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준태 시인, 5.18기념재단 이사장

그는 만나자마자 “기억은 미래”라며 뭐든 새것만 좋아하는 세태를 꼬집었다. 5.18의 기억을 담고 있는 전남도청도 없애버리는 광주를 빗댄 것이다. 5.18 광주를 며칠 앞두고 찾아간 ‘5.18기념재단’ 이사장이자 5월 광주를 노래한 김준태 시인(베드로, 64세)이다. 그는 “광주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그런 인권도시가 아니다”라며 기억을 통한 희망을 노래한다.

김준태 시인은 1948년 전남 해남군 화산면 대지리 바다가 보이는 마을에서 태어난다. 그에게 고향은 상처와 생명의 근원에 닿아있는 곳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창문을 열어놓으니 / 달이 내게 다가와 어루만져준다 / 아 하늘의 달만이 나의 친구인가”라고 시작하는 ‘달밤’이라는 시를 쓰고 중학교 2학년 때 4.19학생혁명을 겪으면서 <사상계>를 탐독할만큼 조숙한 소년이었다.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 김준태 5.18기념재단 이사장
할머니가 부처님께 빌어 태어났다는 김준태 시인. “벌레 한 마리라도 밟지 말라”던 할머니의 말을 듣고 자랐다. 벌레라도 함부로 죽이면 나쁜 곳에 태어난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김준태 시인의 가족사는 참혹한 역사의 한복판에서 비껴나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노무자로 일본 오사카에 징용 당했으며, 아버지는 8․15 해방공간에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한 이력 때문에 보도연맹 사건에 연루돼 고향에서 집단학살을 당했다. 그때 시인의 나이 세 살이었다. 그 충격으로 어머니도 일찍 돌아가셨다. 그러나 김준태 시인이 기억하는 할머니는 아무도 탓을 하지 않았다. “내가 잘못했으니 새끼들을 먼저 보냈지”하는 거였다.

할머니의 이 마음은 ‘참깨를 털며’라는 시에 잘 드러나 있다.

산그늘 내린 밭 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한 게 있는 것 같다
한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 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 불어가면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댄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번만 기분 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 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참혹한 가족사 안에서도 원망하지 않는, 오히려 사람 죽음을 귀히 여길 줄 아는 DNA를 할머니에게서 타고난 김준태 시인이다. 그런 그가 젊은 한 때 베트남전에 참전한 것은 순전히 문학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현실을 두 눈으로 보고 싶었던 것일까? 청룡부대에 입대한 그는 영어를 잘 해서 ‘통역병’으로 있는 바람에 전장에는 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수많은 이유 없는 죽음을 보았다. 그리고 1980년 광주에 내려온 계엄군을 이끈 것이 전두환, 노태우 등 베트남전을 주도한 이들이었다는 아이러니를 경험한다.

▲ 5.18 기념공원 내 지하 추모공간에 세워진 동상. 살해당한 아들을 손에 들고 통곡하는 어머니 뒤로 광주항쟁 희생자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사진/한상봉 기자)

 

 

▲ 지하 공간에서 나오는 계단에서 바라본 시민군 조각상. (사진/한상봉 기자)

오월 광주에서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

광주는 죽음을 딛고 파스카의 신비를 구현할 것이다. 그때까지도 김준태 시인은 성당에 다니지 않았지만, “하느님이 내 몸에 닿은” 느낌을 받았다. 광주는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루살렘이었다.

1980년 7월31일
저물어가는 오후 5시
동녘 하늘 뭉게구름 위에
그 무어라고 말할 수 없이
앉아 계시는 하느님을
나는 광주의 신안동에서 보았다
몸이 아파 술을 먹지 못하고
대신 콜라로나 목을 축이면서
나는 정말 하느님을 보았다
나는 정말 하느님을 느꼈다

1980년 7월 31일 오후 5시
뭉게구름 위에 앉아 계시는
내게 충만되어 오신 하느님을
나는 광주의 신안동에서 보았다
그런 뒤로 가슴이 터질 듯 부풀었고
세상 사람들 누구나가 좋아졌다
내 몸뚱이가 능금처럼 붉어지고
사람들이 이쁘고 환장하게 좋았다
이 숨길 수 없는 환희의 순간
세상 사람들 누구나를 보듬고
첫날밤처럼 씩씩거려 주고 싶어졌다
아아 나는 절망하지 않으련다
아아 나는 미워하거나 울어버리거나
넋마저 놓고 헤매이지 않으련다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라면 피라미
한 마리라도 소중히 여기련다
아아 나는 숨을 쉬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사람이 만든 것이라면 하찮은 물건이라도
입맞추고 입맞추고 또 입맞추고 살아가리라
사랑에 천번 만번 미치고 열두번 둔갑하여서
이 세상의 똥구멍까지 입맞추리라
사랑에 어질병이 들도록 입맞추리라
아아 나는 정말 하느님을 보았다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는 단순한 시 한 구절이 아니었다. 죽음이 생명으로 건너가는 희열을 느꼈기 때문이다. 시내버스를 타고 가면서 사람들과 몸을 부대끼는 것도 너무 좋았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신뢰가 높아진 것이다.

