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대바위 뒤로는 병풍절벽 가까스로 / 절벽을 기어오른 덩굴식물 사이로 초소가 보이고
구멍 속에는 초병(哨兵)이 하나 서서 / 장산곶 하늘의 매를 감시하고 있다.
아니, 그는 아마 눈먼 아비를 위해 / 심청이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에
연꽃이 언제 피는가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정희성 시인의 ‘몽유백령도’라는 시의 한 구절입니다. 인천에서 4시간 넘게 배를 타고 가야하는 백령도. 시인은 두무진에서 유람선을 타고 백령도 촛대바위 뒤 병풍절벽을 둘러보다가 절벽 구멍 속 초병을 봅니다. 백령도 두무진 앞 바다는 심청이 눈먼 아비를 위해 몸을 던졌다는 바로 그 바다 인당수입니다.

얼마 전 해병 1137기 김태평 이병이 배치 받아 더욱 유명해진 이곳 인당수를 지키는 부대의 이름은 흑룡부대입니다. 현빈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이 병사의 4박 5일 첫 휴가가 끝나고 다시 이곳 백령도로 들어오는 날에는 오전과 오후 배편이 모두 동이 났다고 하지요. 스물아홉이라는 나이에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해병대에 자원 입대한 이 병사는 “왜 해병대냐”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해병대는 오랜 로망이었습니다.” 2012년 12월 6일이 그가 예비역 병장 계급장을 달고 제대하는 날이라고 합니다. 아무쪼록 김태평 이병의 ‘로망’이 헛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본디 ‘로망’이라는 단어는 프랑스어 ‘roman’에서 유래한 것으로 ‘소설’, ‘파란만장한 이야기’, ‘비현실적인 이야기’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최근 강화도 해병 2사단에서 발생한 비극적 총기사고는 해병대에 대한 ‘로망’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현빈이 꿈꾸었던 해병대에 대한 ‘로망’은 소설 혹은 그가 출연했던 드라마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일까요.

이제 제가 알고 있는 해병대의 ‘현실’ 속에서 만난 한 장병의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해병대의 ‘로망’을 꿈꾸었던 또 다른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190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준수한 용모를 가진 이 청년은 대학 1학년을 마치고 해병대에 자원입대하여 훈련을 마치고 국방부 의장대에 배치됩니다. 하지만 해병대 1008기 이등병 계급장을 단 이 청년은 부대 배치 후 불과 석 달 만에 국군수도병원에서 ‘적응장애’ 진단을 받고, 해병대 2사단으로 전입조치 됩니다.

최근 총기사고가 발생한 바로 그 부대입니다. 나중에 재판 과정에서 밝혀진 것이지만, 전입을 온 이 장병에 대한 선임병과 하사관들의 폭행과 부당한 대우는 이 청년의 마음을 야금야금 파고들었습니다. 병장 계급장을 단 이후에도 계속 따돌림을 받던 이 청년은 결국 제대를 불과 70여 일 앞두고 중대본부 막사 2층에서 몸을 던집니다. 다행히 투신 후 같은 부대 장병들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지만, 다리와 허리에 심각한 골절상을 입었고, ‘정신분열증’이라는 진단을 받습니다. 전역 후에도 정신분열증으로 치료를 받던 이 청년은 국가보훈처에 국가유공자 등록신청을 하지만 거부처분을 받습니다. 부모님들의 끈질긴 문제제기와 노력 끝에 2011년 5월 중순 서울고등법원은 이 청년의 정신분열증이 군 복무 중 스트레스로 인해 발생한 것임을 인정하고, 승소판결을 선고합니다.

‘비극은 요즘 인기 없는 주제’라지만 저는 이 청년의 소송을 수행하면서, 대한민국 해병대에 존재하는 엄연한 ‘비극적 현실’을 보았습니다. 이 청년과 같은 부대에 근무했던 선임병은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선임병이 특정병사를 기수열외를 시키면 그 병사는 자기보다 낮은 기수의 후임병들로부터 인격적으로 무시를 당하고, 후임병이 반말을 하거나 구타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보통 내무반에서 음료수를 나눠 줄 때 기수별로 나누어주는데, 그때도 자신의 기수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게 됩니다.”

해병대에 입대하는 우리 젊은이들의 ‘로망’이 배신당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본시 인당수 바다 물빛보다 마음이 아름다운 우리 젊은 ‘초병’들을 눈멀게 하는 오래된 구습은 모두 사라져야 합니다. 시인은 절벽 구멍 속 초병을 보며 그런 날이 오기를 기원합니다.

언젠가는 병사들도 심봉사처럼 / 눈뜰 날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심청이 환생했다는 / 연화리(蓮花里 )가 여기 있을 턱이 없지
그렇지 않고서야 심청각 옆에 / 탱크를 세워둘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좌세준/ 변호사, 천주교인권위원회 위원

[기사제공-교회와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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