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홍성담, <동행-유다와 예수>의 필자

지난 2010년 10월부터 2011년 5월까지 총 60회에 걸쳐 민중화가 홍성담 씨의 소설이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연재되었다. 홍성담 씨는 지난 2006년 5월 광주를 다룬 ‘십자가의 길 14처’를 그리기도 했던 작가로, 이번에는 모두 1300매에 달하는 소설을 썼다. <동행-유다와 예수>라는 제목의 소설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배신자의 오명을 뒤집어 쓴 유다를 예수의 가장 신뢰할만한 동지로 삼았다. 때로는 유다의 심정으로 예수와 당 시대를 바라보았으며, 예수의 심정으로 하느님나라 운동을 바라본다. 특별히 이 소설은 화가의 필체로 특별히 회화적이고 묘사적인 질감을 느끼게 하는데,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자유롭게 예수와 유다를 둘러싼 한 시대와 사람을 조명하며 상상력을 펼치고 있다.

연재를 마치고 경기도 안산에 있는 홍성담 씨의 작업실을 찾았다. 홍성담 씨는 소설이 연재되면서 거의 6개월 동안 다른 작업을 전혀 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특유의 완벽함에 대한 결벽이 문장과 삽화에 그대로 녹아내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예수를 이해하기 위해 난데없이 신학을 공부하고,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도 꼼꼼히 새겨 읽었다. 그리고 복음서와 역사적 기록만으로 채울 수 없는 단서를 찾아내기 위해 기록의 행간을 상상력으로 읽어 내렸다.

▲ 홍성담 씨는 이번 소설을 연재하면서 60여 장의 삽화를 덧붙였다.(사진/한상봉 기자)

한상봉: 연재를 끝내신 소감이 어떠신지요?

홍성담: 한번은 다루고 싶었던 주제를 다룬 것 같아요. 지난 6개월 동안 예수에 푹 파묻혀 지냈던 거죠. 이제 미루어두었던 일을 마무리해야 될 것 같기도 하고, 다 연재하고 나니 아쉬움이 남네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부분도 있고, 구성도 좀 엉성하다는 느낌도 드는데, 그래도 한 60%는 이 소설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낸 것 같기도 하고요.

요한과 사뭇 다른 방식으로, 예수

한상봉: 처음에 연재를 시작할 때는 조회수가 얼마 없었는데, 예수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만나는 장면부터 조회수가 엄청 뛰어 오르더군요. 소설 구성상 막달레나부터 다루었으면 요즘 독자들에게 더 흥미로울 수도 있었겠다 싶더군요. 그런데 소설을 구상하면서 제일 먼저 해결하고 싶었던 문제가 있던가요?

▲ 작가 홍성담 씨. (사진/한상봉 기자)

홍성담: 성경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요한과 예수의 문제를 제일 먼저 규명하고 싶었어요. 복음서를 꼼꼼히 읽다보면, 예수가 요한에게서 어떤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아요. 경쟁의식도 있는 것 같고. 예를 들어, 처음엔 예수가 요한 옆을 얼쩡거리면서 떠나지 않죠. 그리고 강 건너에 있는 예수를 보고 요한이 말합니다. 저 녀석은 크게 될 놈이라고 말이죠. 예나 지금이나 인간관계는 다 마찬가지죠.

예수 시대를 가장 가까이서 묘사한 사람은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인데, 그의 <유대고대사>를 보면, 요한에 관해서는 대략 2페이지 정도 할애하고 있는데, 예수에 대해서는 두어줄 밖에 기록을 남겨놓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예수 사후 30-40년이 넘도록 유대 사람들에게는 예수보다 요한이 세속적으로 더 유명했던 모양입니다. 그만큼 요한이 더 넓게 영향을 끼치고 있던 셈입니다.

