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떠나야 교회가 산다-7]

지금은 논란이 많이 잦아든 상태이지만, '신영성운동'(뉴에이지)이 주는 실제적 파급력은 일상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으며, 특히 기성 교회에 대한 염증을 느끼고 있는 신자들에게는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오고 있는 게 사실이다. 제도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는 신앙, 대중의 영적 갈증에 응답하는 신앙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인주의적 성향이 짙게 드리운 그늘 속에서 그나마 희망을 한끝에 잡게 하는 까닭이다. 이런 개인주의적 발상에 기초한 영성운동은 공동체 상실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상업주의와 연계되어 '웰빙' 바람과 궤를 같이 한다. 이를테면, 중산층 중심으로 불어오는 신영성운동을 중심으로 기성 교회가 여기서 배워야 할 점과 신영성운동의 한계 역시 짚어볼 것이다.  

지금부터 신영성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도대체 뭘 말하는 것인지 헛갈리는 분들을 위하여 먼저 한국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가 밝힌 신영성 운동에 대하여 규정한 내용을 간략히 알려주는 게 도리일 것 같다.

신앙교리위원회에서는 신영성 운동을 서양에서 시작된 뉴에이지 운동, 일본에서 시작된 정신세계 운동, 기(氣)수련 운동으로 분류한다. 뉴에이지 운동은 “일반적으로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건강과 평화를 추구하고, 그것을 통해 자기 변용을 이루며, 그 결과 새로운 사회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운동”이다. 여기에는 단전호흡, 마인드 컨트롤, 요가, 초월명상, 염력 등이 속한다. 이를 두고 교리위원회에서는 초감각적 초월적 존재와 교감을 추구하는 사탄 숭배, 귀신 숭배, 강신술이며, 비술이나 영술을 통해 영적 세계나 조상의 영과 접촉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본다면 무속이나 연금술이나 불교에서 많이 행하는 좌선 명상 등도 포함될 수 있겠다.

한편 뉴에이지 운동은 자연 중심의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여기며 자연에 대한 정복보다는 조화와 합일을 추구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에게 내재해 있는 자연의 무한한 능력이 발휘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를 생태학주의라고 한다. 그렇다면 생태주의를 지향하는 <녹색평론>이나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잡지를 비롯하여 태교음악 등 뉴에이지 음악 등이 여기에 포함되며, 현대물리학이 주장하는 양자물리학이나 ‘지구는 살아 있는 유기체’라고 본 가이아 이론 등 모든 게 이 부류에 포함될 수 있다. 

또한 뉴에이지 운동은 서구종교의 사상이나 수련방법에 동양의 사상이나 수련방법을 접합시키려는 운동이라고 한다. 이들은 그리스도교의 교리나 사상을 동양의 범재신론, 윤회사상, 기 이론으로 해석하고, 하느님 체험 역시 동양적 수련방법으로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이른바 ‘과정신학’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초월성, 내재성, 과정성에 대한 통합적 성찰이 뉴에이지적 사고로 단죄 받을 수 있겠다. 

한편 정신세계 운동은 1970년대에 물질적 풍요와 자유주의의 세례를 받은 일본의 젊은이들이 근면이나 절제, 또는 집단과 국가를 강조하는 ‘일본정신’보다는 개인의 안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과 평화를 추구하게 되면서 나타난 운동이라고 한다. 이 운동은 명상, 요가, 신비주의, 오컬티즘, 초능력, 신비체험을 강조하며 “가족이나 혈연집단, 국가, 사회의 안녕이나 평화보다는 개인의 정신적, 내면적인 세계에 대한 몰입을 중요시한다.” 한국의 ‘정신세계사’에서 발행되는 모든 책이 이 정신세계 운동이나 뉴에이지 운동과 관련된 것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한편 신앙교리위원회에서 정신세계 운동에 대해서 설명해 놓은 것을 보면, 차동엽 신부가 <사목> 2004년 4월호에 게재한 글 중에서 뉴에이지 운동이 1960년대 미국의 반(反)문화운동 때문에 확산되었다는 설명과 운동의 기원에서 비슷하다. 차 신부는 “이들은 성장주의와 물질주의에 대한 반발을 넘어, 오랜 동안 서구사회를 지배해 온 기존의 가치, 제도, 권위, 규범, 신앙 등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운동으로 그 영역을 확대해 갔다. 1960년대에 서구사회를 휩쓸었던 히피 운동, 프리섹스 운동, 여성해방 운동, 반전 운동, 학생 운동, 자연 운동 등은 이와 같은 일련의 저항문화 운동들이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 뉴에이지 운동은 이러한 저항문화 운동의 체험을 바탕으로 사회적으로 크게 확산되기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이 글을 읽다보면, 마치 뉴에이지 운동이 군사적 폭력과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저항하는 모든 운동을 바탕으로 해서 확산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말 그대로라면 뉴에이지 운동의 바탕에 모성적 평화주의가 깔려있다는 반증도 되는 것이다. 실상 우리가 일반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기 마련인 ‘프리섹스 운동’이라는 표현이 정확히 뭘 말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비슷한 종류로 히피문화 역시 최근에 교회안팎을 막론하고 각광을 받고 있는 무소유적 ‘공동체 운동’을 낳은 산파라는 점에서 복음적 측면을 간직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정신세계 운동 역시 일본의 집단주의나 국가주의에서 벗어나 ‘개인’의 정신적, 육체적 행복에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일본의 전통적 ‘군국주의’를 잘 알고 있는 우리로서 오히려 축복할만한 경향이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잘못된 국가주의는 안일한 개인보다 더 파괴적임을 얼마나 많이 경험했던가?

한상봉/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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