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 <내 글 보고 내가 웃는다>, 정양모, 햇빛출판사
교황청과 한국 주교회의 제재 받은 사연..소명기회도 없이, 유대 율사보다 못한 처사

“조선인사제로서 통상 열세 번째로 서품된 김문옥 요셉 신부님이 상주읍 서문동성당을 지을 무렵 1935년, 나는 상주군 사벌면 목가리에서 태어났다. 김문옥 신부님은 노상 사제 성소를 강조하셨다고 한다. ‘아들 둘이면 하나를, 아들 셋이면 둘을, 아들 다섯이면 셋을 하느님께 바쳐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어머니는 이 말씀을 새겨 아들 다섯 가운데 셋을 사제의 길로 인도하셨다.”

▲ 정양모 신부
정양모 신부가 최근에 <내 글 보고 내가 웃는다>는 책을 햇빛출판사(사장 윤일숙)에서 펴냈다. 햇빛출판사는 그동안 안동교구 정호경 신부의 <가자! 가자! 함께 가자>, <우파니샤드 읽기>, <장자 읽기>, <전각성경 말씀을 새긴다> 등을 펴냈으며, 류강하 신부의 <당신이 있어 행복했습니다>를 펴내기도 했다.

정양모 신부는 독일신학자인 후고 라너가 젊은이들에게 자주 당부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 “젊어서 부지런히 글을 써두면 늙어서 웃을 일이 많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 쓴 글을 노경에 읽어보면 흐뭇해서 웃고 가소로워서 웃게 된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임의 꾐에 넘어가’ 살아온 정 신부의 세상살이 이야기와 그가 만나고 기억하는 인연들에게 대한 술회가 담겨 있다.

정양모 신부는 먼저 ‘예수 찾아 살아온 사십 년’을 회상한다. 경북 상주 출신의 정양모 신부는 1955년 성신고등학교를 마치고 사제양성 고등기관인 가톨릭대학교 신학부에 진학했다. 그러나 여기서 배운 신스콜라철학과 신학에 대해 자못 회의적이다.

“신스콜라 철학, 신스콜라 신학의 방법과 내용은 맹랑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우리네 삶과는 별 상관이 없는 추상적 질문들을 제기한 다음 조목조목 갈라놓고 현기증이 날 만큼 꼬치꼬치 따지곤 했다. 일례로 유일신 하느님의 존재를 다섯 가지 방법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장담했는가 하면 하느님의 속성들조차 철학적으로 밝힐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론의 경우 강생(降生=受肉)과 십자가 사건의 구원론적 의미에만 집착했다는 느낌이다.”

나는 예수 공부를 하리라

1961년 프랑 리옹 가톨릭대학 유학 시절에 루카복음서 연구의 대가 조르주 교수의 강의를 듣고 ‘나는 예수 공부를 하리라’ 마음먹었다고 전한다. 1963년 리옹 주교좌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교에서 신약학 교수인 슈나켄부르크에게서 5년 동안 더 공부했다.

당시 정양모 신부는 신앙의 그리스도보다 역사의 예수에 관심을 가졌는데, 예수의 실상 가운데서 소외자들에 대한 예수의 관심이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박사학위 논문인 ‘예수의 구세 설교와 그 청중들’에서 정 신부는 “예수는 백성들 가운데서 멸시받던 상것들을 매우 선호하셨다”고 말한다.

“가난한 이들과 굶주린 이들과 한맺힌 이들, 무지렁이들, 직업상의 죄인들과 윤리상의 죄인들, 여자들과 어린이를 각별히 사랑하셨던 것이다.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기본 정서는 연민의 정이었다. ... 왜 그러셨을까? 악한 사람들에게나 선한 사람들에게나 골고루 햇빛을 비추고 비를 내리시는 하느님, 잃은 양 한 마리를 되찾고 기뻐하는 목동 같은 하느님. ... 해 떨어지기 직전에 단 한 시간 일한 품팔이에게 그 가족의 생계를 생각해서 하루치 품삯을 주는 선한 포도원 주인 같은 하느님을 예수는 깊이 체험하신 나머지 인간에 대해, 특히 소외자들에 대해 연민의 정을 진하게 품으셨다”

