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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다미아노 성지 (Il Santuario di San Damiano)

 

   
다미아노 성당 가는 길

성지 역사

아시시 언덕과 평야 중턱에 자리한 다미아노 성지는 초기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영성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아시시 주교의 뜻에 따라 원래 의사이며 순교자인 다미아노 성인에게 7-11세기 중에 봉헌된 성당이다.

 

   
성프란치스코 동상


1205년 청년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생가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접하고 불안해하다가 성 다미아노 성당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던 중 당신 집을 보수하라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 사건 후에 프란치스코의 삶은 뿌리 깊게 변화하게 되었다.

   
성글라라 숙소

글라라 성녀는 초기 글라라회 수녀들과 함께 1211-1253년에 이곳 성지를 생의 거처로 삼았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1211년에 글라라 성녀에게 이곳 ‘가난의 성채’에 거처를 마련해주려고 방문하고 성녀와 초기 동료 수녀들이 자리 잡을 때가지 머물렀다. 오랜 극기와 금욕 생활로 1220년 병이 든 프란치스코는 다시 이곳을 찾았다. 오상을 받은 성인이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 1225년 겨울에 마지막으로 이곳에 왔고, 오래 머물면서 수녀들에게 텃밭을 만들어 주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그때 ‘태양의 찬미가’를 썼다. 성 다미아노 성지는 프란치스코회의 두 번째 수도회의 보금자리일 뿐 아니라 ‘이탈리아 시의 요람’이다. 다미아노 성당은 T자형의 구조를 띄고 있다. T자형 중앙 축에는 아래층 성무일도 기도실 (Coro)와 성전, 위층 거처와 기도실이 있다. 가로 축에는 아래층 글라라 식당과 성무일도 기도실, 위층 글라라 성녀의 의무실이 있다.
 

   
다미아노 성당 내부


성 프란치스코의 회개 여정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의 회개는 단시일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청년 프란치스코는 평범한 일상에서 접하는 특별한 체험들로 인해 조금씩 변화를 겪으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
 

   
다미아노 성당 정면

 1202년 아시시 주민들은 콜레스트라다 (Collestrada) 근처에서 페루지아 (Perugia) 군대와 정면 충돌한다. 20세 청년 프란치스코는 이 전쟁에 참여하다가 포로가 된다. 일 년 동안 처참한 포로생활을 하게 된다. 이 시간은 프란치스코에게 성찰과 반성의 기회를 준다.
 

   
다미아노 성당 프레스코화


1203년 프란치스코는 감옥에서 석방되어 아시시로 돌아온다. 포로생활로 인해 중병을 얻어 병상에 눕는다. 생의 기력과 기쁨이 그에게서 송두리째 사라진다.

한 가지 희망만이 그에게 남아있다. 위대한 기사가 되는 것. 군대에 매료된 프란치스코는 굴알티에로 디 브리엔네 (Gualtiero di Brienne) 군대에 입대하여 풀리아를 향해 떠난다. 하지만 스폴레토 (Spoleto)에서 밤에 “프란치스코, 주인과 하인 중에서 누구를 섬기는 것이 좋으냐?”는 신비스런 목소리를 접하고는 가던 길을 멈췄다. 그리하여 영광스럽게 되고자 하는 그의 꿈이 산산 조각나고 만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아시시로 되돌아온다. 주님께서는 아시시에서 프란치스코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말씀하실 것이다.
 

   

다미아노성당 정원

위대한 꿈을 포기한 프란치스코는 커다란 슬픔에 빠진다. 주위 모든 사람들과 접촉을 모든 끊고 칩거한다. 그런 어느 날 말을 타고 거리를 지나다가 적선을 청하는 나병 환자와 대면하게 된다. 프란치스코는 순간 거부했지만 말에서 내려와 나병이 걸린 형제를 껴안고 입맞춤을 한다. 이 체험은 프란치스코에게 너무도 큰 내면의 기쁨을 선사하였고 그는 평생 이를 마음속에 간직한다. 그 입맞춤은 기도와 생명의 단맛이었다. 프란치스코는 나병 형제와의 포응이 고통 받은 주님의 몸을 감싸 안은 것임을 알게 된다. 그 기쁨은 그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메아리친다.

1206년 가을, 프란치스코는 아시시 외곽에 있는 성 다미아노 성당에 들어간다. 제대 뒤쪽에 걸려있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상이 그를 부른다. “가서 허물어져가는 내 집을 수리하여라.” 프란치스코는 사시나무 떨듯이 두려워한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이름을 호명하시는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소리를 듣는다. 프란치스코는 여린 손으로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하기 시작한다. 그의 손은 더 이상 도시를 부수고 무기를 휘두르는 손이 아니라 성당을 보수하고 평화를 전하는 주님의 도구가 된다.

   
태양의 찬가

에피소드

우리는 얼마 전에 아시시는 아니지만 지금으로부터 8세기 전에 이곳 아시시에서 쓰러져가는 교회를 일으켜 세우느라 온 몸이 부서진 프란치스코 성인의 모습을 닮은 프란치스코 제3회인 '프란치스코 전교봉사 수도회'에 몸 담고 있는 한 수도자를 만났다.

아프리카, 특별히 잠비아에서 복음선포의 꿈을 펼치고 있는 이 수도회 수련원에서 의 잠비아 출신 수사 2명의 종신 허원식에 남편 베드로는 사진 봉사자로, 나는 봉사 보조로 참여하였다.

그 수사 신부는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로부터 비둘기의 숙소가 되어 버린 옛 수도원 건물 사용을 허락 받고 동료 수사들의 거처로 변신시키기 위해 몸이 무서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밤낮으로 집을 수리하고 있다.

프란치스코의 오상 대신에 현재 수련원으로 쓰고 있는 건물을 처음 인수 받아 제대로 소독하지 못한 상태에서 잠자리를 들었다가 비둘기 오물에서 나온 독소로 등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 지금은 정리정돈을 끝난 그 수련원에 잠비아 출신의 새내기 지원자 십여명이 둥지를 틀고 도 닦기에 여념이 없다.
 

우리는 지난 주말에 2년간의 로마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하기 전에 2박 3일 피정을 이곳 수련원에서 했다. 이번 피정은 참으로 특이했다. 그 수사 신부의 부탁으로 수도회 일상을 담는 사진 봉사를 더불어 진행했기 때문이다.

나는 20년전에 로마 근교에 있는 카스텔 간돌포 (Castel Gandolfo)에 위치한 'Mater Ecclesiae' - 전 세계 선교 지역의 교리교사를 위한 학교 - 에서 아프리카 대륙 출신의 친구들과 2년간 기숙사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어서 새로운 체험이 아니였지만 처음으로 아프리카 출신의 수사들을 접하게 된 베드로는 여러 가지로 느끼는 점이 많았다. 또한 사각 프레임 안으로 모습을 담는 과정에서 많은 성찰을 했다고 했다.

이번 피정은 가톨릭 (보편) 교회의 체험을 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나는 지난 시절 8년간 이탈리아에서 생활했던 많은 것들을 베드로와 2년간 이곳 로마에서 살면서 새롭게 나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뭘하느라 그리 바쁜지 연재를 미리 쓰지 못하고 코에 닥쳐서, 아니 마감일을 넘기고서야 올리게 되어 우리의 모습을 읽어주는 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그 바쁜 마음 중에도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 것에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이 글과 사진을 아껴주시는 분들에게도 감사!!!!
 

/글 최금자, 사진 김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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