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떠나야 교회가 산다-14]

“뉴에이지 운동은 영적 지도자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의 욕구에 부응하여 빠른 시간 안에 영적 스승을 제공하고 질문에 답을 제공해 주는 데 반해, 가톨릭은 이들의 영적 갈망을 제대로 이끌어줄 인력을 충분히 갖고 있지 못한다.(바티칸리포트-7)”

바티칸리포트에서 지적한 것들 가운데 가장 타당성이 높은 항목이다. 사실상 뉴에이지 그룹은 다양한 층위의 영적 리더십을 지니고 있다. 뉴에이지 운동 자체가 영성운동이고 보니, 모든 프로그램에는 단계가 있고, 그 단계를 거칠 때마다 일종의 자격을 주기도 하고, 그들은 그 나름대로 영적 리더십을 다른 사람들에게 발휘한다.

아시아식으로, 한 스승 밑에서 여러 제자들이 수행하면서 따르고, 그 제자들은 각지에서 나름대로 영적 리더십을 행한다. 그들은 대개 명시적인 조직이 따로 없으며, 끊임없는 양성(養成) 자체가 목적이다. 즉, 자기혁명을 성취한 개인들이 다양한 수준에서 또 다른 양성과정을 실행하며, 양성된 사람들은 흩어져서 또 다른 이들을 양성함으로써 전파되는 운동이다.

▲ 지금 도인들은 거리에서, 교회도 없이, 빈손인 채로 가난한 이들이 울부짖는 현장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고 있다. (사진/한상봉 기자)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영성운동이라기보다 조직운동에 가깝다. 세례를 통하여 입문하면, 교적이 만들어지고 사목적으로 관리된다. 이들이 공식적으로 양성되는 기회는 사순절이나 대림절 특강 정도다. 그저 남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듣고 반성하라는 투다.

열성이 있는 사람은 교회에서 마련하는 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하지만, 대개 성서공부 등 지식적인 것이고, 교리 자체가 틀에 박힌 것이라서 성령의 자유로운 바람이 그들의 영을 불러일으킬 기회가 별로 없다. 그나마 영적이라는 성령운동세미나 등은 개별적으로 충분히 숙고하고 성찰하고 자가 진단하는 과정이 없이 군중심리에 의존하는 일회성 흥분상태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가톨릭교회에서 다양한 영적 리더십이 창출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영적 스승이 되어야 하는 사제들은 그들조차 신학생 때부터 영성훈련보다는 사목훈련에 절대시간을 할애하면서 양성된 사람들이 태반이다.

한국교회에서 사제는 영적 스승이 아니라 조직활동가이거나 행정관리로서의 자질이 높은 편이다. 이는 일선 사목이 대개 교구소속 사제들에게 맡겨져 있다는 데에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수도 전통 속에서 영적 훈련이 그나마 되어 있는 사람들은 수도원이나 피정센타에 유폐되어 있다. 그들은 결코 동네 슈퍼에 앉아서 오렌지주스 한 모금 나누며 일상적으로 영적 상담에 응할 수 없는 조건이다. 그들은 대부분의 신자들에게 심리적으로 너무 먼 거리에 있다. 그리고 그 숫자도 적을뿐더러, 세상에서 겪어야 할 고단한 일상을 얼마나 이해하고 영적 상담에 응할 지도 잘 모르겠다.

내가 그동안 살면서 만난 영적 스승이랄 수 있는 사람들은 수도원 안에 있지 않았다. 성당 안에 붙박혀 있던 사제도 없었다. 그들은 빈민촌에서 노동현장에서 길거리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고단한 일상을 피부로 느끼며 자신의 영적 삶을 성찰해 왔던 분들이었다.

그들은 사제였지만, 그들이 수단을 입는 시간은 미사 때뿐이었다. 거리에 나서면 친구가 되어 주었고, 나보다 더 겸손하고 나보다 더 착했다. 나보다 더 단호했으며, 때로는 나보다 더 가난하였다. 그녀는 수녀였지만 허물이 없었고, 같이 웃고 떠들고 술도 한 잔 마시고, 옛날엔 최루탄 냄새도 함께 맡았다.

예전에 어느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지금은 도인(道人)들이 산에서 다들 마을로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너무 망가졌고, 이젠 세상이 바뀔 ‘때’가 왔다는 것이다.

도 닦던 도인들이 세상을 구제하려고 하산한다는 소문이 마치 사실이기라도 한듯이, ‘너무도 세속적인’ 세상에서 뜬금없이 마음공부 한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웰빙 붐이 일고, 뉴에이지 운동이 창궐하고, ‘영성’이란 말이 대중화되었다.

무탈하게 살던 샐러리맨이 어느 날 갑자기 산에 들어가고, 그리스도교는 교세가 감소하는데, 불교가 심정적이나마 연일 상승세를 치고 있다. 뭔가 이변(異變)이 있기는 있을 모양이다.

세속에 속한 사제와 신자들이 영성에 관심을 갖고, 성소(聖所)에 속한 수도자들이 마을로 내려올 때, 그리스도교 역시 이 흐름 속에서 자기 역할/사명을 이룰 것이다.

한상봉/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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