정양모 신부는 1970년 예루살렘 성서연구소에서 역사와 지리를 공부하고 귀국해 광주 가톨릭대학교에서 1971년부터 1975년까지 재직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대전 이북 여섯 교구가 공동운영하는 서울 가톨릭대학교와 대전 이남 여덟 교구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광주 가톨릭대학교가 있었다. 당시 문제는 신학교수 부족이었는데, 그나마 충원 가능한 대구교구에서 교수 파견을 거절하는 바람에, 이에 항의하는 의미로 광주 가톨릭대 교수 8명 전원이 ‘주교들의 협조 없이는 신학교육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1975년 2월 모두 학교를 떠났다. 정 신부는 <내 글 보고 내가 웃는다>라는 이 책에서 “그러나 윤리신학 교수 신부 한 명은 사직서를 쓰고 학교를 떠나는 척하다가 3월 초순에 복직했다. 그는 한국 주교단과 바티칸으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아서 1977년 교구장 주교로 발탁되었다. 유다의 배신을 상기시키는 한 폭의 회화 같은 사건이었다”고 밝혔다.

▲ <내 글 보고 내가 웃는다>, 정양모, 햇빛출판사, 2011
이 글에서 정 신부는 1970~90년대에 한국가톨릭 주교들이 마구잡이식으로 신학대학을 설립한 사실을 아프게 꼬집는다.

“오늘날 이 좁은 땅에 가톨릭 성직자 양성기관이 무려 일곱 개나 된다. 그 결과는 참담하다. 제한된 교수진과 재정을 여기저기 분산시켰으니 신학교육, 영성교육, 인성교육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몰지각한 주교들이 교구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양산한 부실 신학교들은 하루빨리 통폐합하고 아울러 교수진과 학생들의 질을 많이 높여야 우리나라 가톨릭이 갱생할 수 있다”

정양모 신부는 교수생활을 접고 그후 청송성당 사제로 부임하면서 겪은 일화 한 토막을 전해준다. 인사차 경로당에 들리니, 노인들이 ‘가족과 함께 이사왔느냐?’ 물어 ‘천주교 신부는 독신이라 가족이 없다’고 답했다. 그러니, 노인이 고개를 돌리며 ‘굼벵이도 짝이 있는데... 헌 짚신도 짝이 있는 법인데’ 하셨다. 이를 두고 정 신부는 사제독신제에 대한 견해를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예수는 분명히 독신으로 종생하셨다. 그분은 에세네 수도원 같은 제도에 얽매여서가 아니라 하느님께 매료되어 독신의 카리스마를 체현하셨다. 로마 가톨릭은 독신 카리스마와 사제 직분을 밀착시켜 독신 사제직만 허용한다. 반대로 개신교는 독신 카리스마를 업신여겨 성직자들이 거의 모두가 기혼자들이다. 동방 정교회와 동방 가톨릭은 성직 후보자들에게 결혼 여부를 일임한다. 동방수도원에는 독신 성직자들이 모여 살고, 지역교회에서 사목하는 성직자들의 약 80퍼센트는 기혼자들이고 20퍼센트는 독신자들이다. 동방 정교회와 동방 가톨릭의 제도가 장래성이 있는 것 같다.”

1976년부터 1998년까지 정양모 신부는 서강대학교에서 성서학을 가르쳤는데, 이 시절에 맺은 가장 소중한 인연으로 정 신부는 개신교 신학자인 안병무와 변선환 박사를 꼽았다. 안병무 박사는 일생의 예수연구를 집약해 <갈릴래아의 예수: 예수의 민중운동>을 집필했고, 변선환 박사는 교회와 그리스도 중심의 구원관에서 벗어나 신 중심의 구원관을 설파해 종교간 대화의 물꼬를 연 종교신학자다. 이 때문에 변 박사는 감신대에서 목사직 박탈과 출교처분을 받았다.

교황청과 한국 주교단의 제재

한편 1997년 정양모 신부는 서강대학교 종교학과에서 교의신학을 가르치던 서공석 신부와 광주 가톨릭대학교에서 교의신학을 가르치던 이제민 신부와 더불어 교황청과 한국 주교단의 제재를 받게 된 사연을 밝혔다.

1997년 5월 16일자로 주한 교황대사는 당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인 정진석 추기경 앞으로 공한을 보냈다. 그 내용인즉,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장관인 요셉 톰코 추기경이 보기에, 이제민, 서공석, 정양모 신부가 가톨릭 정통교리에 어긋나는 오설을 퍼뜨리고 있으니 바로잡으라는 것이다. 교황청은 이제민 신부의 <교회: 순결한 창녀>(분도출판사, 1995)라는 책과 서공석 신부의 ‘교회의 쇄신, 또 한 번의 말잔치?’(<사목> 1997년 2월호 24-37쪽)라는 기고문에 문제가 있으며, 정양모 신부는 ‘여러 심포지엄에서 세계교회와 지역교회의 관계, 여성사제직, 사제 독신제도, 가톨릭신앙의 토착화에 관해 정통교리에 어긋나는 주장을 펴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이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상임위원회는 1997년 7월 2일 교황청과 교황대사의 뜻을 받들어 ‘앞으로 주교회의의 간행물에는 이들의 글을 게재하지 않도록 하였다’(한국천주교주교회의 회보, 1997.9.1.)고 전한다. 이에 대해 정양모 신부는 한국 주교회의의 처사에 이렇게 항변했다.

