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모 신부, 희수 축하 및 <내 글보고 내가 웃는다> 출판기념회
기념강연에서 빌렘 신부와 안중근 소개, 고위성직자의 처신 문제 삼아

정양모 신부의 최근 저작 <내 글보고 내가 웃는다>의 출판기념회 및 희수 축하연이 다석학회 주관으로 지난 6월 14일 오후 2시에 서울 방배동 천주교회에서 열렸다.

미사봉헌에 이어진 기념강연에서 정양모 신부(77세)는 안중근과 관련이 깊은 빌렘(홍석구) 신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면서, 한국교회와 고위성직자들의 문제를 아울러 지적했다.

▲ 교황청으로부터 제재를 받은 아픈 상처를 지니고 있는 정양모 신부가 안중근에게 성사를 주고 교구장으로부터 성무집행정지 처분을 받았던 빌렘 신부의 사례를 들 때 심경은 참 쓸쓸했을까. 그래도 따뜻하게 저며오는 동병상련이 있었을 것이다. 빌렘 신부는 본국으로 송환된 뒤에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로 파리에 온 김규식이 독립 탄원서를 제출하고, 각국 대표들에게 일제의 침략상과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당위성을 홍보할 때 통역 일을 돕고 뒤를 봐주었다. (사진/한상봉 기자)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황해도 지역의 전교를 책임 맡았던 빌렘 신부는 본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알자스 로렌 지방 출신으로 독일 혈통이었다. 알자스 로렌이 프랑스로 편입되면서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한 빌렘 신부는 프랑스 사람들 일색인 전교회 안에서 늘 ‘개밥의 도토리’처럼 취급받았다고 한다.

안중근이 복사로 빌렘 신부를 따라서 전도활동을 오래 했는데, 이런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서양에는 대학이 있다더라.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프랑스와 독일사회를 이끌어 나간다더라. 유럽은 천주교 수도원이 수백 개나 되는데, 공부 많이 한 수도자들을 우리나라에 교수로 모셔 대학을 만들자. 여기서 배출된 사람들이 이 나라를 이끌게 하자.” 그래서 빌렘 신부와 안중근이 명동성당으로 교구장이던 뮈텔 대주교를 찾아가 “중등교육도 필요하지만, 대학을 세우자”고 간곡히 진언했다고 전했다.

그런데 뮈텔 대주교는 아주 언짢아 하면서 “다시는 그런 진언을 하지 말아라. 한국인이 학문이 있게 되면 천주교 믿는 일에 좋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그런 이야기 하지 말라”고 개학 설립을 거절했다고 한다. 정양모 신부는 이런 반지성적 풍토가 오늘날 한국교회 역시 망가뜨리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바로크 시대까지만 해도 유럽은 대부분이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 신자였다. 그런데 1800년~1900년까지 유럽 천주교회가 지성인들을 잃고 예술인들을 잃었다. 지금까지도 지성인 가운데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드물다. 예술인 가운데는 신앙생활을 하는 이가 더더구나 없다. 1900년~2000년 사이에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예술가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주일에 미사참례 하는 사람을 찾아보니까 딱 두 사람밖에 내 눈엔 띄지 않았다. 조루즈 루오. 알프레드 바르시에. 그 외에는 세례는 천주교회에서 받고, 첫영성체도 하고, 간혹 견진성사도 받지만 그후론 죽을 때까지 성당 안 다니는 게 불문율이다. 죽을 때 99퍼센트가 장례미사를 드리는데, 일생에 세 번 성당 가는 사람 수두룩하다.

프랑스 사람들은 1960년대만 해도 20퍼센트는 성당에 다녔는데, 요즘은 5퍼센트도 안 되는 것 같다. 남자들은 도통 안 나오고, 어린이와 젊은 여성과 아주머니들도 없고, 90세를 바라보는 할머니들만 성당에 찾아온다. 그러니 ‘할머니 천주교회’가 되버린 것이다. 이미 1800년~1900년대에 유럽교회가 많이 쇠퇴하였지만, 이제는 재기불능일 정도로 유럽이 신앙과 담을 쌓고 있는 실정이다. 뜻있는 신도들은 ‘왜 천주교가 이렇게도 인기를 잃었느냐?’고 묻고 원인규명을 하려고 노력했으며, ‘어떻게 다시 매력을 발산할 수 있겠는가?’ 진단과 처방을 찾아보았지만 진단과 처방이 다 되지를 않고 있다. 유럽교회는 거의 망해간다고 봐야 한다.

