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의 필름창고] 유령신부Corpse Bride, 감독 팀 버튼, 마이크 존슨 2005년작

영화를 보았던 눈이 가득하고 싸늘하면서 스산한 날은 차갑고도 파란 톤의 이 영화의 분위기와도 너무 잘 맞았다. <비틀 주스>, <크리스마스 이브의 악몽>을 비롯한 팀 버튼의 여러 영화는 정말 재미있고 독특하다. 그 기발하고 독특한 상상력은 놀랍기 그지없으며, 미국 할리우드 영화의 문법을 넘어선다. 그의 영화는 산 자와 죽은 자, 이성과 비이성, 꿈과 현실 온갖 경계를 가로지르는데, <유령신부>도 그러한 팀 버튼 영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이다.

몰락한 귀족가문과 부유한 생선가게 주인 사이에서 결혼을 통한 부와 사회적 지위의 교환이 시도된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양가의 아들과 딸이 결혼식 예행연습을 위해 처음 대면한다. 결혼은 정략적이었을지 몰라도 다행히 예비 신랑신부는 서로 마음에 들어한다. 그런데 소심하고 부끄러움 많은 생선가게 아들 빅터가 자꾸 버벅대서 여러모로 차질을 빗는다.

이 수줍은 총각은 예비신부 빅토리아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쪽팔리기도 한 심정에 어느 무덤가에서 혼자 예행연습을 하는데, 그만 반지를 잘못 끼웠다가 유령 에밀리에게 지하세계로 끌려간다. 빅터는 에밀리를 뿌리치고 지상으로 나가기 위해 발버둥치고, 유령 신부 에밀리도 과연 빅터가 자신과 어울리는지 전전긍긍한다. 그때 주위의 유령들이 에밀리에게 말한다. 너는 죽은 것만 빼면 빅토리아보다 훨씬 낫다고, 하나도 꿀릴 게 없다고.

유령들은 한이 맺혀 지상에 발이 묶여 있는 존재들로, 그들이 천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 한을 풀어야 한다. 알고 보면 에밀리도 살해당한 원한 가득한 유령인데, 이런 한 맺힌 유령들이 지내는 지하세계는 생각보다 유쾌하고 흥겹다. 외려 늘 근심에 찌들어 버겁게 살아가는 지상의 인간들보다 더욱 즐거운 축제의 나날을 보낸다.

 

▲ 점점 에밀리에게 끌리는 빅터. 빅터와 에밀리는 화해의 피아노 연주를 한다.

차츰 빅터도 에밀리에게 끌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으니 결혼서약에 의하면 “이 둘을 죽음이 갈라 놓을 때까지…”이거늘 하나는 산 사람이고 하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결국 에밀리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빅터가 결혼서약을 한 후에 독배를 마시고 죽어야 하는데, 빅터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유령들은 성대한 결혼식을 위해 지상으로 올라간다. 드디어 유령신부와의 결혼식이 열린다. 빅터가 독배를 들려는 순간 에밀리는 빅토리아를 발견한다. 아, 이것은 아니다, 정말 아니다. 에밀리는 독배를 빼앗고, 빅터를 빅토리아에게 보낸다. 사랑하지만, 그렇게 보낸다. 그 독배는 에밀리를 살해하고 빅토리아와 사기결혼을 하려 했던 악한이 마셔버린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복수마저 이루어진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남의 행복을 뺏을 수 없다는 에밀리는 마침내 한을 풀고 나비가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이처럼 권선징악, 사필귀정으로 영화가 마무리된다.

첫 눈에 마음에 끌리건 보면 볼수록 마음에 끌리건 서로 타이밍이 잘 맞아 연인관계로 지내다가 같이 살겠다고 다짐한다. 그런데 결혼하면서부터 사태가 복잡해지고 이전과 다른 양상이 나타난다. 개인이 만나지만 그들 각자의 등 뒤에는 가족이 버티고 있고, 그동안 잘 몰랐던 서로의 불완전한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한참 눈에 콩깍지 씌었을 때는 별을 따주겠다고 할 정도로 헌신적이고 용감한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쪼잘하고 징징거리는 이상한 남자가 한 명 있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별을 따주고 싶은 아릿다운 그녀는 보이지 않고 바가지만 긁는 짜증스러운 한 여인만 눈에 띤다.


