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함세웅 신부,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원장

1974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 이후에 민주화운동에 참여해 왔으며, ‘3.1 명동민주구국선언’ 사건에 연루되어 동료 사제들과 더불어 감옥에 갇히기도 했던 서울대교구 원로사제 함세웅 신부(청구동 천주교회)가 최근에 <심장에 남는 사람들>(빛두레)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했다.

작년까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역임했던 함세웅 신부는 자신이 소장으로 있는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에서 사제들과 신자들을 위해 펴내고 있는 격월간지 <선포와 봉사> 창간호부터 지난 11년간 써온 글 가운데 골라서 책을 엮었다. 이 책에서 함 신부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만났던 김승훈 신부와 정경모 씨 등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과 더불어 시대와 교회에 대한 복음적 성찰을 담아내고 있다.

이 책을 발간한 기념으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는 지난 6월 12일 성령강림대축일에 함세웅 신부를 청구동 천주교회에서 만나 요즘 한국천주교회에 대한 관심사에 대해 소감을 들어보았다.

한 손에 성경, 다른 손에 신문을 들고 '선포와 봉사'

한상봉: <심장에 남는 사람들>이라는 책 제목 자체가 의미심장한데, 이 책에서 일관하여 드러내고 싶었던 키워드에 해당하는 생각이 무엇인가요?

▲ <심장에 남는 사람들>, 함세웅, 빛두레, 2011
함세웅 신부: 올해가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15주년이 되는 해라서, 뭔가 독자들에게 선물로 줄 게 없을까, 고민하다가 책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말은 요엘 예언서 2장 13절에 나오는 “옷이 아니라 너희의 심장을 찢어라”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사순절 첫날인 재의 수요일에 읽는 1독서 내용이지요,

이 글을 묵상하면서 오래전부터 깊이 깨우치는 바가 있었습니다. 인체에서 가장 중요한 게 심장이잖아요. 심장이 멈추면 사람이 죽잖아요. 리지외의 소화 데레사가 갈멜수도원의 핵심을 ‘교회의 심장’이라고 말했는데, 바로 기도하는 갈멜의 영성이 그것이라고 느꼈던 것입니다. 본래 갈멜의 영성에 없던 개념이었는데, 이젠 이 ‘심장’이란 말이 갈멜영성을 잘 드러내 주는 게 되었어요. 여기서 “심장을 찢어라”하는 말은 죽음을 무릎 쓴 결단을 내리라는 뜻입니다. 순교자적 결단이죠. 그런데 과거 유대인들은 옷만 찢었지 심장을 찢지 못한 걸 요엘 예언자가 지적하신 것이죠. 이처럼 저는 회개란 심장을 지는 것이구나, 느끼고 인간의 본질, 그 내면을 송두리째 바꾸는 방법에 대해 묵상하면서 이 글을 썼습니다.

두 번째는, 저희가 발간하는 <선포와 봉사>라는 잡지 제목에 드러나 있는데, 우리에게는 하느님나라에 대한 ‘선포’와 인간에 대한 ‘봉사’ 모두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독일에는 <선포Kerigma>라는 잡지와 <봉사 Diakonia>라는 잡지가 있는데, 그 둘을 묶어서 선포와 봉사를 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케리그마는 예수의 가르침을, 하느님나라를 선포하는 것이고, 교회 공동체의 일차적 덕목은 봉사라고 생각합니다. 미사 자체도 봉사의 의미가 있죠.

그래서 <선포와 봉사>라는 강론자료를 만들어 먼저 사제들에게 보급하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제들이 미사 중에 독서와 복음을 잘 읽고 묵상해서 세상을 변혁시키고, 하느님나라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돕자는 생각이었죠. 처음에는 심용섭 신부와 제가 주로 글을 썼는데, 몇 해 전부터는 폐간된 <사목>지를 만들던 신부님들을 다시 모셔서, 그분들이 주로 기획하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포와 봉사>가 나갈 때마다 제가 편지 형식으로 서문을 써왔던 것이지요.

글을 쓰면서 염두에 두었던 것이 있습니다. 문익환 목사님과 박순경 교수에게 암시받은 것이 있는데, 개신교 신학자였던 칼 바르트 이야기입니다. 언젠가 제자들이 칼 바르트에게 “스승님, 어떻게 하면 설교를 잘 준비할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대 바르트는 조금 멈칫하더니, “나는 한 손에 성경을 들고 다른 한 손에 신문을 들고, 둘을 번갈아 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따라 살아야 할 삶의 원리와 방향을 알려주고, 신문은 우리의 현실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성경(이상)과 신문(현실) 사이에는 모순이 있지요. 죄와 갈등이 끼어 있는데, 성경을 통해 신문의 현실을 바꾸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이 둘을 번갈아 보면서 설교를 준비합니다”라고 말했다는군요.