▲ 밤 깊을수록 별이 더욱 빛난다는 사실이 희망입니다" 5.18기념재단 이사장실에 걸려 있는 액자. 신영복 선생의 글씨가 선연하다.(사진/한상봉 기자)

기도에 감전되어 가톨릭교회를 찾다

김준태 시인이 가톨릭교회에 입문하게 된 것은 우연적 필연이었다. 아무도 직접 입교를 권한 이는 없었지만, 어느 날 문득 광주대교구 양산동 천주교회에 다니던 아내(이명숙 베레나)가 울면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감전된 듯’ 빨려들어갔기 때문이다. 광주를 노래하는 시를 그렇게 많이 쓰고, 하느님이 몸속으로 스미는 경험했지만, 꼭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그동안 없었다. 그런데 아내의 기도를 보면서, 잊고 있던 그 하느님이 다시 몸속으로 밀고 들어온 것이다. “너, 왜 그동안 나한테 오지 않았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을 느꼈다.

2007년 늦게야 세례를 받은 김준태 시인은 지금도 주일미사를 거르지 않는다. 러시아 카자흐스탄에 갔을 때도 미사를 참석했다. 그는 “이 세상 전체가 하느님으로 꽉 있다”고 생각한다. “시도 하느님처럼 저절로 날아와야 쓰여진다”고도 했다. 그에게 시는 곧 하느님이고, 하느님이 곧 시다. 그래서 할머니가 할아버지와 아들을 죽인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듯이, 광주시민을 죽였던 가해자들도 용서할 용기가 생긴다. 용서해야 역사가 발전한다고 생각한다.

김준태 시인은 광주의 상처를 넘어서 이젠 남북이 화해하고 통일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처럼 남과 북도 빛처럼 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한은 북한보다 넉넉하니 북한을 안아줘야 한다고 여긴다. 그리고 우리 국민 모두가 평화의 일꾼(peace maker)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한마디로 “사랑으로 똘똘 뭉쳐진, 그러나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분”으로 기억한다.

▲ 5.18기념공원 내 추모공간에 새겨진 부조. 계엄군의 군홧발에 광주가 유린당하고 있다. (사진/한상봉 기자)

오월에서 통일로

김준태 시인은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5.18정신에서 계승해야 할 것으로 먼저 ‘민주주의’를 들었다. 또한 5월정신으로 통일을 이뤄야 하며, 결국 대동세상을 열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개인보다 사회와 나라를 위해 사랑을 바쳐야 한다. 이게 5.18의 가장 큰 덕목이다.”

5.18광주민중항쟁을 겪으며 시인은 울었다. 계엄군의 폭력에 짓밟히며 무서워 운 것이 아니라, 그 험악한 상황에서도 시민정신을 잃지 않았던 광주시민들의 두레공동체를 보고 울었다. 그들은 시민운명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계엄군이 물러난 이후에 이루어진 ‘해방광주’다. 이들은 계엄군의 집단발포 이후에 오히려 서로를 흔쾌히 끌어안아 주었고, 이를 두고 김준태 시인은 “모두가 하나 하나 예수 같았다”라고 말한다.

위기의 순간에 스스로 ‘동물이 아니라 인간임’을 드러낸 희망의 근거가 되어준 도시가 오월 광주라는 것이다. 따라서 김준태 시인은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던 아마르티아 센의 말을 빌어 “세계를 도울 수 있는 것은 나눔과 베품 뿐”이라고 말한다.

1987년 6월 항쟁과 이에 이어진 민주화 과정 역시 김준태의 문학에 영향을 끼쳤다. 김준태 시인은 광주가 한국 민주화의 중심 담론으로 떠오르면서 1988년 <아아 광주여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실천문학사)라는 시집을 발간했다. 그리고 1989년에는 판화시집인 <오월에서 통일로>(빛고을출판사)를 펴냈다. 오월광주에서 민주주의와 통일의 길을 열어간 것이다.

