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재욱 수원교구 공동선실현사제연대 사무국장

7월 19일, 다시 두물머리를 찾았다.
518일째 어김없이 봉헌되는 오후 3시 두물머리 생명평화미사. 인천교구 장동훈 신부와 정연섭 신부의 집전으로 9명의 신자들이 미사를 함께 봉헌한 미사에서 강론을 맡은 장동훈 신부는 “‘새는 좌우의 날개가 아니라 온 몸으로 난다’는 말의 의미를 되새기며 온 몸으로 치열하게 살아가려는 자신의 삶 안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게 된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농민들은 마침, 두물머리 상생과 대안을 위한 두물머리 대안모델 연구 중간발표회에 참석 중이었다.

미사를 진행하고 있는 이는 김재욱 수원교구 공동선실현사제연대 사무국장(46, 플로렌시오). 2009년 11월 27일 첫 미사를 시작으로, 2010년 2월 17일 ‘재의 수요일’부터 518일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두물머리 생명평화미사를 지키고 있다.

두물머리 싸움의 역사인 518일. 2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두물머리 농민들과 함께 하루도 빠짐없이 이곳을 지키는 김재욱 사무국장, 그에게 518일의 시간과 두물머리의 이야기를 들었다.

▲ 김재욱 공동선실현 사제연대 사무국장은 두물머리 미사 초기부터 지금껏 두물머리를 제 집처럼 지키고 있다. 그래서 농민들은 그를 12번째 귀농자라고 말하곤 했다.(사진/한상봉 기자)


두물머리에서 12번째 농가로 자리매김 한 사연

김 국장은 평범한 신앙인이자 직장인이었다. 어느날 본당 주임사제였던 이상헌 신부를 만나면서 그는, 처음으로 신앙과 사회적 참여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고 한다. 신앙인으로서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면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교회에서 운영하는 지역자활센터 관장으로서 다른 삶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수원교구 내 사회사목을 고민하는 사제들의 모임인 ‘공동선실현사제연대’에서 사무국장 제의를 받고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싸움은 수원교구 미리내 성지 인근의 미산골프장 건설 반대 운동이었다. 사제들과 함께 경기도청 앞에서 60일간 노숙농성을 벌이면서 그는 자연스레 본격적인 사회사도직 활동에 뛰어들게 됐다.

골프장 건설문제가 어느정도 정리되고 4대강 사업이 이슈화될 무렵, 팔당공동대책위원회 농민들이 팔당 유기농단지가 훼손될 위기에 놓였다는 소식을 전하고 도움을 청해왔다. 사제연대 소속 신부들과 함께 간담회 자리를 만들었고, 농민들과 무엇을 함께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했다.

2009년 11월 27일 첫 두물머리 생명평화미사
‘4대강사업 저지를 위한 천주교연대’의 탄생과 518일의 생명평화미사

농민들은 팔당 두물머리 생명평화미사를 요청했다. 2009년 11월 27일 수원교구 최덕기 주교와 함께 한 이 미사가 이 518일 여정의 첫날이 되었다. 당시 미사를 위해 쓰러졌던 버드나무가지로 엮은 십자가 역시 여전히 두물머리를 지키고 있다.

▲ 두물머리에 심어놓은 십자나무에 잎이 돋아 무성했다.(사진/한상봉 기자)

이후 공권력이 들어오고 점점 상황이 어려워졌다. 겨울을 나고 교회력으로 사순을 맞는 이듬해 2월 17일부터 철야기도회를 진행했다. 수원교구 사제단이 제안한 이 철야기도회에 인천, 의정부, 서울교구 신부들이 화답했고, 곤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도 단식 농성에 참여했다. 그런 과정에서 연대체가 필요하다는 제안이 나왔고, 각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환경사목위원회, 가톨릭농민회 등을 중심으로 ‘4대강사업 저지를 위한 천주교연대’가 구성, 이후 4대강 권역별 미사, 생명평화미사 등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2010년 ‘재의 수요일’부터 꼬박 518일째 이어온 미사, 한번도 멈춘 적 없다

“500여일의 시간은 두물머리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유기농민, 4대강을 지키기 위한 여러 활동이 촉발되었고, 천주교 4대강 반대운동이 시작된 만큼 좋은 마무리도 이곳에서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두물머리 생명평화미사는 518일동안 한번도 거른 적이 없다. 어느날은 미사 직전까지 신부가 없어 미사를 드리지 못할 상황이었다가 우연히 인근에 장을 보러 나온 신부와 연락이 되어 미사를 드린 적도 있고 또 어느날은 신부 6명에 신자가 2-3명 있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두물머리의 미사가 점점 알려지면서 10명 이상의 신자들이 늘 미사를 지킨다. 사람들은 이를 유대교의 ‘미니안’에 빗대어 ‘두물머리 미니안’으로 부르기도 한다. '미니안'은 유대인들은 10명 이상이 모여야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이르는 말이다.