요한은 에세네파와 비슷하게 청빈 계율을 지켰던 것 같은데, 에세네는 일정한 조직과 규약을 지니고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었습니다. 입회할 때도 일정한 시험을 통과해야 했지요. 요한은 이런 점들이 공동체와 민중을 동떨어지게 만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요한은 청빈을 지키되, 문호를 개방하고 공동체를 맘껏 열어보리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야외로 강가로 뛰쳐나간 것입니다. 그게 그 당시 죄인 취급받던 민중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요르단 강을 중심으로 세례운동을 전개하면서 대단한 인기를 얻게 되지요.

예수는 이런 요한에 대해 콤플렉스를 느낀 것 같은데,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두고 무어라 하는지’ 묻습니다. 엘리야라고 한다면 괜찮았겠지만, ‘죽은 요한이라 하더군요’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무척 서운했을 것입니다. 그런 감정이야 얼마든지 생길 수 있지요. 복음서의 행간과 행간 사이, 낱말과 낱말 사이에 감정이 숨어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요한에게서 벗어나려고 무진 애를 쓴 것 같기도 합니다. 요한의 폭풍 같은 혁명적인 방식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이지요.

요한의 설교방식이나 말법은 예수와 너무 달랐습니다. 요한은 대단히 직설적이고 마치 창을 던지고 활을 쏘는 것처럼 ‘직진의 형식’이었습니다. 요한의 사제가문의 사람이라서 민중경험이 별로 많지 않았을 데니, 다른 이들의 마음을 모두 헤아리면서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예수는 목수 출신이라고 하잖아요. 그게 본 직업은 아니더라도 민중 속에서 노동도 하고 농사도 지으면서 어울렸던 사람입니다. 어려서부터 글자도 안 배운 채 농사도 알고 민중들의 삶의 방식을 알았기 때문에, 비유를 들어 아주 쉽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스타일이었습니다.

한편 요한은 내가 소설에서 아파스 바위라고 칭한 그런 요르단 강 어느 장소에 공동체를 이루었던 것 같아요. 요한은 세례운동을 하면서 요르단강가에 정착해 있었으니까요. 거기에 깃발을 꽂고 있으면 사람들이 몰려오고 하는 거죠. 그런데 예수가 갈릴래아에서 활동하실 때에는 전혀 다른 방식을 취했습니다.

당시 갈릴래아 호수 근처에는 14개의 도시가 있었다는데, 예수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고 다녔던 것입니다. 홍길동도 그랬거든요. 홍길동은 본래 수적(水賊)이라서, 그 당시 하이웨이였던 물길을 따라 다니며 활동을 했습니다. 나아갈 바다와 숨기 좋은 산이 있는 변산에 은둔처를 마련하고 전라도 어디를 쳤으면 바로 배를 타고 위로 올라가 경강 마포나루 어디에 배 숨겨두고 한양에 올라가곤 했죠. 이걸 보고 사람들은 축지법을 썼다고 하는데, 최첨단 교통수단인 배를 이용한 거죠. 예수 역시 배를 이용해 갈릴래아호수 주변을 마음대로 다니며 활동했다고 봐요. 예수에게는 배를 잘 부릴 줄 아는 어부 출신 제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안성맞춤이었죠.

이처럼 하느님나라를 향한 지향은 예수와 요한이 비슷했지만, 조직론과 활동방식조차 요한의 방식을 갈아엎었습니다. 이를테면 예수와 요한은 선의의 경쟁자였던 셈입니다. 복음서의 유년기 이야기에서 수태한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나는 장면을 서술한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어렸을 때 첫 인상이 중요하잖아요.

