배격하고, 한국의 문화적 실재와 정치사회적 현실을 직접 증언하는 신학방법론을 사용하면서, 자신은 이를 가리켜 “탈(脫)신학” 또는 “반(反)신학”이라고 명명하였다. 그의 삶 역시 반듯한 학문적 공간 안에서의 삶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박정희의 죽음으로 인한 공백상태에서 1980년 2월 교수로 복직되지만, 전두환의 5ㆍ17비상조치로 인해 또 다시 구속되어 해직된다. 죽재는 5월 17일 제주도의 한 교회에서 강연하던 도중에, 소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이라는 정권의 정치조작에 연루되어 잡혀간 것이다. 그리고 군법회의에서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5개월여의 옥살이 끝에 형집행정지로 출옥한다. 역사와 세계 속으로 생생하게 화육(incarnation)한 신의 현존을 증언하는 것이 기독교 신학이라면, 죽재는 그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자신을 역사의 흐름에 붙들어 매고 몸으로 증거하는 삶을 살아간 것이다.

죽재의 삶과 신학은 진리를 향해 끝없이 나아가는 구도의 길이었고, 그 길에서 발견한 것은 ‘민중’이었다. 겉으로는 억압과 고난을 당하는 약자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밀고 나가는 실체로서의 민중, 약탈과 갈등으로 이어진 역사의 사슬 마디마디에 생겨난 한(恨)과 증오를 도리어 창조적 생산과정에 품고 녹여내면서 타락한 역사를 구원시키는 민중, 그래서 진화하는 우주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이 어딘지 또 그 우주에서 섭리하는 신의 활동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가리키는 지표가 되는 민중, 바로 그것을 증언하고 언어에 담아 형상화시키는 것이 죽재의 신학적 목표였다. 바로 이 정신으로 인해 한국에 민중신학이라고 하는 세계가 주목한 신학사상이 생겨났고, 죽재 개인으로 보면 모교인 빅토리아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게 된다.

안타까운 것은 죽재가 자신의 생각을 기록해 낼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죽재가 민중신학을 본격적으로 펼친 기간은 10년도 채 되지 않는다. 감옥에서의 고문 후유증과 수많은 활동에서 오는 피로로 인해, 죽재는 67세의 나이로 1984년 7월 19일 세상을 떠나고 만다. 모든 육체적 죽음이 미완을 남긴다면, 죽재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민중’이라는 말이 역사의 활력을 상징하는 말로 살아있는 한 죽재 역시 영원히 살게 될 것이고, 그 상징이 죽을 때 죽재가 남긴 사상적 교훈도 의미를 잃고 말 것이다. 죽재가 다음 세대에게 남긴 분부는 분명하다. 그것은 민중의 눈으로 세계를 읽고, 민중의 편에서 사상을 전개하고 실천하라는 것이다. 동료 민중신학자였던 안병무의 말로 죽재가 삶으로 쓴 신학이 무엇인지를 대신한다.

[기독교 신학은] 교회의 전통적 유산과 연결해서 설명하고 해명하라는 요구가 있는데, 솔직히 말해서 서남동의 눈에는 교회가 무얼 요구하는가가 중요하지 않았어요. 지금 당장 급한 것은 민중이 현장에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였고 그것에만 전력을 기울였던 겁니다. 한 마디로 그는 場을 옮겼던 겁니다. 교회도, 신학이라는 것도 그의 장이 아닙니다. 민중이 장이었습니다.10)

미주)
1) 김재준, “삼대 목사와 서남동의 민중신학,” 『김재준전집』제17권, 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사업회 편 (한신대학 출판부, 1992), 168. 원문은 다음과 같다. “敬祝 徐南同敎授 學位受領, 謹呈 雅號曰 竹齊” 竹濟 其貌淨 其志潔 其操直 其心虛 其學博 其交敬 受難而泰 居安而學 普天之下 聞其風而 慕其德 故 八四 ? 長空 呈號曰 竹齊如是.
2) 김경재, “죽재 서남동의 신학사상,”「신학사상」46집 (1984년 가을), 513.
3) 서남동, 『전환시대의 신학』(한국신학연구소, 1976), 7. 서남동은 이렇게 회고한다. “대학예과를 마치고 신학과 1학년에 들어갔을 때... 나는 처음으로 학문의 엄격성을 배웠고 그때 받은 충격은 지금도 내 마음에 역력하다.”
4) 50년사 편찬위원회, 『한신대학 50년사 : 1940~90』(한신대학출판부, 1990), 83.
5) 김재준, “삼대 목사와 서남동의 민중신학,” 164.
6)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한길사, 1983), 29. 「기독교사상」 201호(1975년 2월)에 발표된 이 논문에 대해서 김형효 교수가 「문학사상」4월호에서 “혼미한 시대의 진리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신랄하게 비판하자, 죽재는 「기독교사상」203호(1975년 4월)에서 “‘민중의 신학’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답한다. 여기서 처음으로 “민중의 신학”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7) 채희동, 『민중ㆍ성령ㆍ생명 : 죽재 서남동의 생애와 사상』(한들, 1996), 40. 이때가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죽재의 연세대학교 동료였던 김찬국 교수의 회고를 통해 볼 때 75년 2월경으로 추정된다.
8) 박정희가 1975년 5월 13일에 대통령령으로 발표한 <긴급조치 9호>는 저항하는 시민들의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제한하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서, 이 조치를 위반한 사람은 “영장 없이 구금, 압수, 수색”을 받게 되지만 (8항), 이 조치를 실행한 주무부서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13항) 근대 시민사회의 기본정신마저 위배한 것이었다. 이 조치는 박정희가 죽고 난 이후에야 해제되었다.
9) 김경재, “서남동의 민중신학과 동학사상,” 『종교다원시대의 기독교 영성』(다산글방, 1992), 325-26.
10) 안병무 등, “서남동 박사와 민중신학,” 「신학사상」46집 (1984년 가을), 534.
 

김희헌 /한신대 연구교수

<기사제휴/에큐메니안 2011년 7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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