5,18 민중항쟁 25주년 기념으로 김준태 시인이 쓴 ‘오월에서 통일로’에서는 이렇게 노래한다.

오월 그날이 오면 아들 딸들아
아빠는 광주시 금남로 가톨릭센타 앞
한때 머리와 어깨가 잘린 가로수 밑 둥치에
새벽에 핀 꽃 한 송이 고운 손으로 놓는다
전남도청 앞 총구멍난 진냇과 담벼락을 틀어막고
언제 어디서나 웃어야 할 배꼽을 둥그러이 열면서
듣는단다, 내 온몸 안으로 뚝 뚝 떨어지는 하늘을!

그날이 오면 죽고 못살게 귀여운 아들 딸들아
아빠는 충장로 1가에서 5가까지 껑충껑충 걸어가
장미나 라일락꽃보다 더 아름다운 자유라는 여자
민주주의라는 여자, 평화라는 여자를 만나자마자
천둥번개 소나기처럼 동서남북 키스를 퍼 붓는다

(총칼과 철조망 녹여 삽 호미 쟁기보습으로 바꾸어
하늘땅 밭갈이하는 오월의, 나비 떼 날으는 금남로-
저 아스라한 민족의 지평선에 흙발로 밭고랑 일구고
콩, 보리, 밀, 호박, 마늘, 고추씨앗을 심고 뿌리어
남남통일 만세! 한라에서 백두까지 남북통일 만세!)

역사의 페이지 속에만 파묻어 놓을 수 없는 오월을
횃불로 훤히 밝힐 여자의 손을 부여잡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리움의 화신 남북통일이라는 여자!
정말이지, 그 순결하고 견결한 여자와 무등산을 넘어
지리산을 넘어서 백두산 상상봉으로 훨훨 날아간다

꼭두각시에 속고 속아 부대끼며 살아온 못난 아빠에게
천년을 산다는 무등산 귀목나무처럼 희망의 둥근 실체로
커 오르는 이땅 한반도 당당하고 당당한 아들 딸들아!
오월을 넘어서 보랏빛 오동나무 그 짙은 향기 듬뿍 싣고
광주발 평양행 고구려의 옛 서울로 달려가는 첫 새벽열차
기적소리.....들린다. 거대한 동체로부터 부웅 - 부우웅!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아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5.18 광주. 너무 무섭고 참혹해서 시를 쓸 수 없었다. 당시 전남고등학교 교사로 있었는데, 같은 학교 K교사의 아내가 남편을 기다리던 집앞에서 공수부대가 쏜 유탄에 맞아 죽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녀는 당시 임신 8개월째였고, 이마에 총탄을 맞아 즉사했다. 친정에 와 있던 차였는데, 장모가 말하길 죽은 딸의 “뱃속의 아기가 팔딱팔딱 뛰고 있었다”고 한다. 광주가 봉쇄되어 이 부인의 시신은 공터에 묻었다가 나중에 망월동 구 묘역으로 옮기고, 마지막으로 새로 조성된 묘역으로 옮겨졌다.

5월 21일에는 헬기의 굉음이 낭자한 가운데 금남로에 계엄군이 들이닥쳤다. 그날 김준태 시인이 목격한 죽음만도 15명이나 된다. 이 사건을 두고 쓴 시가 ‘금남로 사랑’이다.


금남로는 사랑이었다
내가 노래와 평화에
눈을 뜬 봄날의 언덕이었다
사람들이 세월에 머리를 적시는 거리
내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처음으로 알아낸 거리
금남로는 연초록 강 언덕이었다
달맞이꽃을 흔들며 날으는 물새들
금남로의 사람들은 모두 입술이 젖어 있었다
금남로의 사람들은 모두 발바닥에 흙이 묻어 있었다
금남로의 사람들은 모두 보리피리를 불고 있었다
어린애와 나란히 출렁이는 금남로
어머니와 나란히 출렁이는 금남로
아버지와 나란히 쟁기질하는 금남로
할머니와 나란히 손자들을 등에 업는 금남로
할아버지와 나란히 밤나무를 심는 금남로
누이와 나란히 감꽃을 줍는 금남로
금남로는 민들레와 나비떼들의 고향이었다
그리움의 억세디 억센 끈질김이었다
그래, 좋다! 금남로는 멀리
청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래, 좋다!
금남로는 가까이 마을로 찾아가는 길
금남로는 어머니의 젖가슴이었다
우리가 한때 고개를 파묻고 울던
어머니의 하이얀 가슴이었다

 

 

 

▲ 광주항쟁 당시 시신이 안치되어 있던 상무대 자리에 세워진 5.18기념공원에 있는 시민군조각상. (사진/한상봉 기자)

김준태 시인은 광주의 그 무고한 죽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랐다. “신이 있다면 어떻게 이런 참극을 방관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물었다. 원망과 증오로 미칠 듯한 심경이었다. 그 와중에 목숨을 걸고 시를 썼다. 1980년 6월 2일, <전남매일신문>에 실린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라는 시는 단 50분 만에 일필휘지로 쓰여진 시였다. 그는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처럼, 갑자기 온몸 속에 무엇인가 파고들어오는 것을 느꼈다”고 당시 심정을 밝혔다.