예수의 사랑 프로젝트, 예루살렘으로

그런데 문제는 왜 예수가 갈릴래아에서 계속 활동하지 굳이 죽을 걸 알면서 예루살렘에 갔는지가 문제입니다. 왜 느닷없이 예루살렘을 향해 죽음의 행진을 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책에서도 어느 신학자도 그걸 가르쳐 주지 않고, ‘왜?’라고 묻지도 않더군요. 결국 상상력을 발동해서 해답을 찾아보아야 했습니다.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루트로 정한 길은 요르단강가를 따라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길을 따라가다 예리고를 거쳐 예루살렘에 닿는 여정이지요. 아마 이 지역은 세례자 요한의 세력들이 있었을 테니, 아마 그들 ‘요한을 따르는 좌파 세력’들을 규합하려고 시도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유월절이란 ‘해방절’이고, 혁명을 위한 가장 좋은 시기였던 셈입니다. 아마 그 과정에서 지식인들도 동조하고 나섰던 것 같은데, 반로마의 정서와 반 헤로데 왕가의 정서가 민중들에게서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던 탓입니다. 이들 지식인들은 여론 형성의 리더들로서 기득권 유지를 위해 나서긴 하지만, 결국 예수만 남고 다 흩어져 버리거나 회유 당했을 것입니다. 지식인들은 민중의 요청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나섰다가 권력층이 한 입 베어주면 회유 당하곤 했던 것입니다. 결국 신흥 랍비인 예수만 총대로 내세우고 지식인들은 파산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가 호명한 것은 ‘사랑 프로젝트’인데, 용서와 화해를 이루자는 이 프로젝트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쳐도 좋을 것이라고 예수는 여겼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예수는 예루살렘에 가서 재야단체나 우파 지식인들과 성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광장에서는 순례객들을 상대로 대중연설도 하고 그랬을 것 같습니다. 또한 최후의 만찬 역시 다락방에 숨어서 12제자와 호젓하게 거행한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행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햇볕이 좋은 중동에서 다락방은 우리와 개념이 달랐을 것 같습니다. 훤히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옥상 같은 곳이겠지요. 거기서 제자들뿐 아니라 슈퍼스타를 따라 다니는 군중들과 더불어 새로운 메시지를 선포한 셈이죠.

▲ 그림/홍성담

유다는 배신자인가?

한상봉: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가장 중요한 기억, 빵 나눔과 세족례를 행한 것은 나눔과 섬김의 자세로 살라는 새로운 계명, 선생님이 말하시는 ‘사랑 프로젝트’를 상징적인 행동으로 요약해 주는 것이기도 하겠네요. 그런데 유다가 예수의 밀고자로 나타난 배경은 무어라고 볼 수 있을까요?

홍성담: 예수가 연행당해서 가야파의 저택에 끌려간 뒤에 제자들이 모두 도망갔는데도 유독 베드로만이 가야파의 저택까지 따라 들어간 이유를 먼저 해명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서에서는 닭이 우는 동안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베드로가 답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역시 베드로의 자괴감의 한 표현일 수 있겠습니다. 사실 그 시점에 예수는 베드로를 보았다는데, 예수는 당시 성전 안뜰에 있었으니, 그렇다면 베드로가 성전안뜰까지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냐는 의문이 남는다. 당시 가야파는 예수를 연행해 오긴 했지만, 그를 기소할만한 딱 부러진 죄를 밝힐 수 없었고,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예수의 제자집단과 모종의 합의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문을 들게 합니다. 제자들이 모여 먼저 합의를 하고 협상대표로 베드로가 가야파를 만나고 예수의 죄를 증언하고 돌아온 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십자가형에 처할 정도의 중죄인의 제자들을 로마와 유대당국이 그냥 놓아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체포당할 때도 그렇고, 예수가 죽은 뒤에도 제자들은 버젓이 큰길을 따라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유대 당국과 맺은 모종의 합의 없이는 현실성이 없는 일입니다. 즉, 다른 제자들을 다 살려주는 조건으로 예수가 대신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스승을 배신했다는 엄청난 자괴감, 그리고 자신들을 대신해 예수가 홀로 죽었다는 스승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에 괴로웠을 것입니다.

