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떠나야 교회가 산다-19]

▲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종신허원자들을 위한 '영적 성장을 위한 예술치료' 피정에서 수도자들이 작업한 작품들.(사진/한상봉 기자)

개인적으로 나는 ‘표현예술심리치료’라는 공부에 심취한 바 있다. 예술치료는 음악, 미술, 무용, 시문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합적으로 활용하여 사람의 심리적 장애를 치유하고자 하는 활동이다. 이들 예술 매체들은 언어를 대신하거나 보완하는 기능을 한다. 우리는 때때로 ‘자기 속을 자기도 모르겠다’는 표현을 하곤 한다. 많은 경우에 적절한 고백이다.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나의 세계는 사실상 표피적인 실상의 작은 부분에 해당한다. 그리고 무엇인가 느낌이 오더라도 적절한 언어적 표현을 찾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예술매체는 우리도 발견하지 못했던 나를 자연스럽게 드러내 준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듯이, 특별한 자극과 심상 앞에서 우리의 맥박이 빨라지고, 몸은 제 맘대로 내적 흐름을 타고 흐를 수 있다.

특정한 소리에 민감해지거나 특정한 파동과 음악에 의해서 심리적 안정을 찾을 수 있다. 특별한 색채와 구성에 반응하고, 무의미한 낙서 안에서도 독특한 의미를 발견하는 게 사람이다. 그 사람과 그 사람이 지어낸 창조물(작품) 사이의 상호관계를 짚어보고 심리적 해법을 찾아가는 것이 예술치료이며, 예술은 그 창조적 작품활동을 통하여 그 자체로 치유성을 지닌다고 믿는다.

창조영성을 강조하는 매튜 폭스는 자신의 <원복>이라는 책에서 수없이 우주적 종교심의 회복을 촉구하고 있다. 그는 오토 랑크의 입을 빌어 말한다. “종교가 우주를 잃었을 때 사회는 신경증을 얻었고, 우리는 신경증 요법을 창안해야 했다.”

▲ 매튜 폭스의 , 한국신학자 황종렬 씨가 <원복>이란 제목으로 번역해 분도출판사에서 출간했다.
실제로 생태신학자 매튜 폭스는 <원복 Original bressing>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여러 심리학자들의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예전에 종교가 했던 역할을 그들이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심리학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옛부터 전승되어오던 인류의 종교성/종교심이다. 그 종교성/종교심은 수많은 현자들의 지혜를 통하여 발견된다. 심리학자들은 특정 종교의 교리에 얽매이지 않는다. 심리학을 과학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특정한 신념체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신념의 치유적 효용성을 경험적으로 검토한다.

종교가 인간의 심연에 자리 잡은 그 무엇에 대한 관심을 포기할 때, 종교는 어떤 상처 입은 영혼도 근본적으로 위로하지 못하며 치유하지 못한다. 그러한 교회는 이미 교회법과 교리를 통하여 ‘법치교회(法治敎會)’를 이루고, 인간을 구원하기보다 두려움에 떨게 함으로써 자신의 존립근거를 마련한다. 인간은 사라지고 안식일만 남아서, 성직자들은 수행자이며 치유자가 되기보다는 관료 또는 행정관의 몫을 맡는다.

하느님을 그리스도교, 좁게는 가톨릭교회의 일부 전통 안에 가두어 두려는 시도는 참으로 안타까운 노력이다. 실상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으면서도 뉴에이지 신영성운동은 교회가 잃어버린 전통의 한 부분을 복원하라는 촉구로 들린다. 그리스도의 왕직에만 매달리지 말고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라는 예언직과 우주적 하느님과 인간을 소통하는 돕는 사제직에 실제적으로 나서라고 말한다. 그러기 위하여 모든 사제와 그리스도인들은 하늘과 땅이 상통하는 빛의 통로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누구인지’ 물으며 참자기를 찾으려는 노력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 참사람(眞人)이 되고자 하는 열망은 일부 사이비 종교에서만 요청하는 게 아니다. 인류의 오랜 갈망이며,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것이다. 우리는 메모지에 적혀 있는 활자를 읽어주듯이 진리를 선포할 수 없다. 진리는 오로지 진리를 온전히 살려는 사람의 몸을 통하여 전달된다.

매사에 믿을 교리를 잣대로 들고 나오는 사람을 보면, 마치 화장터에서 타다 남은 유골을 수습하는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하느님은 살아 있는 사람의 하느님이지 죽은 이들에게 양도된 분이 아니다. 목자가 울타리를 세우느라 딴전을 피우는 동안 양떼들은 병들고 지친다. 목자는 울타리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양떼를 위해 존재한다.

한상봉/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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