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의 필름창고] 닫힌 교문을 열며, 이재구 감독, 1991년작

“이 영화 상영과 관련, 최근 교육부가 각 시․도 교육청에 고교생의 관람금지 지시를 내리는 등 강경대응하고 있어 <파업전야>(90년), <오 어머니, 당신의 아들>(91년)에 이어 또 한차례 대학생과 공권력의 충돌이 우려되고 있다.” (<경향신문> 1992.04.22)

한편의 학생들이 전경들과 대치하거나 싸우는 동안 한편에서는 영화를 본다. 영화가 끝나면 이러한 임무를 교대한다. 이렇게 영화를 보았던 시절이 있다. 만드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던 이 영화는 이렇게 상영도 버거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것 아니었던 영화를 군인이 통치하던 그때에는.

1989년 군인통치의 막바지 무렵 전교조가 창립되었다. 의식 있는 교사들의 거대한 조직체 전교조는 입시 위주로 치달리며 갈수록 어두워지는 교육현실에 강력한 문제제기를 하며, 그것을 타개하기 위한 희망의 교육, 참교육을 지향하며 만들어졌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은 그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정교하고도 세련된 허브인 교육과 관련해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 했다.

▲ 영화 <닫힌 교문을 열며>

가슴아픈, 그리고 가슴 뜨뜻한

노태우 정권은 가입 교사를 해직하겠다는 입장을 강고하게 드러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우리 몇몇은 하도 걱정이 되어 전교조에 가입한 중학교 때 담임 선생님을 찾아 뵙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결국 1989년 그 뜨겁던 여름 1,500여 명의 전교조 가입 교사는 교단 밖으로 밀려났다. 중학교 3학년 때 칠판에 과감하게 ‘5․16쿠데타’라고 적었던 국사 선생님도 그중 하나였다.

이 엄청난 사건은 많은 학생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벌써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된 강경대로 인해 타올랐던 정국을 한순간 공안정국으로 만들었던, 6․3 정원식 사건은 그 심각한 상처와 깊은 관련성을 갖는다. 그토록 많은 선생님들을 교단 밖으로 몰아낼 때 교육부 장관이 정원식이었는데, 대학에 진학한 이른바 전교조 1세대들이 정원식을 보자 분노가 폭발했을 것이다. 이후 정원식을 향한 분노는 기껏 그가 서울시장이 되는 것을 막는 정도였을까.

이 영화는 그런 가슴 아픈 기억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전교조 창립 이후 대량해직이 있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 교사들의 시국선언이 있던 시절, 한 인문계 학교가 배경이다. 대학입시에서 소외된, 대학합격률에 목숨 거는 학교 입장에서는 학습 분위기에 도움을 주지 않는 아이들은 직업반을 선택하게 된다.

다분히 징계성이 농후한 인사조치로 직업반 학생들을 맡게 된 영어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L자로 시작되는 아름다운 단어가 무엇인지 묻는다. Love, Liberty 등이 나왔다. 아이들이 끙끙대지만 교사가 응하는 한 단어에 대답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Labor 노동이었다. 학생들이 조금 어리둥절해 할 때 영어 선생님은 노동이 모든 것의 근간이라며 노동의 아름다움과 신성함을 일깨워준다.(이 영화의 핵심적인 이 장면에서 참으로 멋있던 영어 교사역을 한 사람이 정진영이다. 국립중앙극장 극장장, 문화관광부 장관을 역임했던 배우 김명곤 씨, 험악한 역을 많이 하지만 실제로는 마음이 곱다는 박재동 화백의 부인 김선화 씨도 이 영화에 출현한다.)

가난 때문에 사진학과 진학을 포기하고 직업반에 들어간 진수는 다분히 진보적인 경석이를 통해 교지편집부에 들어가 사진기자로 활동한다. 편집부에서 처음에는 특별기획으로 일류대에 진학한 선배들을 찾아가 대화한 내용을 실으려 했으나, 노동자로 살아가는 선배들로 대상을 바꾸었다. 이 과정은 아이들에게 노동의 의미와 현실을 각성하게 하는 계기였다. 그러나 학교 측의 사전검열로 그 내용은 삭제되고 경석은 처벌을 받는다. 이 시기와 맞물려 시국선언을 했던 이혜정 선생도 해직당한다.