여기서 유다가 오히려 다른 제자들을 대신해 배신자요 밀고자로 죄를 덮어쓰게 됩니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다른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유다는 혼자만 남무 유다 사람이었고, 다른 제자들은 대부분 갈릴래아 사람들이었으니, 결국 갈릴래아 사람들이 유다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감정상, 유다는 평소에도 다른 제자들의 원망의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 높습니다. 유다는 제자공동체의 전대를 맡고 있었고, 전대를 맡고 살림살이를 챙기는 사람은 언제나 다른 성원들에게 미움을 받기 쉽지요. 자금을 아껴 쓰느라고 애쓰면 다른 제자들은 야박하게 군다고 핀잔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런 국외자에게 대한 핀잔과 서운함이 쌓이다보면, 죄를 뒤집어씌우면서도 마음이 덜 불편할 수도 있겠지요.

사실 예수가 전대를 끝까지 유다에게 맡긴 것을 보면, 예수는 유다를 무척 신뢰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전대를 맡고 공동체의 경제를 운영할 만큼 수완이 좋은 사람이었지만, 강직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 예수가 죽은 뒤에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고 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똑같이 예수를 배신하고 달아났던 제자들은, 더구나 세 번이나 배신했던 베드로도 멀쩡하게 살아서 활동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를 더 사랑한 자는 유다였는지도 모릅니다.

예수 부활, 미학적 사실

한상봉: 예수의 죽음 이후에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증언한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홍성담: 아마도 제자들은 뒤늦게 자신들을 위해 스승이 죽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자신들의 목숨을 구하려고 예수를 버렸던 자신들에 대한 모멸감을 벗어던지기 위해서라도 목숨을 걸고 다시 예수를 증언하게 된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듣기로, 예수는 인류 구원을 위해 죽었다는 데, 이것은 현실성이 없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일차적으로 자기 패밀리를 위한 것입니다. 제자들을 살리려는 것이었죠. 그게 확장되고 사상적 골격을 갖추면서 세상과 모든 인류를 위한 대속의 의미로 커져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예수의 죽음은 제자들을 대속한 죽음이죠. 이렇게 예수와 제자 사이에 개인적 차원에서 발생한 사건이기에 제자들에게 강력한 에너지로 작동하게 된 것이지요. 자신들을 위해 죽은 그분을 위해서라면, 평생 목숨 바쳐 증언해도 좋을 것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지요.

한상봉: 그렇다면, 소설에선 부활한 예수가 유다에게 “술 한 잔 다오!”라고 말하는 장면 정도로 처리했는데, 부활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인가요?

홍성담: 어차피 종교란 과학으로 해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과학을 뛰어넘어 상상력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고 하면 다들 미친놈이라고 하겠지만, 미학적 입장에서 보면, 예수는 당연히 부활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학은 순환의 논리죠. 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땅속에 들어가 거름이 돼, 나는 그 위에 씨를 뿌려, 아버지의 육신이 거름이 되어 그 거름을 먹고 새싹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고, 나는 다시 그 열매를 먹으면서 죽은 아버지가 바라던 세상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죠. 이른바 판타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미학에서는 얼마든지 사실이 될 수 있습니다. 언어로만 말하면 판타지인데, 화면에 그려놓으면 사실이 되는 거죠. 그래서 그림은 애당초 종교적이라는 말이 있죠. 그처럼 예수도 어떤 특별한 형식 안에서 부활했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게 제자들에게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은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그림/홍성담

전대와 청빈, 그리고 공동체

한상봉: 그런데 마지막으로 남는 의문은 예수처럼 ‘가난’을 강조한 이가 왜 ‘전대’를 허용했는지 하는 것입니다.

