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커스 보그의 눈으로 역사적 예수 읽기-8]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는 미국 오레곤 주립대학 교수이고,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는 ‘예수 세미나’의 대표적 성서학자이다. 그의 글은 쉬우면서 학문적 양심에 솔직하고, 신앙의 성숙을 향한 열정도 담겨 있다. 교회에서의 가르침이 불합리하다고 판단해 어린 시절 다니던 교회를 떠났다가 20여년만에 돌아와 지성적 신앙생활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여러 저작들을 통해 열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은 그의 책 <예수 새로 보기>(원제 Jesus : A New Version, 1987)의 요지를 추리면서 오늘날 어울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어떤 것이어야 할지 간단히 정리해본 글이다. -필자

유대교 갱신 운동 

예수는 그리스도교를 창시하지 않았다. 다만 이스라엘을 갱신하려 했을 뿐이다. 유대 사회에 새 힘을 불어 넣어 변혁시키려 했을 뿐이다. 예수가 주요 제자단을 이스라엘 지파의 숫자와 동일하게 열둘로 정한 것도 제자들을 새 이스라엘, 참 이스라엘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방인이 사는 곳으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마라.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마태 10,5-6) 예수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마태 9,36, 15,24 참조) 이스라엘 백성에 진정하고 신선한 에너지를 불어넣으려 했다. 예수로 인해 생겨난 운동은 유대교를 다시 활성화시키기 위한 운동이었던 것이다.(176) 

기쁨과 자비의 공동체 

예수와 함께 하는 이들에게는 기쁨이 있었다. 예수의 선배 요한이 금욕적 금식을 자주 한 데 비해 예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마르 2,18-20) 예수와 지내는 일이 즐거운 일이기도 했다는 뜻이다. 예수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식사를 종종 같이 했고, ‘먹보’요 ‘술꾼’이라는 힐난을 들을 정도로 잔치 분위기를 즐겼다.

그만큼 적대자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죄인들과 함께 어울린다는 혐의 때문이었다.(마르 2,15-16; 루가 19,7, 마태 11,19) 이 때의 ‘죄인’은 오늘날처럼 보편화되거나 신학화한 개념이 아니라, 특정 계층, 즉 “아웃캐스트”(버림받은 이들)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가난한 사람들 다수가 여기에 해당했다.(184) 그래도 예수에게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본 이들은 어느 정도 예수의 이러한 정신에 공감했다.

예수 공동체에 즐거움을 준 원천은 하느님의 ‘자비’였다. 1세기 유대교가 하느님의 ‘거룩’을 강조한 데 비해 예수는 하느님의 ‘자비’에 초점을 맞추었다.(루가 6,36) 하느님이 거룩한 분인가 자비로운 분인가 하는 판단 자체보다는, 하느님을 드러내고 신앙 공동체의 삶을 표현하는 데 어느 쪽이 더 중심적인 패러다임인가가 중요했다. 예수는 하느님의 자비가 신앙 공동체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181)

죄인으로 낙인찍힌 이들도 하느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예수의 입장과 자세는 당시 기존 주류 질서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성(聖)과 속(俗), 의인과 죄인의 구별에 근거한 유대교 사회에 대한 위협적인 도전이었다. 

예수의 여성 친화 

특히 예수는 여자들과 많이 어울렸다. 당시는 철저하게 남성 주도적인 사회였다. 지식도 제도도 남성이 만들어 기록하고, 무엇이든 남성에 의해 남성들에게 전수되고 남성적인 관점을 반영했다.(186) 좋은 아내는 칭찬받았지만, 여성이라는 성 자체는 좋게 여겨지지 않았다. 유대교 랍비들은 회당에서 예배드릴 때 “나를 여자로 만들지 않으신 주여 찬양 받으소서” 하며 기도했다.(187) 회당에서 여자들은 한쪽 구석에 앉도록 되어 있었고, 사람을 세는 숫자에 포함되지 않았다. 당연히 토라를 가르칠 수 없었고, 배우기도 힘들었다. 사회적으로도 남성과 여성은 엄격히 구별되었다.

