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떠야 교회가 산다-13]

“가톨릭은 ‘초월’에 대한 현대인들의 관심이나 욕구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데 비해, 뉴에이지 운동에서는 모든 종교와 사상에서 추출한 온갖 좋은 것들을 적절히 혼합시켜 값싸게 제공하고 있다.(바티칸리포트 6)”

몇 년 전에 헬렌 니어링이 쓴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라는 책을 읽고 감탄한 적이 있었다. 이는 저자가 남편인 스콧 니어링의 삶을 보여준 글이었는데, 최근까지도 생각 있는 많은 이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는 책이다. 이 책에선 수많은 인용구들이 적혀 있는데, 헬렌 니어링이 살면서 읽은 글 가운데 의미 있다고 여겨진 것들을 틈틈이 메모해 두었다가, 적절하게 엮어놓은 것들이다. 때로는 본문보다도 더 가슴속 깊이 공감을 자아내는 인용글들이었다. 본문보다 아름다운 인용글이었지만, 이 인용글조차도 본문이 없으면 앉아있을 자리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가슴으로 다가오는 지혜의 서(書)가 한 권 더 있다. 매튜 폭스의 <원복 Original Blessing>이다. 이 책에서도 성서와 온갖 신비가, 영성가들의 이야기가 수없이 인용되고 있다. 이들 가운데는 교회에서 공인된 성인들도 있지만 대부분이 비주류 신비가들이며, 가톨릭신앙과 상관없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 모든 이들의 사상을 융합시켜 세상과 인간이 근원적으로 복된 존재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아무개’라고 쓰거나 ‘관옥’이란 필명을 사용하는 이현주 목사는 당신의 사상을 전개하는데, 성서와 노자도덕경, 장자, 불경, 우파니샤드 등 온갖 종교의 경전들을 모두 넘나들면서 ‘진리’를 설파한다.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교리적’ 타당성을 전적으로 인정할 수 없었지만, ‘복음적’ 타당성을 의심해 본 적은 없다. 그의 글 속에서 노자와 부처와 예수는 오래된 친구로 만난다. 그들은 영적으로 실천적으로 동지이며 반려자이며 애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리를 표현하는데, “모든 종교와 사상에서 추출한 온갖 좋은 것들을 적절히 혼합”시키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뉴에이지 운동이 만일 인류가 축적한 ‘온갖 좋은’지혜를 통합시키고 있다면, 그걸 두고 나쁘다, 말할 수 없다. 만일 뉴에이지 운동이 ‘온갖 나쁜’것(좋고 나쁨의 잣대 자체도 주관적이겠지만)을 통합시키고 유포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것을 단죄할 수 없다. 예수도 말하지 않았던가? 나를 반대하지 않는 것은 나를 지지하는 것이다.

뉴에이지 운동의 문제는 오히려 그 내용에 있다기보다, 일부 흐름의 유포방법에 있다고 하겠다. 그들은 결코 값싸게 수행법을 전수하지 않는다. 대개 미국에서 수입된 초능력 개발 프로그램은 고가의 로얄티를 본사에 제공하면서 영성적 상업주의의 물결을 타고 있기 때문이다. 고가의 프로그램일수록 프로그램이 정교하고 잘 짜여 있는 게 사실이다. 일찍이 실용주의 심리학이 발달한 미국은 개인과 집단, 기업을 상대로 수없이 많은 자기 개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막대한 이익을 챙겨왔다. 가난한 이들은 절대로 이들 뉴에이지 그룹이 제공하는 ‘웰빙 well being’에 참여할 수 없다.

다만 나름대로 마음공부에 전념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비용과 상관없이 서로 지혜를 나누는 분위기 역시 공존한다. 그러므로 뉴에이지 운동을 단순히 값싸다 비싸다 하는 말로 재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교회에서 제공하는 영성 프로그램 역시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을 만큼 값싸지 않을뿐더러, 실상 생계를 걱정하는 가정에서는 거저 베푼다 해도 시간이 없어서 참여할 수 없다. 그런 것은 한가한 중산층 전업주부 신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가톨릭교회는 초월에 대한 현대인의 관심/욕구를 제대로 읽지 못한다고 바티칸리포트가 자평(自評)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사제들조차 ‘초월’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자기초월이란 대개 불우이웃돕기 수준이다. 제 욕심을 좀 줄이고(초월하고), 여유있는 것을 불쌍한 사람들과 나누는 공덕을 베풀자는 것이다.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하여 자기(에고)를 넘어서는 영적 혁명을 촉구하지 않는다. 교회제도의 비합리성과 무관하게, 신자들은 교회 안에서 ‘합리적’(현실적) 신앙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합리적 신앙은 가정의 안정을 가져오지만, 그 안에 사는 개인에게 어떤 영적 해방감을 맛보게 하지 않는다. 신자들은 직장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끊임없이 ‘의무’만을 요구받고 있다.

한상봉/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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