-저들은 이제민, 서공석, 정양모에게 전혀 소명 기회를 주지 않고, 단지 밀고자의 고발을 근거로 일을 처리했다.
-저들은 2001년 봄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 주교회의 상임위원회 결정을 이제민, 서공석, 정양모에게 통보하지 않고 있다.
-저들이 지적한 오류 네 가지는 모조리 가톨릭교회와 관련된 항목들인데, 나는 오래 전부터 교회 쇄신에 기대를 걸지 않기에 되도록 교회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 나의 근본 관심사는 그리스도론, 인간론이다. 나는 그리스도론, 인간론의 관점에서 때때로 교회론을 거론할 따름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가톨릭교회는 잔인한 면이 있다. 일례로 체코의 국민신학자 얀 후스(Jan Hus)는 콘스탄츠에서 공의회의 명으로 1415년 7월 6일 화형에 처해지고 그 시신을 태운 재는 라인강에 뿌려졌다. 스페인의 악명 높은 종교재판과 이단자 화형은 1834년까지 계속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저 잔인한 만행에서 해방되어 실로 아름다운 세기에 살고 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정양모 신부는 ‘저라고 자랑거리가 없겠습니까’라는 글에서도 이 사건을 지적하고 있다. 이 ‘고약한 소문의 진상’을 보면서, 정 신부는 “2천 년 전 유대교 율사들의 재판절차에도 훨씬 못 미치는 처사”라고 말하며,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할 것 없이 교회 지도자들은 역사비평과 해석학적 성찰이 부족해서 때때로 중세 종교재판을 재현한다”고 평가했다. 이어 정 신부는 “무지한 교계 지도자들에 대해 연민의 정을 품는다”며,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간구를 덧붙였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사실 그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하옵니다.”(루카 23,34) 그때 일을 회상하며 정 신부는 “근본적인 일에는 일치를, 미심쩍은 일에는 자유를, 어느 일에고 사랑을 찾으라”던 아우구스티누스의 명언처럼 교회가 바뀔 수 있을지 물으면서, “그것은 현실세계가 아니고 이상향이겠지요”라고 맺었다.

한편 정양모 신부는 예수가 한평생 힘겹게 노동하면서 영원한 분을 깨닫고 인생을 터득하셨으며, 3년 남짓 전도하실 때에도 하루하루 벌어먹고 사느라 계율을 지키지 못하는 상것들을 편애하심을 기억하며, “한평생 예수 공부를 하면서도 이다지도 깨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것은 노동을 멀리하고 오로지 머리만 굴린 업보”라며 “이제 어떤 모양으로든 땀 흘리는 일을 병행해야만 하겠다. 하다못해 방바닥과 마룻바닥이나마 부지런히 훔쳐야겠다”고 고백한다.

그 밖에도 <내 글 보고 내가 웃는다> 2부에서는 ‘그리운 임들’이라는 제목으로 최양업 신부, 안중근 의사, 백범 김구, 김수환 추기경, 루터 킹 목사, 김익진과 구상, 안병무, 유달영, 월전 장우성, 의사 이경식, 루미네 수녀, 한승헌, 황대권, 제정구, 박완서 등에 대한 기억을 담았다.

정양모 신부의 <내 글보고 내가 웃는다> 의 출판 기념회 및 희수 축하연이 다석학회 주관으로 오는 6월 14일 오후 2시 서울 방배동 성당에서 열릴 예정이다. 

정양모 신부 희수 축하 및 출판기념회
시간: 2011년 6월 14일(화) 14:00 ~ 18:00
장소: 서울 방배동 성당
행사 순서: 14:00 ~ 14:40 미사
                   14:50 ~ 15:50 정양모 신부 강연 ("내글 보고 내가 웃는다"출판에 즈음하여)
                   16:00 ~ 16:30 정양모 신부 희수 축하 출판 기념회
                   16:30 ~ 18:00 만찬뷔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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