사정이 그런데도,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 가운데는 여성들도 있었고, 어떤 여자들은 예수 운동을 재정적으로 후원했다. ‘선생(랍비)’ 소리를 듣는 남성 주변에 여자들이 따르는 광경은 당시로서는 도발적인 것이었다.(189) 가령 율법 전문가인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를 받아 식사를 하는 예수의 발을 ‘행실이 나쁜 어떤 여자’(아마 창녀)가 눈물로 닦고 머리카락으로 비비는 광경(루가 7,36-50)은 가히 충격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도 예수는 그 여자에게서 사회적 차별을 보지 않았고 두지 않았다: “네 죄는 용서받았다.”(루가 7,48)

그리고 예수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집에서 식사 준비 등 전통적인 여자의 역할을 감당하던 언니 마르다 못지않게, 자신과 함께 율법을 공부하는 동생 마리아를 칭송했다.(루가 10,38-42) 율법을 공부하는 거룩한 일에 남성과 여성의 능력과 가치에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족이 아닌 여자와는 공공연히 대화조차 하기 힘들던 시절,(요한 4,27) 그리고 여자는 열등하다고 간주되던 시절, 랍비로 불리던 예수의 그러한 행태는 놀라운 것이었다.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등 여러 여자들이 재산을 바쳐 예수 일행을 도왔다. 이들은 예수의 장례 장면까지 지켜보았고(마르 15,47), 예수의 빈 무덤을 확인했으며(마르 16,1), 부활한 예수의 발현을 최초로 체험하기도 했다(요한 20,11-18) 그리스도교 신앙의 시작은 이러한 여자들로부터 시작되었던 셈이다. 

교회, 예수 정신의 쇠퇴 

이런 분위기는 한 동안 초기 교회에 반영되기도 했다.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갈라, 3,28)

하지만 후기에 기록된 문서 중에는 유대교 주류의 가부장적 관점이 반영되기도 했다. 여자들은 순종해야 하고 조용해야 하고 남자를 가르칠 수 없으며 세상에 죄를 가져온 책임이 있다는 논지에서였다: “여자는 조용히 복종하는 가운데 배워야 합니다. 나는 여자가 남을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하와가 속아서 죄에 빠진 것입니다.”(1디모 2,11-14) 교회가 제도화하면서 예수 운동의 차별 없는 급진성이 쇠퇴하게 된 것이다. 

자비의 정치학 

예수가 여성과 가까웠던 것은 예수가 남자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당대의 문화적 차별에 대한 도전 정신의 반영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예수는 유대교의 이분법적, 차별적 규범들을 무너뜨리고자 했다. 유대인/로마인, 의인/죄인(아웃캐스트), 남자/여자, 부자/빈자 사이의 차별을 두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태도가 아웃캐스트, 여자, 빈자 등과 더 가깝게 지내게 되는 모양새로 나타나게 되었지만, 예수는 기본적으로 ‘거룩의 정치학’이 배제한 사람들을 포용하는 ‘자비의 정치학’을 펼쳤다.

그 기본 정신은 당시의 관례, 외적 형식을 영성화한 데서 비롯되는 것이었다.(200) 예수는 거의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 이해했다. 사람이 손으로 돌을 쌓아 올려 지은 성전이 아닌,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 “아브라함의 후손”과 동일시되지 않는 진정한 혈통 개념을 중시하는 그런 식이었다.

그 기본에 있는 것이 “자비의 정치학”이었다.(203) 자비의 정치학은 이스라엘 사회가 인습적인 지혜, 거룩 지향성, 배타주의, 가부장제를 뒤섞어서 만들어낸 장벽들과는 모순되는 것이었다. ‘거룩’은 필연적으로 거룩하지 않은 것과의 ‘분리’를 초래하지만, 예수는 분리가 낳은 소외를 자신 안에 껴않았다. ‘분리’가 아닌 ‘포용’으로 평화를 지향하는 대안적 공동체를 창조함으로써, 자신이 속한 사회를 변혁하려 했던 것이다: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여러분도 자비로우시오.”(루가 6,36) 

* ( )속 숫자는 마커스 보그, <예수새로보기> 김기석 옮김(한국신학연구소, 2004)의 쪽수입니다.

이찬수 / 종교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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