우리가 주일에 성경 말씀만 들으면 자칫 공허한 관념이 될 수 있는데, 그게 현실과 잇닿아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그런 내용을 다른 사제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신자들이 주말에 성당에 오면 한 두어 시간 이상을 성당에서 지내게 되는데, 그들에게는 참으로 귀한 시간이지요. 여기서 미사의 핵심이 성경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것이라면, 강론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제들의 강론이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이 되려면, 사제들이 평소에 하느님의 말씀을 껴안고 살아야 합니다. 사제들이 성경에서 감동을 받지 않고, 시대의 징표를 깨닫지 못한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달할 도리가 없는 거지요. 이런 생각으로 강론대와 제대 앞에 사제는 서야 합니다. 신학교에 들어갈 때의 첫 체험과 감동의 시간을 기억하고, 첫 미사 때의 감동과 정성을 늘 깨달으면서 매일같이 미사에 임해야 합니다.

민주화 배신한 명동성당, 이제 물리적 의미의 명동성당 넘어서야

한상봉: 그렇다면 화제를 바꾸어, 최근 이야기를 드리고 싶네요. 지난 6월 11일에 6월항쟁 24주년을 기념해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장소를 순례하는 ‘민주올레’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명동성당 측에서는 혼례미사가 있다면서 방문을 거절했고, 결국 순례단은 명동성당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명동성당은 ‘민주화의 성지’라고 불리는데, 사실상 1970년대에 지학순 주교가 양심선언을 한 곳도 명동이고, 정의구현사제단이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박종철 군 고문치사 은폐조작을 폭로한 것도 명동성당이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공권력 투입을 한사코 가로막고 나섰던 곳도 명동성당입니다. 당시 교구청에서 김수환 추기경을 보좌하면서 홍보국장을 지내셨던 분으로서 지금의 명동성당이 가지는 상징성에 대해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언제까지 그 상징성에 매달려야 하는지요?

함세웅 신부: 명동성당 측이 이번에 민주화 순례를 원했던 이들에게 행했던 거부의 태도나 응답은 아주 유아적이죠. 유치한 대응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제가 부끄럽습니다. 그런 사제들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가톨릭교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근원적 회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좀 달리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고 여깁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가보면, 예루살렘이 유대인들의 중심지였고 예수님도 그곳에 순례한 적이 있지만, 이제는 이슬람교도의 성전이 되었지요. 그걸 지켜보는 유대인의 마음은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을 ‘장소’로 생각하지 말고 묵시록에 나오는 것처럼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신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보다 더 큰 존재가 예수 자신이었고, 사람 그 자체라는 선언입니다. 이제 성전이라는 외형적 건물이나 장소에 매몰되는 것을 넘어서는 성숙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 함세웅 신부는 이제 명동성당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예전의 명동성당이 의미하던 '민주화의 성지'를 예수를 따르는 이들의 삶에서 발견하자고 권했다. (사진/한상봉 기자)

저도 명동성당에서 일했고, 명동성당은 실제로 1970년대와 80년대에 많은 인권신장과 민주화를 바라는 많은 분의 기도 자리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긍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몇 해 전에 일본에서 정경모 선생을 만났을 대 그분이 해주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일본에 망명해서 국가보안법 때문에 조국에 들어오지 못하는 정경모 선생은 “고향에 한번 오셔야지요”라는 말에 “신부님, 고향이 꼭 장소라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합니까? 고향은 장소가 아닙니다. 저는 고향을 장소로 이해하지 않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동료들과 함께 살았던 그때를 회상하는 게 고향이지요. 지금 고향에 가봐야 누가 있습니까? 문익환 목사님도 안 계시고.. 내가 순수한 뜻을 지녔던 사람들을 만나는 게 고향이라면, 일본에서도 마음속에서 기도 속에서 늘 그 사람들을 만나고 고향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마음에 담고 사는 삶의 양식이 고향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사건의 경우에도 시민과 우리 신앙인들은 서울대교구 교구장이나 명동성당 사제들의 행태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명동성당 물리적 건물로 접근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번에 6월항쟁 24주년 기념식 때문에 시청 앞에 있는 성공회 성당에 갔었는데, 거기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민주화를 위해 희생되신 분들을 마음에 품고 기도했습니다.