“일종의 엑스타시라고 할까, 성경과 불경이 예수와 붓다가 직접 쓴 것이 아닌 것처럼, 마치 내가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자가 된 것처럼 느꼈다. 광주시민들이 폭도로 매도되고 있는 상황에서 죽음의 진실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소리가 내면에서 솟구쳐 올랐다. 당시 무신론자였던 내가 생각하지도 않았던 시를 쓰게 된 것이다.”

이 시는 당시 계엄사에서 잘라내어 20행 정도만 신문에 실렸다. 그러나 이 시 전문은 윤전기에 돌리기 전에 이미 식자상태에서 10만부 이상 미리 찍어내었기 때문에 외신 등을 통해 퍼져나갈 수 있었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나
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
찢어져 산산이 조각나 버렸나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나가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아침 저녁으로 살아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아 통곡뿐이 남도의
불사조여 불사조여 不死鳥여

해와 달이 곤두박질치고
이 시대의 모든 산맥들이
엉터리로 우뚝 솟아있을 때
그러나 그 누구도 찢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는
아아, 자유의 깃발이여
살과 뼈로 응어리진 깃발이여


아아, 우리들의 도시
우리들의 노래와 꿈과 사랑이
때로는 파도처럼 밀리고
때로는 무덤을 뒤집어쓸지언정
아아, 광주여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아아, 온몸에 상처뿐인
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이여

정말 우리는 죽어버렸나
더 이상 이 나라를 사랑할 수 없이
더 이상 우리들의 아이들을
사랑할 수 없이 죽어버렸나
정말 우리들은 아주 죽어버렸나

충장로에서 금남로에서
화정동에서 산수동에서 용봉동에서
지원동에서 양동에서 계림동에서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아아, 우리들의 피와 살덩이를
삼키고 불어오는 바람이여
속절 없는 세월의 흐름이여

아아,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구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넋을 잃고 밥그릇조차 대하기
어렵구나 무섭구나
무서워 어쩌지도 못하는구나

(여보, 당신을 기다리다가
문밖에 나가 당신을 기다리다가
나는 죽었어요......그들은
왜 나의 목숨을 빼앗아갔을까요
아니 당신의 전부를 빼앗아갔을까요
셋방살이 신세였지만
얼마나 우린 행복했어요
난 당신에게 잘 해주고 싶었어요
아아, 여보!
그런데 난 아이를 밴 몸으로
이렇게 죽은 거예요 여보!
미안해요, 여보!
나에게서 나의 목숨을 빼앗아가고
나는 또 당신의 전부를
당신의 젊음 당신의 사랑
당신의 아들 당신의
아아, 여보! 내가 결국
당신을 죽인 것인가요?)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느님 아들이여

예수는 한번 죽고
한번 부활하여
오늘까지 아니 언제까지 산다던가
그러나 우리들은 몇 백 번을 죽고도
몇 백 번을 부활할 우리들의 참사랑이여
우리들의 빛이여, 영광이여, 아픔이여
지금 우리들은 더욱 살아나는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튼튼하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아아, 지금 우리들은
어깨와 어깨 뼈와 뼈를 맞대고
이 나라의 무등산을 오르는구나
아아, 미치도록 푸르른 하늘을 올라
해와 달을 입맞추는구나

광주여 무등산이여
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꿈이여 십자가여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젊어져 갈 청춘의 도시여
지금 우리들은 확실히
굳게 뭉쳐 있다 확실히
굳게 손잡고 일어선다.

이 시를 쓰고 김준태 시인은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절망과 회한 속에서 돌아다니다 25일 만에 집으로 갔으나, 5분 만에 보안사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광주 화정동 소재 보안대였다. 고문을 당하다가 1달 만에 풀려나 교사직에서 해직되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쓴 시가 그해 7월 6일 발표된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였다. 광주에서 오월에 죽은 이들이 예수처럼 부활할 것이라는 예감을 시로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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