편집부 학생들은 검열당한 교지 버리기 운동을 전개하고 그들이 직접 만든 교지를 배포한다. 비 오는 날 경석과 이혜정 선생 그리고 그들과 뜻이 같이하는 많은 학생들이 정문 앞에서 침묵시위를 벌인다. 이에 학교당국은 교문을 굳게 닫아버린다. 그 멋있던 영어교사는 빈 책상과 교문 밖 그들을 보며 머뭇거린다. 비는 하염없이 몰아치고 눈은 자꾸 바깥을 향하게 된다. 도저히 안 되겠다. 교실 안의 아이들과 함께 비를 헤치며 모두를 둘로 갈라놓았던 굳게 단힌 교문을 활짝 연다. 그리고 모두 다시 하나가 된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는 엉망이다

▲ <아주 작은 것을 기다리는 시간>(생각의나무, 2011)
이 영화는 참교육과 노동의 의미를 결부시켜 만들어졌으며, ‘영화로 세상을 바꾸고 싶은’ 의지가 강력하게 드러난 수작이다. 영화를 보고 우는 사람도 꽤 있었던 것은 우리들의 상처를 일정 정도 더듬어주었기 때문이리라. 벌써 20년이 지난 영화이지만 이 영화가 전해주는 메시지는 아직까지도 절실하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는 엉망이다. 학교가 엉망이라는 사실을 다 아는데 손을 쓰지 못한다. 한 시골학교 국어교사 황주환의 자기고백서라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것을 기다리는 시간>(생각의나무, 2011)에서는 여전히 개선되지 않은 교육현실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아이들이 겪는 이 처참함이 무엇 때문인지 정직하게 말해야 한다. 적어도 내 판단에 따르면 우리 어른들, 바로 우리 사회 전체의 책임이다. 아이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교사와 부모들, 나아가 아이들의 고통 위에 자신들만의 자본과 권력을 구축하려는 세력까지 닿아 있다. 교육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교사의 폭력과, 사랑의 이름으로 자신의 욕망을 앞세우는 부모의 이기심, 그리고 경쟁과 효율의 신화로 자신의 배만 불리는 자본과 권력까지 연결해서 깨닫지 못한다면, 지금 벌어지는 학교의 억압과 모순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표현은 교육을 통해 열악한 처지를 개선한다는 의미를 담아 대물림이 고착화되는 것을 넘어서는 희망이 들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교육은 오히려 계층이동을 철저히 봉쇄하는 통로가 되고 있다. 어쩌면 한국사회는 보다 정교해진 신분제사회로 이동하고, 한국사회 전체는 소수 일류대학 출신의 영주가 다스리는 장원이 되어가는지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의 농노! 작금의 학벌 카스트 구조를 보면 이 말이 지나친 과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위 학부형들이 아이들 교육 때문에 너무 힘들어한다. 그들의 주름살을 급속도로 늘어나게 하는 게 바로 교육문제다. 우리는 아마도 상당 기간 동안 핀란드 교육을 예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계속 혼란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황주환 선생의 지적처럼 교육문제는 그 자체를 넘어 복잡하게 얽혀 있기에 한국사회의 근본적 변화와 맞물려 겨우 실마리가 풀릴 듯하다. 그러면서 우리 모두에게 한 치의 면죄부도 허용하지 않는 아주 냉혹한 문제임에 틀림없다. 내가 닥친 문제와 타인의 문제를 분리시키지 않고, 뒷담화를 남발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부분에서라도 치열하게 맞서지 않으면 희망은 전혀 없다. 그렇지 않고 희망을 가지려고 한다면 그 희망은 아마 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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