역사현장과 삶을 껴안고 있는 성공회가 우리보다 더 성서적이고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을 실현하고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시대적 요청을 배척하는 명동성당 실무자들은 예수가 질타했던 유대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고식적이고 고답적인 부류들입니다. 저는 이런 문제 때문에 안타까워하며 고민하는 분들에게 정경모 선생처럼 예언자들처럼 물리적인 ‘명동성당’이라는 장소를 넘어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970년대, 80년대에 헌신했던 분들을 기억하면서 그분들의 삶을 재현하는 것이 고향을 재현하는, 하느님의 성전을 재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처럼 인간존엄성을 위해 일하는 우리가 모두 명동성당보다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역시 두 발을 땅에 딛고 사는 까닭에, 민주올레 순례자들이 명동성당에서 제지당했다는 말을 들으니 다시 한 번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습니다. 우리가 명동성당과 사제들을 넘어서는 21세기 지성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정진석 추기경 용퇴 요구 '하극상' 운운, 미신의 결과

한상봉: 이번에는 좀 예민한 문제를 묻고 싶습니다. 작년 하반기에 4대강 문제와 관련한 정진석 추기경님의 발언 때문에 원로사제들이 나서서 ‘추기경의 서울대교구장 용퇴’를 제안했을 때 논란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 원로사제들의 발언을 반대하는 이들이 가장 많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온 것이 “교구 사제들이 어떻게 교구장 주교의 용퇴를 거론할 수 있느냐”며 ‘하극상’ 운운하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서울대교구에서는 긴급사제회의를 여니 마니 하다가 그냥 사건이 묻혀 버리고 말았고, 이 문제에 대해 원로사제들 역시 충분한 해명이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

함세웅 신부: 그것은 미신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해명할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교계제도’라는 것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의 평등한 공동체입니다. 오늘이 마침 ‘성령강림대축일’인데, 성령강림의 핵심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모든 분에게 성령의 은혜를 내려주셨다는 것이죠. 이 현상을 루카만이 사도행전 2장에서 표현했는데,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성령이 불꽃 모양으로 사도들 위에 내려앉았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이나 성령의 작용을 문자로 다 표현할 수 없었겠죠.

기본적으로 예수님은 유대의 종교적 기본 틀을 넘어서신 분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직거래로 만들어 주신 분이죠.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는데, 당시 하느님의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던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예수가 무엄하고 불경한 자로 보였겠죠.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옹졸한 신앙을 예수처럼 탈피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교황도 주교도 사제도 수도자도 평신도들도 다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로 평등합니다.

교계제도는 역사적 산물로 공동체로 사는 데 필요해서 만든 제도입니다. 절대적인 것이 아니란 의미입니다.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예수님 말씀처럼, 교계제도가 우리 신앙공동체를 위해 있는 것이지, 우리 교회 지체들이 교계제도를 위해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러한 신앙의 기본을 모르는 분들이 미신적 태도로 교계제도와 단순한 순명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가르치는 순명도 하느님 말씀에 대한 순명을 이르는 것입니다. 주교들도 일차적으로 하느님 말씀에 순명해야 하고, 주교도 사제도 하느님 말씀에 먼저 순명해야 신앙공동체를 이끌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말씀을 앞세우지 않고 ‘교도권’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말을 앞세우는 것, 그것이 위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사람의 일을 마치 하느님의 일인 양 가르치고 있다고 꾸짖은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본질을 깨달아야 하는데, 이 핵심을 깨닫지 못하는 많은 신자가 이천 년 전에 예수님을 죽였던 이들의 모습으로 되살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보세요. 예수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로 우리에게 오셨죠. 그런데 그분을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죽였잖아요. 이런 모순을 깊이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이런 성찰을 하기는커녕 하극상이다, 교계제도가 어떻다, 순명을 왜 안 하느냐, 하고 떠드는 것은 유아적 신앙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근원적 구원의 의미를 표피적으로만 접근한 결과이지요. 그들이 신앙의 내면적 핵심을 뚫고 들어갔으면 좋을 것 같아요.

교계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계제도의 형태는 봉건제 시절의 역사적 산물인데, 우리 시대는 평등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주의가 중요하잖아요. 교회도 시대정신에 따라 민주적 정신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지금도 봉건제에 기초한 권위적인 조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교회가 시대의 징표를 깨닫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큰소리를 치는 현실이야말로 우리가 가슴을 찢고 반성해야 할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주교회의에서 4대강 사업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이것은 막개발이다, 난개발이다, 하며 염려한 내용을 정진석 추기경이 제대로 이해하고 신자들에게 전달했는지를 따져야 하는데, 사람들은 핵심을 놓친 채, 어느 평신도가 이야기했듯이, 가리키는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쳐다보며 손가락이 하나네 둘이네, 하며 따지고 있으니 이건 너무 부끄러운 일이죠. 물론 수구언론이 조장한 측면도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회개할 부분이 있는 것이죠, 이런 무지한 사람들을 설득할 방도가 없어요.

