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떠나야 교회가 산다-16]

자동차 운행 중 라디오를 틀었다. 기독교방송(CBS)이었는데, 아마도 사연과 함께 찬송가를 신청하는 프로그램이었던 모양이다. 때마침 신청곡을 넣은 여인은 결혼 20주년을 맞이하여 남편에게 노래를 선사한다고 했다. 전화 인터뷰에서 그녀는 “직장과 교회와 가정밖에 모르고 살아 온 남편에게 감사드린다”고 했다.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그녀의 남편이 ‘생계를 위한 직장과 영혼을 위한 교회와 처자식만을 위해 존재해왔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신앙은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짐작컨대 그녀의 남편은 직장을 다니되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았을 것이고, 교회를 다니되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에게 인색하거나 무관심했을 것이고,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도 오직 가정의 안전과 평안함만을 바랬을 지도 모른다. 짐작컨대 가정의 안위가 세상의 안녕보다 소중했을 것이고, 우주는 가정과 자신이 다니는 교회를 중심으로 회전했을 것이다. 이를 두고 ‘나쁘다’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부족하다’라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 이르지 않았는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다고, 그리스도인은 자못 원수마저 사랑해야 한다고. 어려운 말이지만 이 말을 두고 적어도 고민할 수 있는 사람은 복되다,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진행자가 물었다. “집사님은 어느 교회를 섬기고 계십니까?” “DD교회를 섬깁니다.” … 그제야 나는 알았다. 그 사람들이 바로 ‘교회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들은 예수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아마도 원수처럼 여기며 예수와 전혀 다르게 용서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을 불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깨달음을 얻으려고 걷는 길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이 식대로 한다면 교회는 마땅히 교회를 죽여야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선 교회 그 이상이며, 교회 그 너머에 있으며, 교회란 딱지가 앉지 않은 자리에도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를 섬기고, 교회는 세상을 섬기고, 세상은 이미 그 권세를 맘몬(재물신)이라는 악마에게 넘겨주었다.

언젠가 김정란 교수는 <예수도 당대에 국가보안법의 희생자>라는 글에서 분명한 개념으로 양과 염소를 갈라놓았다. 교회쟁이와 예수쟁이다. 조직을 섬기는 자는 교회쟁이요, 인격을 섬기는 이는 예수쟁이라고 풀이된다. 교회쟁이는 만인을 교회로 끌어 모으려고 광분한다. 그야말로 인해전술(人海戰術)을 맹신하는 것이다. 과거에 대통령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이 추종자들을 동원하여 여의도로 집결시키듯이, 종교 역시 세(勢)를 과시함으로써 ‘진리의 소유권’을 주장한다. 그들에게 조직은 힘이고, 힘이 곧 진리다. 로마제국과 아메리카제국이 즐기는 스타일이다. 이는 힘의 종교이며, 예수와 무관하다.

이쯤에서 가톨릭교회 역시 그네들과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해 두고 지나가야겠다. 특히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전 세계를 순방하면서 광장으로 온 나라의 가톨릭신자들을 동원하여 그 세력을 과시하는 데 게으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전에 히틀러도 광장을 좋아했고, 마오쩌뚱도 광장을 좋아했다. 마오쩌뚱의 시신은 아예 천안문 광장에 비치되어 관광객들과 추종자들에게 전시되고 있다. 다행히도 요즘 가톨릭교회가 개신교처럼 정기적으로 때마다 여의도 광장(요즘은 시청앞 광장)을 빌려 쓰지 않는 게 고마울 지경이다. 종교는 기실 상품이 아니고, 대단한 선전탑과 광고물을 통하여 복음이 증거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는 무력한 자들을 위해서 무력한 채로 죽음을 당했다. 예수는 진리를 보증하기 위해 ‘힘’을 요구하지 않았고, 제 몫으로 막강한 세력을 키우지도 않았다. 그의 제자들은 열 두어 명이라고 했고, 그의 추종자들은 대개 가난한 이들과 여성들이었다. 권세 있다는 자들의 생리에 도무지 이해가 맞아떨어지지 않는 존재가 예수라는 인격이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다고 전한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천사들이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받쳐 줄 것이다. 수없이 기적을 요구했던 바리사이들과 군중들에게 도리질을 하셨던 예수처럼, 예수는 자신의 권능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진리를 증거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철저히 ‘인간’ 안에 머물렀다. 그리고 어쩜 고스란히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는 재판정에서 호들갑을 떨지 않았고, 고난 속에서 하느님을 증거하였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라고 믿고, 그의 운명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 곧 ‘예수쟁이’다. 과연, 우리는 교회쟁이인가? 예수쟁이인가? 아니 무엇이 되려고 하는가?

한상봉/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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