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에서 마주친 교회-조현민]

동상이몽?

요즈음 필자는 수원교구 복음화국 산하 조사 분석팀에서 교구내 신자들에게 사도직 단체에 대한 의식과 필요성, 활성화 방안 등을 조사하기 위해 설문을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은 교구 신자들이 자신이 임해있는 단체에 대한 생각을 조사함으로 개인과 본당, 교구 더 나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얼마나 복음적인 소명을 다하고 있으며, 그러한 소임이 사회복음화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기틀을 마련하고자 함이다.

그런데 며칠 전 설문을 구성하기 위해 팀원이 회의를 하는 동안, 문구 하나 때문에 난처한 상황이 생겼다. 이는 다름 아닌 ‘민주적 절차’라는 용어 때문이다. 이는 사도직 단체의 활성화를 위해 필요한 조처를 묻는 질문인데, 단체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보기>에 ‘민주적 절차’라는 문구가 들어간 것이 적절치 않다는 의견이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좀 강하다는 생각이 드니 부드러운 어구가 좋겠다’는 의견이 피력되었다. 필자는 의아해 하면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이고, 이 내용이 본당에서 단체의 활성화에 필요한 요인’이기에 변경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지난 겨울 필자가 소속되어 있는 수원교구 보라동 본당에서는 주일학교 관련 신자들에 대한 워크숍을 진행하였는데, 여기에는 초 ․ 중고등부 주일학교 교사는 물론 자모회 신자들과 교육분과 위원까지 참여하여 주일학교와 청소년에 대한 이해에 대한 교육과 작은 피정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이 워크숍에서 필자는 청소년을 이해하는 것의 필요성은 물론 청소년을 교육함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민주적 시민으로 양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요지의 강의를 하였다. 추후 본당 사제인 김동훈(마르코) 신부는 청소년의 양성에 있어서 ‘민주적 자질’을 함양하는 것이 정말 필요하며, 이러한 과정에 우리 교사들도 준비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동의를 표명했다.

위 두 에피소드는 우리 교회가 있는 현 주소를 잘 보여주고 있다. 생각의 차이야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혹자는 ‘민주적’이라는 용어가 교회와 무관하지는 않지만 사회적인 또는 저항의 냄새가 나기에 가르침에 대한 순명을 강조하는 교회에서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혹자는 ‘민주’라는 말이야 말로 ‘사람이 주인인 세상’으로 하느님께서 맡기신 세상을 잘 관리하고, 사람을 존중하는 방법 중에 하나이며, 우리가 가져야 할 덕목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신자들은 어느 장단에 발을 맞춰야 하는가? 더욱이 교회의 가르침과 신자들의 생활 모습을 통해 성장하는 청소년은 어떤 가치에 따라 양성되어야 하는가?

교회는 이를 '공동선'(교황 요한 23세, <어머니와 교사> 65-67, 79-81, 117, 147, 148항; <지상의 평화> 5, 35, 39- 49, 57, 68, 81-82항; <사목 헌장> 74항; 교황 바오로 6세, <행동에의 부름> 46항)’이라는 용어를 통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를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모든 인간들과 거기에 참여하는 단체들은 모든 이들의 공동선을 위하여 해당된 공헌을 할 의무가 있다.’고 한다.(교황 요한 23세, <지상의 평화> 39항)

‘모든 이들의 공동선을 위해 공헌’ 민주(民主)

‘모든 이들의 공동선을 위해 공헌’한다는 것은 모든 인간과 환경은 하느님의 피조물로 모두에게 공통으로 필요한 바를 추구해야 함을 의미한다. 어느 특정 계층, 특정 지역, 특정 계파에 의해 공동체가 운영되거나, 일부 힘없는 소수의 사람들이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더욱이 공동체를 운영함에 있어서 발생하는 각종 의견의 차이는 모두에게 선(善)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원칙만 지킨다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렇지만, 의견의 합의 과정에서 때로는 감정적 치우침이나, 몇 몇 사람들의 과도한 충성심이 일부 소수를 배제할 때가 많다.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공동체가 져야 할 몫이다. 마음에 상처를 받은 공동체원, 피해 의식의 증폭, 분열이라는 단어는 이에 걸맞는 용어이자 후속 단어는 누가 뭐래도 ‘냉담’일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지 않고 내가 성당에 안 나가겠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으랴!!! 그러나 과연 이러한 원인과 결과가 공동체가 추구하는 복음화라고 할 수 있는가? 이는 하느님 사랑의 증거에도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실천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도 아니다.

민(民)이 주인인 공동체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필요한가? 교황 요한 23세는 <지상의 평화> 39항에서 ‘자기의 권익을 타인들의 필요물과 조화’시키라고 주장하며, 이러한 목적으로 ‘자신의 재물과 봉사의 제공’이 ‘공동체의 정의의 규준에 의해 정당한 형식과 권한 내에서 제정한 대로’ 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사실 공동체의 목적과 실천 사항들은 거의 대부분 공동체 전체에게 의로운 일들을 구사하고 있고, 이에 반기를 드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공동체의 원칙을 준수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 공동체를 위한 실천 규범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상처를 받는 신자들, 냉담하는 신자들이 생기는 이유는 원칙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민주(民主)는 민(民)이 주인(主人)인 공동체다. 공동체의 성원이 주인인 공동체, 교회의 신자들이 주인인 교회, 학생이 주인인 주일학교는 모든 이들이 동의하고, 공감하는 바다. 물론 그 추구하는 목적이 어떠하냐에 따라 주인의 역할이 달라지는 것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최소한 내부 규약, 또는 공동체의 설립 취지와 그에 동의하고 주인이기를 인정한 사람들에 대한 예의는 그들의 의견을 소중히 여기고, 반영될 수 있도록 한 번 더 숙고해야 한다. 

소외된 사람들이 임파워먼트할 수 있도록 협조하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

따라서 교회 공동체의 존속과 하느님 사랑의 실천, 이웃에 대한 사랑의 발현은 작은 의견, 소수의 의견, 소외된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고, 이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부터 찾으려는 노력에서 시작할 것이다. 최근 불거져 나오는 교회의 대형화나 중산층으로의 교회 표방은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간 암 하아레츠(민중)와 소외시키는 일이다. 예수는 억눌린 사람들, 최소한의 자원(인적, 물적)조차도 접근이 어려운 사람들을 향한 연민의 마음, 이들을 향한 애뜻한 마음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인 우리도 그래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우리는 자원에 접근이 쉬운 사람,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의 비유를 맞추는 일이 아닌 대물림되는 가난 때문에 자식을 제대로 돌볼 기회, 부모를 제대로 공양할 기회, 사회에서 인정받을 기회, 교회에서 위안 받을 기회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 편에서 기도하고, 봉사하며, 이들이 그러한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협조(임파워먼트)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교회의 가르침인 공동선이며, 민주(民主)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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