한국천주교회는 전체신자 500만 가운데 대략 25퍼센트가 성당에 나오고 3/4은 냉담상태라고 하지만, 1/4만 나와도, 주일에 이 성당만 해도 몇 차례 미사가 꽉꽉 차니까 위기의식을 안 느낀다. 하지만 지구는 한 촌이라, 유럽교회의 위기가 한 세대가 가기 전에 우리나라에도 닥칠 것이다. 내가 예언자 아니지만 내 눈에는 보인다”

아마 뮈텔 대주교도 “학문을 하면, 유럽을 봐라. 배운 사람 성당 안 나온다. 한국에 천주교 대학을 세워서 지성인을 양성하면 전교에 큰 손해 볼 것”이리고 본 모양이라고 정 신부는 설명했다. 즉, 당시 한국교회가 철저하게 우민화정책을 썼다는 것이다. 반면에 개신교는 배재학당, 이화학당, 연희전문 등을 세우는 등 태도가 달랐다고 소개했다.

한편 빌렘 신부와 관련해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여순 감옥에 있으면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이야기를 꺼냈다. 안중근은 1910년 2월 7일에 재판을 시작해 불과 1주일 만에 사형을 언도받았는데, 다급해진 가족들이 종부성사를 베풀어 줄 사제를 뮈텔 주교에게 청했다. 그런데 뮈텔 대주교는 빌렘신부 뿐 아니라 모든 신부들에게 지시를 내려 안중근한테 어느 신부도 가서는 안 된다고 지시했다. 어기면 성무집행정지 처분을 내린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일본당국을 허락을 얻어 청했는데도 뮈텔 대주교는 “천황의 은혜에 무한히 감사하오나 회개할 줄 모르는 사형수에게 사제를 보낼 수 없음”이라고 답변했다. 이토를 죽인 살인죄에 대해 안중근이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중근은 독립군 소속으로 전투상황이었음을 강조했다. 개인적인 원한으로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발생한 일이니 뉘우칠 게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니 뮈텔 대주교는 “회개하지 않는 살인마에게 어떤 신부도 가서는 안 된다”고 고집했다.

그러나 빌렘 신부는 사형수의 마지막 소원을 거절할 수 없었고, 황해도에서 복사로 일하던 이를 내버려둘 수가 없어 여순으로 달려가 안중근을 만났다. 이를 두고 뮈텔 대주교가 노발대발해 성무집행정지 처분을 내렸는데, 이는 황해도 지역 교우들이 두 달 동안 미사참례를 못 해도 좋다는 것이다. 얼마 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80여 명의 사제들이 합동 피정을 하는 중에 빌렘 신부는 동료 사제들에게 이해를 구했으나, 아무에게도 동조받지 못했다고 한다. “전부 대주교 편이었다.” 결국 빌렘 신부는 우리나라에서 살기가 거북해지고 뮈텔 대주교 명령으로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 사안은 결국 빌렘 신부가 로마에 재판을 청해 승소했지만, 파리에 머물지 못하고 알자스 로렌으로 돌아가 본당사제로 살았다.

▲ 정양모 신부는 미사를 통해 참석한 이들과 은인들에게 감사를 드렸다. (사진/한상봉 기자)

이날 미사와 기념강연을 간략히 마치고 출판기념회 및 희수 축하연이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다석 류영모- 우리말과 우리글로 철학한 큰 사상가>와 <다석 유영모 어록>을 집필한 박영호 선생은 '우리의 얼벗(靈友) 정양모'라는 축사를 지어 낭송했다. 

삶이란 무턱대고 오래 살자는 게 아니라
오래 못 살아도 예수처럼 깊게 살아야 해
제나 죽은 맘에서 얼이 생수로 솟아나오면
깊으면서 높게 살아 참되고 온전한 삶
벗 많아 나쁠 게 없으나 얼나 깨달은 얼벗을
예수는 따르는 이들을 벗이라고 한 얼벗이라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영성의 예수를 만나
스스로 얼나를 깨달음에 이르러 제 소리 하자
교우들로부터 오해도 받고 시샘도 받았어라

공자는 글로 벗을 만나고 벗으로 인(仁)을 돋우다
옛 길벗을 생각하며 통곡한 사람이 김성탄
길벗을 한 사람도 못 만나고 감을 애통한 류영모
내 속알을 알아주는 길벗을 만나기도 어렵고
얼벗을 만나기란 만대 사이도 아침 저녁이라
얼나로 솟난 붓다라야 붓다를 알아준단 옛말
얼나로 솟난 얼벗을 그리는 한결같은 맘에
얼나로 궤뚫은 다석일지 연구에 늙음 잊었네

그밖에 정양모 신부의 제자인 유충희 신부와 박태식 신부, 최혜영 수녀 등이 참석했으며, 다석학회의 씨알들도 참석해 정양모 신부의 희수를 축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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