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이명박 대통령이나 이건희 재벌회장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수가 되었다 할 때도 정추기경님께 기도와 도움을 간청한다면 역시 거절하시겠습니까?”

방상복 신부가 재직하고 있는 유무상통 마을에 있는 예수상은 양 손발에 박혀 있던 못을 뽑아 손에 쥐고 있는 형상이다. 고통받는 예수를 편안히 모시고픈 마음에서라는데, 사제란 모든 고통받는 이들의 벗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 듯하다.

9월 8일 오전 10시 30분경에 수원교구의 방상복 신부가 정진석 추기경(서울대교구장)에게 답변을 요구하는 질의서를 서울대교구 <굿뉴스> 게시판에 올렸다. 방상복 신부는 지난 9월 1일 공개된 서울대교구 정의구현사제단 원로사제 4명이 정진석 추기경을 면담하여 나눈 속기록을 읽고, “밤잠을 설치며 마음이 아려서” 이 글을 게시판에 올리게 되었다고 <지금여기>에 밝혔다. 방신부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추기경의 답변을 기다리며 당일부터 6일 동안 단식을 하겠다고 밝히고 있는데, 마찬가지로 자신도 “비목자적인 신부이기에 참회단식이 더욱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못난이 방상복 신부가 존경하올 정진석 추기경님께 문안인사 올리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드립니다.>라는 제목으로 올린 이 질문서에서는, 광주항쟁 당시 사형선고를 받은 김대중 대통령과 가족이 청한 봉성체를 거절한 사실에 대한 해명을 듣고자 하는 것이다.

1. 만일 추기경님의 수하에 있는 신부가 어느 사형수의 간절한 봉성체 요청을 거절하였다면 어떠한 처벌을 내리시겠습니까? 아니면 잘한 일이라고 하시겠습니까?

2. 청와대에서 초청되어 식사를 나누실 때, 과거의 그 간청을 거절하신 비목자적 행위에 대해 늦게나마 사과를 하셨는지요? 아니면 지금이라도 사과하실 용의가 있으신지요?

3. 안중근 토마스 의사에 대한 홍신부의 목자적 방문과 종부(병자)성사 집전을, 당시 서울교구장이신 뮤텔 대주교님께서 살인자니 운운하며 반대하였고 홍신부를 처벌까지 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견해를 말씀해 주십시오.

4. 순수 가정입니다만, 앞으로도 만일 이명박 대통령이나 이건희 재벌회장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수가 되었다 할 때 -억울하게든 아니든 간에- 그 사형수가 정추기경님께 기도와 도움을 간청한다면 역시 거절하시겠습니까?

이미 <지금여기> 독자게시판에 올라와 있듯이, 지난 9월 1일 순교자성월 첫날에 함세웅 신부(기쁨희망사목연구원 원장, 청구성당 주임)가 지난 7월에 서울 교구장 정진석 추기경과의 면담했던 내용을 공개하였다. 함신부의 발표에 따르면, 서울교구의 원로사제에 해당하는 김택암, 안충석, 양홍, 함세웅 신부가 7월 31일 오후 3시 35분부터 약 2시간에 걸쳐 서울대교구 교구장 집무실에서 정진석 추기경과 면담을 하였다.

김택암 신부 등 4명의 사제들은, 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대한 서울대교구 주교들의 부정적 시각과 편견에 대하여 고심하던 중, 인천교구의 김병상, 황상근 신부 등과 의견을 나누어 우선 서울교구의 사제들만이라도 서울대교구장인 정진석 추기경을 면담하기로 했다. 교구장 면담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제들의 1차적 사명이 무엇보다도 예수님과 같이 하늘나라에 대한 ‘증거와 선포’ 그리고 세상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 있음을 확인하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삶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역사적 과정을 통해 일깨우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시대를 고민하고 예언자적 소명을 다하는 것이 바로 선교의 핵심

함신부가 발표한 <면담 1차 초록>에 따르면, 김택암 신부는 “30여년 이상의 사제단 역사를 살펴보면 그런대로 괜찮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면서 사제단에 대한 사회학자들의 평가도 대체로 긍정적이고, “사제단은 교구의 벽과 한계를 뛰어넘은 전국사제모임으로 세계적으로도 유일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교회공동체 선교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정진석 추기경은 “글쎄……. 평가야 뭐 세월이 더 지나가야지, 아직은 좀 이르다고 생각한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한편 김택암 신부는 교회 안에서 사제단에 대해서 말이 많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도둑도, 집안도둑이 더욱 씁쓸하다” 심경을 밝혔다. 그러자 정추기경은 사무처로 전화가 빗발치게 온다는 이야기를 하며, 자신은 비서실을 통해 그런 소리를 들을 뿐이라고 말했다.

