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명희의 행복선언]

파출소에서 연락이 왔다. 확인 할 게 있단다. 부랴부랴 갔더니 할머니 한 분이 고개를 떨군채 앉아 있고 책상위에는 일회용 커피 봉지가 수북이 쌓여있다.

신림동 고시촌의 고시생 쉼터에서 일회용 커피믹스가 없어지기 시작한 것은 6개월 전. 고시생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무료로 차를 마시고 잠시 쉬어가는 공간이지만 이런 일은 여태껏 없었기에 당황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범행이 대담해진다는 것이다. 이제는 아예 사무실 안에도 침입해 창고 안에 쌓아둔 커피까지 사라지고 있다. 그렇다고 몰래 카메라로 감시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할머니 이런짓을 하면 안되죠!” 파출소 소장의 호통에 할머니의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할머니는 인근 대형마트에서 커피를 훔치다 들켰다. 물론 고시생 쉼터도. 폐지 줍는 척 하면서 쓰윽 창고에 들어가 커피를 훔쳤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커피 봉지가 없어지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직원의 감시망에 덜미가 잡혔다.

“손자 수술비 땜에 그랬어. 아무리 궁리해도 돈 나올 구멍은 없고...마음 독하게 먹고 징역 살 작정했어...” 할머니는 순순히 자백했다. 외아들이 이혼의 충격으로 실명을 하자 두 손자를 맡아 키운지 10년. 힘들어도 둥지 속의 아기새처럼 일흔 다섯 살의 할머니를 보고 입을 벌리는 두 손자들을 먹이고 입히려고 하루도 맘 편하게 등을 대고 누워 본 적이 없었다.

공공근로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 손주들과 먹고 살기도 힘들었다. 겨울에는 거리에서 폐지와 빈병을 주워 부족한 생활비와 손자의 학비를 충당하고, 가을에는 폐지와 함께 길거리에 떨어진 은행열매도 주워 팔고 봄이면 시골에 내려가 농사 품앗이까지 했다.

“봉투 100개 접으면 천 오백원이야. 하루에 3백 개도 접고 4백 개도 접고...” 처음 할머니 품에 올 때 여섯 살, 세 살이었던 손자가 이제 고등학생 중학생이 되었다. 잘 먹이지도 잘 입히지도 못하고 키웠지만 할머니 사랑만큼은 누구보다도 아낌없이 주었다. 작은손자에게 심장병이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은 1년 전이다.

학교에서 호흡곤란으로 쓰러진 뒤부터 맥을 못 추고 방안에서 누워만 지내고 있다. 수술이 급하다고 의사가 경고를 하지만 수술비 때문에 꿈도 못꾸고 있다. 그렇다고 손주가 죽어가도록 손을 놓고 있을 수 없었다. 고민중에 얼핏 들은 말이 떠올랐다. 일회용 커피믹스를 가져오면 팔아주겠다는 포장마차 주인의 제안이었다. 손자와 가정을 지키려고 생활력으로 똘똘 뭉쳐 얼굴 가득한 주름만큼이나 고달픈 인생을 살아온 할머니의 진술은 범행이 아니라 지극한 손자사랑의 고백처럼 들렸다. 그래도 죄는 죄다.

파출소에서 돌아온 며칠후 할머니가 쉼터를 찾아 오셨다. 용서해 달라고 말을 잇지 못하신다. “그날 저녁 늦게 조사를 끝내고 파출소 양반이 국밥집으로 데려가더니 국밥을 한 그릇 시켜주네. 이제 징역을 살게 하는구나 생각하고 배고픈 김에 밥 한 그릇을 다 비우고 기다리고 있는데 택시를 불러 집까지 데려다 주라고 시키잖어. 택시를 막 타는데 경찰양반이 나를 붙잡고 주머니에 봉투를 하나 꾹 찔러 주길래 벌금 내라는 통지서구나 하고 집에 와서 큰손주에게 읽어보라고 했더니 만원짜리 석장이 들어있었어”

얼마뒤 할머니는 경찰서에서 다시 출두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번에는 진짜 벌금을 내는구나 하며 조마조마하며 갔는데 서장님이 장한 할머니라며 파출소에서 모금한 돈이니 손자 입원준비를 하라고 했어 ”

1930년대 초 대공항 시기 뉴욕 치안판사였던 피오렐로 리과디아는 배가 고파 빵을 훔친 노인에게 10달러 벌금형을 내리면서 “배고픈 사람이 거리를 헤매고 있는데 나는 그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이 도시 시민 모두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에게 벌금 10달러형을 선고하며 방청객 모두에게 각 50센트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이렇게 걷은 57달러 50센트를 노인에게 주었고, 노인은 10달러 벌금을 낸 후 47달러 50센트를 가지고 법정을 떠났다.

약자에 대한 보호망을 만들지 못한 사회와 그 구성원의 책임을 강조한 리과디아의 판결은 법에 앞서 사람을 중시하는 대표적인 판결로 아직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부와 성공 가난과 실패가 자기 능력의 결과이고 혼자만의 것이라면 불가피한 운명까지도 자신이 전적으로 책임져야할 문제가 된다. 그러나 삶을 ‘선물’로 보는 겸손한 태도는 ‘운이 좋아 얻은 성공이니 운 없는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당연하며 재능의 덕으로 성공했으니 재능이 없는 사람들과 이익을 공유할 책임이 있다’는 연대의식을 낳는다. ‘정의’와 ‘공정사회’가 화두인 요즘 뉴욕 시장을 세 번이나 연임했던 리과디오 피오렐리오의 ‘정의’와 할머니에게 국밥을 사준 파출소 소장의 ‘정의’가 가슴에 와 닿는다. 마트직원들과 나도 할머니에게 용돈을 조금 드렸다.

심명희/ 마리아.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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