▲ 엘리스 교수는 자신의 책인 <유대인 해방신학 Toward a Jewish Theology of Liberation>을 소개하면서, 표지에 그려진 다비드의 별 가운데 있는 나무 그림이 곧 팔레스타인 사람들임을 가리키면서, 우리들의 관심사는 억압받는 사람들이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사진/한상봉 기자)

아나키즘과 성령의 바람으로..브로커 없는 교회로..

한상봉: 마지막으로 권력화된 한국교회의 쇄신을 위해 참고할만한 이야기가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함세웅 신부: 요즘은 공부하고 기도하면서, 이런 느낌이 들어요. 아나키즘에 대해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보통 무정부주의로 번역하지만, 그 말로는 의미를 다 담을 수 없어서 최근에는 그냥 ‘아나키즘’이라고 부르죠. 아나키즘의 주창자들은 모든 제도와 체제를 넘어서려고 하죠. 역사적으로 공산주의 체제였던 소련에서 가장 혹독한 박해를 받은 이들도 아나키즘 주창자들입니다. 그게 참 매력이 있어요. 아나키즘은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의 성령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봅니다. 성령은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분이니까요.

이런 점에서 예언자의 역할이 사제직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경직되었을 때, 하느님의 은총으로 견제하는 역할을 하는 게 성령입니다. 교회사 안에서 교회가 권력화되고 행정체제로 굳어지면서 쇠퇴할 때, 생생한 성령운동이 일어나 교회를 다시 생동감 있게 쇄신합니다. 그러므로 교계제도가 지배권력이 되고 퇴행적 형태를 띨 때마다 다시 거듭 카리스마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성령으로 보완되어야 하지요,

아나키즘은 신성하고 아름다운데, 조직화와 제도화를 거부하기 때문에 불꽃같이 타올랐다가 사라지곤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아나키즘과 성령운동이 잘 매개 되어 세상과 교회를 함께 바꾸는 운동으로 승화되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곤 합니다. 그게 묵시문학의 꿈이었던 것 같아요. 새 하늘 새 땅을 향한 것이지요,

이참에 베드로와 바오로의 관계도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전통적으로 바오로 사도와 베드로 사도의 피 위에 세워졌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후계자라는 교황은 존재하지만, 바오로 사도가 상징하는 은총의 후계자는 없어요. 바오로 사도가 말씀의 선포자인데, 그게 승계가 안 된 것이죠.

우리 교회는 6월 29일에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들을 함께 기념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베드로 중심, 교황 중심, 획일적 권력 중심 체제만 강조합니다. 이제 베드로 중심의 제도를 넘어서는 카리스마에 대해 좀더 깨달아야 합니다. 미국의 유대인 신학자 마크 엘리스의 표현대로 ‘브로커 없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해야 합니다. 마크 엘리스는 그리스도교에 교황, 사제, 목사 등 브로커들만 남아 있다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본래 지향했던 평등한 제자직으로 돌아가는 게 근원적 회개입니다. 또한 여성신학적 측면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집단은 온 세계에 바티칸밖에 없습니다. 이게 교정되지 않으면 하느님나라를 훼손하는 결과가 발생합니다. 이런 부분도 회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추기경의 방식

한상봉: 못다 한 말씀이 계신가요?

함세웅 신부: 한 가지 기억나는 이야기가 있는데, 작년에 정진석 추기경을 가까이 모시던 어느 원로사제가 추기경에게 “명동성당 개발 같이 새로운 사업은 후임 교구장에게 맡기라”고 조언했다더군요. 교구장 정년을 훌쩍 넘기셨으니, 이참에 새 사업을 하느라 서두르지 말라는 것이겠지요. 이 말을 듣고 무슨 소리냐며 정진석 추기경이 심하게 짜증을 내셨다고 하는데, 그 뒤로 교구청에서 소임을 맡은 탓에 교구청에서 점심을 함께 하던 그 원로사제는 다른 사제들에게 좋지 않은 표양을 보인다는 이유로 식사를 다른 데서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참 창피한 일입니다.

한상봉: 교회 안에서 느끼신 아프고 쓰린 이야기를 솔직히 말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신부님 책 제목처럼 심장을 찢는 아픔을 이겨내신 “심장에 남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으면 하는 기대가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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