서로를 끌리게 했던 점이 서로를 미워하게 하는 요소로 돌변하기도 한다. 이런 우스갯소리도 있다. “남편과 대통령의 공통점: 내가 뽑았지만 정말 밉다. 한번 뽑으면 헤어지는 절차가 정말 까다롭다. 아직도 내가 자기를 사랑한 줄 안다.” 하여튼 서로의 결점을 확인하고 인간개조 작업이 펼쳐지기도 하는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랑학의 원조 레오 버스카글리아는 그 부분과 관련해 재미있게 지적한다.

“내가 즐겨 인용하는 편지 중에 하나는 남편의 사람됨을 바꾸려고 작심한(심지어 결혼도 하기 전부터) 한 여자에게서 받은 것이다. 몇 년 동안 잔소리를 하고 위협하고 갈고 닦은 끝에 그녀는 결국 그 일에 성공했다. 그 남편은 가까스로 그녀가 원했던 바로 그런 남편이 된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자기 남편이 자신으로 하여금 결혼을 결심하게 만들었던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레오 버스카글리아, <생을 사랑하고 배우며>(우리시대사, 1993).

결혼의 예상치 않은 변수들을 떠올리면 그만큼 신중해지고 따지는 것도 많아진다. 특히 생물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도 여성이 더 신중한 것은 당연한 듯하다. 그런데 갈수록 상대방을 마치 물건 고르듯 하는 게 요즘의 세태다. 결혼 중개회사에서 사람들의 여러 조건을 따져 등급 메기는 것을 보면 소름이 돋는다. 결혼은 행복을 위해 하는 것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두려움과 위험부담을 감수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주경철 교수는 민담과 동화를 통해 결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기도 한다.

“민담과 동화를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옛날 민중들의 성과 사랑, 결혼에 대한 태도다. 가장 널리 퍼져 있고 또 현대에 들어 큰 인기를 얻은 것은 <미녀와 야수> 계열의 낭만적 사랑 이야기다. …… 이런 이야기는 그 나름대로 맡은 역할과 기능이 있다. 즉, 결혼을 앞두고 불안에 떠는 여성에게 행복한 결혼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인내하고 노력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낙관적인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살펴본 <푸른수염>이나 <하얀새> 같은 이야기들은 결혼이 늘 행복으로 이어지지만은 않으며 때로는 죽음에 이를 정도로 위험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한다.” (주경철, <문학으로 역사 읽기, 역사로 문학 읽기>, 사계절, 2009)

둘이 만나 인연이 맺어지고 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신비로운 일이지만, 모든 것이 그러하듯 일상화되고 익숙해지면 신비감도 떨어지고 시쿤둥해지는 것 같다. 이왕이면 결혼을 통해 양쪽 다 잘사는 것이 최상이겠다. 그렇지만 애초에 잘못된 결혼이 어거지로 유지되는 것이 반드시 바람직하지는 않겠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세상 속에서 인간의 다양한 선택이 존중받는 쪽으로 나아가는 사회가 건전한 사회일진대, 결혼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하여튼 한때의 신비감과 콩깍지가 건강한 일상으로 자리잡게 하는 데 많은 노력과 지혜가 필요하겠다.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누누이 강조했던 것인데, 확실히 사랑엔 기술이 필요하다. 단 그 기술은 잔재주가 아닌 존재 그 자체를 온전히 받아주는 심층적 기술이라는 점을 주지해야 한다. 말이 쉽고 글이 쉽고 생각이 쉽지만 정말 어려운 문제다. 하긴 참으로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 거져 주어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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