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조성만 평전 <사랑 때문이다>를 쓴 송기역 씨
조성만 열사 추모미사 및 출판기념회, 5월 19일 오후 7시, 가톨릭회관 7층강당

1988년 5월 15일 명동성당 교육관 4층 옥상에서 한 젊은이가 할복투신자살을 했다. 그날은 명동성당청년단체연합회가 광주민중항쟁 계승 마구달리기 대회를 열던 날이었다. ‘하얀 십자가’처럼 옥상에서 지상으로 떨어져 내린, 그렇게 피투성이로 붉은 꽃을 피워낸 사람, 조성만 요셉이다.

그 어린 조성만을 두고, 그에게 세례를 주었던 문정현 신부는 “그는 누구인가? 나의 신앙의 스승이다”라고 말한다. 창인동성당 주임사제로 일할 때, 문정현 신부는 이 청년의 죽음이라는 비보를 들었고, 지난 23년 동안 조성만의 사진을 방에 걸어두고 있다. “성만이가 마음에 꽂혔기 때문”이다. 자식이 먼저 죽으면 부모 가슴에 묻는다는데, 성만이를 가슴에 묻고 살아온 세월이다. 조성만이 유서에서 남긴 “척박한 팔레스티나의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한 인간이 고행 전에 느낀 마음”과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 남북공동올림픽 개최 등이 가슴에 꽂혀, 그 뒤로 문정현 신부는 매향리와 대추리로, 용산으로 달려가 ‘길 위의 신부’로 살게 되었다. 그러니, 조성만은 문 신부에게 ‘스승’이었던 것이다.

▲ 장례식장에서 오열하는 조성만의 어머니 김복성 씨 (사진제공/송기역)

그 조성만의 평전이 이번에 출간되었다. <사랑 때문이다>(오마이북, 2011). 이 책을 집필한 송기역 씨는 유서에서 제목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그 말이 조성만의 짧지만 깊은 삶을 요약해주기 때문이다.

“사랑 때문이다. 내가 현재 존재하는 가장 큰 밑받침은 인간을 사랑하려는 못난 인간의 한 가닥 희망 때문이다. 이 땅의 민중이 해방되고 이 땅의 허리가 이어지고 이 땅에 사람이 사는 세상이 되게 하기 위한 알량한 희망, 사랑 때문이다. 나는 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고 우리는 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집필자인 송기역 씨는 1991년에 대학에 들어가서 조성만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지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고 전한다. “할복도 투신도 아니고 ‘할복투신’이라는 완전한 죽음의 방식으로 생명의 한 올도 남기지 않고 온전하게 자신을 바친다는 것에 가슴이 아팠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세상은 이한열이나 박종철을 기억하지만, 조성만을 알지 못했다. 현재 전태일재단에서 일하는 송기역 씨는 조성만이 전태일처럼, 예수 때문에 ‘순교’한 사람으로 조성만을 기억한다.

▲ 조성만 평전을 쓴 송기역 씨. (사진/한상봉 기자)

조성만은 고등학생 시절부터 문정현 신부를 존경하며 따르면서 사제가 되고 싶었다. 1984년에 서울대에 입학해 함운경, 김세진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는데, 미군 카투사에 입대해서 학생운동의 동향을 파악해서 상부에 보고하는 업무를 수행하면서 내적 갈등에 시달렸다. 제대 후 김세진은 대학생 전방입소 철폐 투쟁 중 분신하면서 큰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제대 후 두 달 만에 6월 민주화투쟁의 물살 속에 들어가 명동 그 자리에서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쳤다.

그는 명동성당 가톨릭민속연구회에서 활동하면서, 6월항쟁의 결과로 치러진 대통령선거 당시에 공정선거감시단으로 참여해 구로구청 사건현장에 있었다. 마지막까지 구청에 남아 있다가 붙잡혀 몰매를 맞고 고문을 당했다. 이를 두고 송기역 씨는 “조성만은 1980년대의 한복판에 있었다”고 말한다. “고등학생의 여린 감성으로 마주친 5.18 광주항쟁과 그 후 6월항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그가 대면한 세상은 ‘거짓과 학살’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그 정반대편에 문정현 신부가 있었다. 그 정직하고 용기 있는 목소리들이 그래도 그에게 살 힘을 주었다. 끝없는 비관에서 그를 구출해주었다. 그 강렬한 예언자적 신앙에 그는 인연을 댔다”고 송기역 씨는 말한다.

조성만 평전인 <사랑 때문이다>를 출간하고 나서, 그 책을 들고 송기역 씨가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였다. 제목이 마음에 드는지 묻자, 이소선 여사는 “이 이상의 제목은 없다. 우리가 이렇게 돌아다니며 싸우는 것도 다 사랑 때문”이라 했다. 송기역 씨는 조성만의 유서에 나오는 한 대목인 “사랑 때문이다”는 말을 떠올릴 때마다 전태일의 “나는 돌아가야 한다,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라는 말이 오버랩된다.

그는 자살을 선택하기 며칠 전인 1988년 5월 3일 일기에서 “한 맺힌 한반도에 태어나 사람을 사랑하고자 하는 부끄러운 한 인간의 모습이 이렇게 괴로울 수가. 정신만 말뚱말뚱해지는 것이 더욱 자책을 하게 하는구나”라고 썼으며, 가시관에 눌려 신음하는 예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길은 예수의 길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예수와 함께할 수밖에 없는 풀인가 봅니다.”

그가 죽음의 자리로 선택한 명동성당. 수없이 많은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오가는 명동성당은 한국교회의 상징이었고, 이미 가난한 이들을 안중에 두지 않는 교회를 보고 조성만은 ‘교회건물이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그래서 이처럼 편지를 쓴다.

“교회가 자꾸만 하늘로만 떠오르는 것만 같아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군요. 진정 가난한 대상을 버리는 듯한 자취가 얼마나 땅의 생명을 지켜가며 하늘의 뜻을 따를 수가 있을까요? 부정적인 생각입니다. ... 성당의 종소리가 얼마나 하느님의 마음을 울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삼종소리의 여운에 가난한 이들을 실을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소망에 불과한 것은 아니겠지요.”

▲ 조성만 평전 <사랑 때문이다>, 오마이북스, 2011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교회가 세상의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기를 소원했다. 손에서 묵주를 놓지 않았던 조성만이다. 말끝마다 “(척박한 갈릴래아의 사람) 예수는 아냐?”고 묻던 조성만이었다. 모든 편지에 십자표시를 하고 글을 써내려갔던 조성만이었다. 그래서 그의 편지는 모두 ‘세로쓰기’였다.

송기역 씨는 “이 책을 통해 촛불세대들에게 1980년대를 살아간 이들의 열정을 다시 들려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국가폭력이 사라진 지금, 청년들은 1980년대보다 더 행복한지 묻고 싶다”는 송기역 씨는 “지금 대학생들은 통제된 공간에서 경쟁체제를 배우며 사육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기업의 말단노동자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결국 40대에 구조조정이 되거나 비정규직으로 전락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1980년대를 살았던 이들은 적어도 자유의지에 따라 세상과 맞섰다”고 말한다.

한편 조성만 열사 추모사업 모임 ‘성만사랑’은 조성만 열사 23주기 추모미사와 <사랑 때문이다>의 출판기념회를 오는 5월 19일 저녁 7시 명동 가톨릭회관 7층 강당에서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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