홍성담: 전대와 청빈은 한꺼번에 생각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예수의 제자공동체가 왜 청빈을 강조했는가? 그 이유가 단지 누굴 도와주기 위함이었나? 아니면 제자들의 양식을 제공하려 함인가? 묻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구석도 있겠지만, 저는 더 커다란 목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가 깊이 동의했을지는 모르지만, 저는 소설에서 그걸 ‘신이 깃든 사람의 마을’이라는 유다가 프로젝트에 따른 게 아닐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분히 제 개인적으로 우리 시대에 필요한 부분이라고 여겨서 삽입한 부분입니다. 즉, 공동체의 회복에 대한 관심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광주항쟁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도시공동체가 살아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누가 총 들고 나와서 광주를 지키겠다고 하겠습니까? 광주 도시공동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 헌혈이나 주먹밥인데, 광주 도시공동체는 밥상머리에서 피로 맺어진 공동체였습니다. 그래서 도청에 끝까지 남아서 싸우고, 사후에라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제는 그런 공동체를 찾아보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신자유주의로 자본이 획일적으로 지배하는 세계화가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화가로서 ‘광고’를 중심으로 말하자면, 모든 광고는 한마디로 “혼자서라도 어디서든 잘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만 있다면” 말입니다. 카드나 스마트폰, 3D, 평면티비만 있으면 골방이든 어디서든 세상을 다 볼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 자동차를 사면 모든 일이든 할 수 있고, 새로운 너를 창조할 수 있다고 설득합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자본은 개인을 파편화시키고, 개인 사이의 틈이 넓으면 넓을수록 시장이 더 넓어지죠. 핸드폰 팔아먹고 아이패드 팔아먹고... 옛날엔 거실에 티비 하나면 충분했는데 이젠 각 방에 한 대씩 있어야 하고, 예전엔 아이들 방에 컴퓨터 한 대면 충분했는데, 이제는 올 무선으로 제 각기 노트북을 갖도록 합니다. 개별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미 국가나 민족 개념 자체도 실질적으로 무너져 있습니다. 단지 권력자가 그걸 이용해 자기 권력을 더 유지할 일을 만들 때마다 민족이나 국가를 호명할 뿐입니다. 이미 같은 나라 같은 민족이 공유하는 목표가 없습니다. 도시공동체, 마을공동체, 직장 공동체, 심지어 가족공동체마저 무너진 상태에서 “돈 벌자”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옛날처럼 모두 같은 생각을 해야 한다거나, 공동행동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게 아니고, 우리의 처지와 조건에 맞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상봉: 그렇다면, 초기교회의 가정교회 형태가 유다가 소설에서 구상했던 ‘신이 깃든 사람의 마을’의 다른 모습이라고 봐도 될까요?

홍성담: 그렇다고 봅니다. 초기교회가 생길 무렵에 유다가 무너지고 민족이 흩어지고 외세의 종교적 상징들이 엄청나게 밀려들어오게 되는데, 이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엄청난 탄압에 직면하죠. 이런 박해를 견뎌내려면 제자집단들이 더욱 세포화될 수밖에 없었겠죠. 그게 가정교회라고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지만 강력한 세포조직으로 네트워크화 되어, 일 년에 한두 번 카타콤바에 모이기도 하고, 상징적인 소통도 하고 그랬겠죠, 가정교회가 그때 처지와 조건에 맞는 공동체 형식이었다고 봅니다.

한상봉: 마지막으로 예수가 정작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지요?

홍성담: 예수가 겉으로 드러내는 마지막 말은 화해와 용서와 사랑이지만, 그리로 가기 위해서는 투쟁의 과정에서 비겁하게 비껴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지식인들처럼 기회주의적인 선택을 하지 않고, 예수처럼 끝까지 책임지는 과정에서 발언되는 용서와 화해와 사랑만이 설득력을 지니게 됩니다.

예수 당시에 민중들의 반란이 계속 있어 왔고, 요한을 흉내 내서 민중들을 충동질 하는 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민중들을 더 큰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이 시작한 운동에 책임을 지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십자가라는 그 책임의 끝에서 화해와 용서와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냥 부둥켜안고 사랑이라고 말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가 예루살렘 입성 자체가 죽음으로 가는 여정이었는데, 덧없이 사랑이나 용서를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