▲ 인천교구 신자들은 미사봉헌 후에 천막성당 옆에 있는 자신들의 텃밭을 돌보곤 했다.(사진/한상봉 기자)

지치고 상처입은 농민들...그러나 사람들이 있기에 버틴다

현재 두물머리의 상황은 지난 2월, 팔당 두물머리 농민들이 낸 ‘하천점용허가 취소처분 취소 소송’이 1심 승소 결정을 받은 후, 경기도가 항고해 2심이 진행중에 있고, 오는 20일 첫심리가 열린다. 이미 두차례의 계고장이 나왔고, 7월말까지 자진철거 하지 않으면 행정대집행을 강행하겠다는 통보를 받은터라 법적인 절차는 끝난 셈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상황이 있다. 오는 9월 26일부터 10월 5일까지 팔당 남양주에서 열리는 세계유기농대회다. 경기도는 최대유기농단지인 팔당에 세계유기농대회를 유치했지만 유기농단지는 대부분 훼손되었고, 환경단체, 생협 등에서는 세계유기농대회에 불참하겠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자칫 반쪽자리 세계유기농대회를 치를 수도 있는 상황에서 경기도 측은 비공식적으로, 팔당 농민들에게 세계유기농대회에 협조한다면 행정대집행을 대회전까지 보류 내지 중단하겠다는 것과 현재준비중인 두물머리 대안 프로젝트에 협력하겠다는 제안을 해오고 있다.

“현재 세계유기농대회로 어느정도 시간을 벌게 되었습니다. 2심판결이 나고, 유기농대회가 끝나는 9월 말이면 이 두물머리도 어떤 식으로든 결판이 나겠지요. 가을까지만 잘 버틴다면, 4대강 사업 문제도 새로운 국면을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 "우린 그냥 농사지을래" 농민들은 이 소박한 소망마저 무참히 짓밟히는 경험을 통해 상처을 받곤 했다.(사진/한상봉 기자)

가장 힘들었던 일, 11농가중 7농가를 떠나보냈던 일
이제 농민들의 꿈은 나의 꿈, 농민들의 깊은 상처...나역시 아프다

처음 농민들의 요청과 신부들의 의지로 이곳에서 함께 싸움을 시작했지만 처음에는 농민과 신부들간의 거리감이 있었고 서로 깊이 이해하지 못해 관계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 사이에서 김 국장은 양쪽을 오가며 가교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다행히 동년배들이기도 했던 농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삶을 나눴다. 신부들에게는 그들의 애환을 먼저 돌봐주기를 당부했다. 그런 노력들로 지금은 누구보다 끈끈한 유대감과 신뢰감으로 뭉쳐있는 공동체를 이뤘다. 농민들은 이제 자신들이 버티는 이유를 ‘신부님들 덕분’이라고 고백한다.

▲ 김재욱 사무국장(사진/한상봉 기자)
김 국장은 그동안 여러 일을 겪으면서 가장 마음에 걸리는 일은 작년 11월경 남아있던 11농가 중 7농가를 떠나보낸 일이라고 기억한다.

당시 경기도측은 농민들에게 이전비용을 장기저리로 대출해주겠다며 회유했고, 경제적 어려움과 심적 고통을 겪던 농민들은 갈등을 겪었다. 그때까지 남았던 11농가는 동기간처럼 서로를 챙기면서, 어떤 식으로든 끝까지 함께하자고 결의했던 이들이었다. 그 약속이 깨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김 국장은 나중에 알았다고 했다.

“모든 농민들이 형님처럼 믿고 따르던 농민이 이별주를 마시자며 찾아왔어요. 이해할 수 있었지만, 끝내 좋지 않은 모습으로 떠나보냈죠. 지금 시간을 돌릴수만 있다면, 바로 그때로 되돌리고 싶습니다.”

애초 11개 농가만은 함께하자고 약속했고, 다수의 농가가 떠나기로 결정한 이상 모두 두물머리를 떠나기로 결정해야 했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4농가는 마지막에 결정을 번복하고 말았다. 끝내 포기할 수 없는 ‘삶의 가치’를 지키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경제적인 어려움, 농사일과 공동체에 대한 초심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하면서 누구도 쉽게 결정한 사람은 없었다. 서로의 상황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함께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떠나고 떠나보내야 했던 이들의 상처는 컸다.

“농민들의 상처가 가장 걱정됩니다. 공동체와 농사일에 대한 꿈을 갖고 살았는데, 지금 도무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모든 농민들이 두물머리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가졌습니다. 떠난 이들도 남은 이들도 서로에 대해 많이 걱정하고 어떻게든 도우려고 애를 쓰죠. 지금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이들의 내면에 깊이 난 상처를 치유하는 일입니다.”

김 국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하루도 쉬어본 적 없는 두물머리의 500여일 동안 정말 행복했다고 말한다. 앞으로의 삶과 영성에 대해서도 성찰하고, 농민들의 희망이나 꿈이 내것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도움을 주고자 들어왔지만 스스로 도움을 받고 있으며, 어떤 식으로든 이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라고 고백한다.

마지막으로 김 국장은 “두물머리 미사가 안착되고, 오랫동안 이어온 것은 농민과 이곳에 오는 신부님들, 내일처럼 두물머리를 걱정하는 많은 이들의 마음이 만났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두물머리의 결말이 어떻게 되든...농민들이, 함께 했던 이들이 너무 많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상처가 또 다른 희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라고 간곡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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