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떠나야 교회가 산다-12]

“현대인들은 개인화된 사회에서 고독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남에게 인정받고 특별한 존재로 대접받기를 원하지만, 가톨릭과 같이 거대한 종교에서는 개인을 기억해 주거나 특별한 존재로 대우하기 힘든 반면 뉴에이지 운동에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다양한 참여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기꺼이 최고의 존재로 대접해 주고 있다.”(바티칸리포트 5) 

바티칸리포트의 이 문항을 읽으며,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미래사목연구소(소장 차동엽 신부)에서 발행하는 <참 소중한 당신>이라는 잡지 이름이다. 이른바 개인주의 사회에서 ‘개인’에게 주목하지 않는 종교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뼈아픈 각성에서 이런 잡지의 이름이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뉴에이지운동은 정말 ‘개인’에게 주목하는 운동이다. 그래서 세계적인 호응을 받고 있는 운동이다. 남녀노소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거룩한 신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잠들어 있는 신성의 불꽃을 다양한 프로그램 또는 수행법을 통해 일깨우자고 선전한다. 우리 각자는 ‘작은 우주’이며, 이 작은 우주는 ‘거대한 우주’에 접속되어 있으며, 채널링을 통하여 소우주가 대우주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깨달음을 얻자는 것이다.

▲ 말로는 '참 소중한 당신'이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가난한 이들과 권력에서 제외된 이들을 돌보지 않는 신앙은 '회칠한 무덤'과 다를 바 없다. (사진/한상봉 기자)

그러므로 뉴에이지운동은 이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현재 의식수준을 따지지 않고 받아들인다. 지금은 잠들어 있지만, 그는 본질적으로 신(神)이기 때문이다. 민족종교 가운데 동학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세상에서 핍박받는 이들이 오히려 하느님임을 알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에서 들어온 뉴에이지 그룹은 일명 ‘계급성’을 떼어내고 보편적인 인간의 신성을 말하고 있지만, 동학에서는 며느리가, 아이들이 곧 하느님이라고 적시(摘示)한다. 이는 동학의 출발 자체가 민중해방운동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향성에 비추어 말하자면, 동학의 취지가 그나마 그리스도교의 인간해방론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비천한 처지에 있는 그 사람 역시 ‘참 소중한 당신’이라고 그리스도교 전통과 동학전통에서는 동일하게 발설한다.

실상 뉴에이지운동에서 인간이 곧 하느님이라고 표현하는 데서, 그리스도교 안에서는 이단 시비를 일으키고 있다. 어떻게 흙처럼 비루한 인간을 지엄하신 하느님과 비교할 수 있느냐는 영웅적 신앙심을 불태운다. 그러나, 정작 성서에서는 인간이 하느님의 호흡을 얻어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진술한다. 그러므로 인간성 안에는 신성이 깃들어 있으며, 인간은 존엄한 존재가 된다.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히브리 노예들을 하느님께서 해방시키신 것은 그들의 상황이 그들의 신성을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고통 받고 있을 때, 인간의 원상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께서 고통 받는 것과 진배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 해방 사건은 곧 하느님 해방 사건이며,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이 구원될 때 하느님 스스로가 구원되는 것이다. 자녀들이 행복할 때 그 부모가 행복을 느끼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도 마이스터 엑카르트 같은 신비가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인간의 목적은 신화(神化)에 있다”고 발설해 왔다. 그러므로 뉴에이지운동에서 개인을 신적인 존재로 격상시키고, 자신 안에 있는 신성(그리스도교적으로 말하면 모상성)을 발견하려는 노력 자체를 비난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 신성의 내용이 무엇인지가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같은 교인들 사이에서도 믿는 하느님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교리와 무관하게 제 경험과 이해관계에 따라서 신을 창조하고 폐절한다.

또 다른 문제는 교회 안에 아예 ‘개인’이 자리 잡을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참 소중한 당신’은 대체로 ‘사제’다. 수녀조차도 ‘덜 소중한 당신’인 경우가 많으며, 모든 신자들의 관심은 사제에게 집중된다. 교회 안에서 신자들은 말 그대로 ‘신자대중’이다. 사제는 이 무식한 대중들을 대신하여 하느님께 제사를 봉헌하고, 교훈으로 양떼들을 가르치며, 이 대중들의 죄를 용서해주고, 자신들의 거처는 성소(聖所)가 된다.

교계제도 자체가 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 변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관행적으로 법적으로 하향식이며, 사제 중심이다. 실상이 이러할진대, 신자대중을 향하여 “당신들은 참 소중한 당신입니다”라고 아무리 말한들 기득권자가 가진 여유로운 아량이거나, 또는 신자이탈을 막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애처로운 아부로 들린다. 지금 우리 교회 안에서 당장에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참 소중한 당신’이 아니라 ‘참 평등한 당신’이다. 사제와 신자들의 평등한 관계 위에서 나눠지는 사랑고백만이 참된 신뢰를 낳는다. 그래서 참 소중한 ‘우리’가 되는 것이다. 일방적인 것은 사랑조차도 폭력이 되는 까닭이다.

한상봉/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