한편 안충석 신부는 “우리 사회현실 구조는 10- 20%의 부유층, 80-90%의 대다수 서민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불행하게도 우리 교회공동체의 관심은 부유층에 더 향하고 있지 않나 반성하면서 선교2020이 실현되기 위해서라도 이 점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고 추기경에게 역설했다.(“선교2020”은 서울교구장의 선교목표로 2020년에는 우리 신자가 국민인구 대비 20% 증가하도록 노력하자는 표어.) 또한 그동안 교세는 늘었지만 한편으로는 “신자 감소문제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하면서 “시대를 고민하고 예언자적 소명을 다하는 것이 바로 선교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사제단은 “현실 안에서 반대 받는 표징으로 존재”했다고 하면서 “교구장이 이 점을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안신부는 예수께서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상기시키며 사제단이 “교회에 해를 끼치거나 반대한 적은 더구나 없었”으며 “다만 백성들의 요구, 시대의 요구에 그때그때마다 성실하게 응답해 왔을 뿐”이었다고 말했다.

함세웅 신부(사진출처-오마이뉴스)


하느님 안에서 선입견, 편견, 거부, 배제적 생각 떨쳐버려야

이어서 말을 이은 함세웅 신부는 “오늘 이 자리는 교구장과 교구사제들의 만남의 자리”이지만 “우리는 하느님 앞에 모두 한 형제들이며 또한 부족한 죄인들이기도 하다”면서 “신앙인으로서 이러한 기본적 평등성을 확인하고 죄성을 고백하면서 대화에 임한다”고 밝혔다. 함신부는 “각자의 역할과 은총, 그리고 행동이 서로 작용하여 선한 열매를 맺는다는 로마서 8,28을 새롭게 묵상”한다고 말한 뒤에, “오늘 이 자리는 이제까지의 모든 선입견, 편견, 거부, 배제적 생각을 떨쳐버리고 상대방의 좋은 뜻을 하느님 안에서 확인”하길 소망했다.

이 자리에서 함신부는 "선교의 핵심은 하느님 나라와 정의실현"이며, 예수님께 귀의한 자로서 우리는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가식을 예수께서 질타하셨다는 것을 묵상하고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세례의 원리를 살피면서 “세례란 누구나 하느님의 이름으로 베풀 수 있는 사람이 지닌 보편적 특권”이며, 이것이 “바로 교계제도, 제도교회를 넘어서는 하느님 섭리의 손길임을 깨달았다”고 말한 뒤에, 온갖 형태의 독점과 독선을 배제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를 죽이고 이웃을 위해 새로 태어나는 은총의 성사, 부활의 성사인 “세례의 정신에 따라서 살아온 사제단을 교구장이 껴안을 때 명실공이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 일치 안에서의 다양성이 확인되며 교회공동체가 더욱 아름답게 번영할 수 있다”고 제언하였다.

주교회의가 늘 방해와 걸림돌이 되어

함신부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모형으로 삼아, 80년대에는 개신교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가 구성되었고 이어 실천불교전국승가회 그리고 90년대에는 원불교사회개벽교무단이 설립”되었는데, 불교와 원불교에서는 교단 차원에서 이러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끄럽게도 한국 현대사의 큰 역할을 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대해 천주교 주교회의는 늘 견제하고 방해하고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유감을 표명했다. “도와주고 격려하지는 못할망정 끌어 잡아당기고 길을 가로막고 방해”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함신부는 선교를 위해서라도 사제단을 품고 껴안아 주기를 정진석 추기경에게 요청하였다.

이 자리에서 함세웅 신부는 추기경에게 평소 하기 어려운 말을 꺼내었다. 김대중(토마스모어)씨가 대통령이 되어 어느 날 정추기경을 청와대에 초청하여 함께 식사를 나누신 적이 있었는데, 김대중씨 비서진과 자녀들이 해준 이야기에 따르면, 1980년 광주항쟁으로 김대중씨가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언도받고 청주교도소에 수감 중이었을 때, 1981년 초 김대중씨의 가족들이 당시 청주교구장으로 정진석 주교를 찾아가 여러차례 김대중씨의 봉성체를 청했지만 끝내 거절했다는 것이다. 전두환 신군부의 압력도 있었겠지만 교회지도자의 이런 태도 때문에 그 가족들은 “그러한 교회와 사목자에 대해 늘 깊은 회의와 불신이 남아있다”고 고백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함세웅 신부는 “사형수가 청한 봉성체를 어떻게 사제가 거절할 수 있는가 고민했다”고 전하자, 정추기경은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

함세웅 신부는 이 <면담초록>에 따르면, 이번 교구장과의 면담은 지난 2개월 전에 전종훈 신부에 대한 인사발령 조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동료사제들과 의논하여 그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추기경에게 면담을 청한 것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면담이 있은 지 얼마 후 8월 22일에 서울대교구에서는 전종훈 신부를 안식년 조치를 취했다.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사제단에 대한 보복조치‘라고 평가하였는데, 정의구현사제단 원로사제들의 면담이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지만 “보다 건강한 교회문화 형성과 선교에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고 함신부는 말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한상봉 2008-09-08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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