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아직 갈망하는가> 한상봉, 이파르出, 2010
진작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류제동이 비교종교학적 관점에서 서평을 실었고, 필자 역시 <기독교 사상> 2011년 4월 호에 졸문의 서평을 싣기도 했다. 그런데 이미 쓴 졸문에서는 지은이가 온 힘을 다해 전하려는 “기도와 혁명이 어우러지는 그 아름다운 역설”에 감동한 체험을 살려내지 못했다. 그래서 한달 여 지난 이 시점에서 못다한 숙제를 하듯이 완성된(?) 서평을 다시 시도해본다. 마침 이전을 계기로 5월 17일부터 "오늘, 예수에게 무엇을 배울까?" 를 주제로 열리는 [지금여기 사랑방]에서 이제 막 번역된 <오늘의 예수>(앨버트 놀런 지음 / 유정원 옮김) 와 함께 지은이의 책을 참고도서로 선정했다니 독자들과 함께 나눌만한 서평을 내어놓을 새로운 구실이 생겼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름다운 혁명, 길동무와 더불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름다운 혁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먼저 교리적 논쟁을 접고, 정말 나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길을 하느님 안에서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그 길에서 우리는 이미 비슷한 길을 걸어가는 다른 영혼들도 만날 것입니다. 이웃과 갈라지지 않는 사랑 안에서, 우주 안에 깃든 모든 하느님의 거룩한 기운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길동무들과 나누면서 우리 자신과 세상의 동시적 변형을 꾀하는 ‘아름다운 혁명’을 기다립니다". (18-19쪽)
역사를 만들어간 영성가, 혹은 신비가들을 소개하는데 그들이 영성 교과서에 등장하는 인물들 만은 아니다. 자신 안에 있는 신성을 찾아 순례했던 이들, 일과 기도를 병행하며 세상을 변혁했던 이들, 자유를 포기하지 않고 제도를 넘어서 진리에 순종했던 이들, 사람에 대한 연민이 실현되는 세상을 꿈꾸었던 이들, 이제 막 알려지기 시작한 지난 20세기의 신비가에 이르기까지 익숙하고, 또 낯선 이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신비가의 반열에 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사실 공덕을 많이 쌓고, 많이 읽고 많이 기도함으로써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많이 버림으로써 이뤄지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거룩한 사람은 자신이 살아가는 공간을 복되게 하고, 그 사랑과 선함에 대한 탁월한 역량 때문에 성인으로 추대되는 것이다. 즉, 성인은 그리스도와 운명을 나누어 갖는 사람이다.
그런데 책을 읽으며 새로운 글쓰기를 발견하였다. 그저 역사적 흐름을 따라 신비가, 혹은 성인들을 나열하며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지은이가 일상 안에서 만난 신비가들과 함께 엮은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기에 인천에서 살았던 그의 어린 시절의 기억과 사십대 중반의 사나이로 한국에서 살아가는 현실이 엮이고, 용산참사와 그 뒷이야기들이 함께 엮여 진행중인 글이 되었다. 함께 책을, 혹은 역사를 만들어 나갈 동지를 찾는 그의 갈망이 녹아있는 것이다.
신비가들과 더불어 살아온 지은이의 영적 일기, 혹은 자서전인 것이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한 신비가의 갈망! 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래서 여러 해 동안 쓰고 엮은 그의 글이 글자로 넘어가지 않는다. 한 예로 고흐가 신비가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흐의 전시장에 들어가는 지은이와 동행해서 그림들을 함께 보며 고흐에 대한 그의 성찰을 나누어야 한다. 즉, 그의 컨텍스트에 참여해서 그가 다루는 텍스트의 인물들을 만나는 것이다.
엄살을 부리지 않고 살고 있는 진실 안으로
함석헌의 “너 자신을 혁명하라!”를 따르던 이십대의 지은이는 자신의 세례명인 '이시도로'에게서 학자였던 이시도로와 농부였던 이시도로를 함께 만나고, ‘공부하는 운동권’의 소명을 발견하였고, 사막의 안토니오에게서 더 깊고 풍요로운 실존에 ‘깨어있기 위하여’ 사막으로 간 것을 이해하였다. 바실리오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머물며 복음대로 살기 위해서는 진부한 삶에 구멍을 뚫는 작업을 해야하는 것과, 그래서 세상에 살아도 세상과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지혜를 터득하고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리고 오늘 날에도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속살을 들추면 겹겹이 상처를 안고 있지만 그래도 엄살을 부리지 않고 살고 있는 진실 안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이렇게 지은이는 사랑을 통해서 변혁의 힘을 얻어낸 영성가들의 맥을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새로운 존재로 변형되고 삶의 질을 바꾸면, 그 다음은 내가 몸담고 있는 세상이 변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또한 세상에 알려진 성인들을 변화된 나의 관점에서 새롭게 만날 수 있게 된다. 아니, 성인들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늘 교회를 넘어서고 교회를 위태롭게 할지도 모르는 그 성인들과 함께 새로운 교회의 모습을 꿈꾼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그가 연재하는 “교회를 떠나야 교회가 산다”의 시리즈는 이렇듯 그의 갈망이 진행중인 것을 보여준다.
그가 만난 여성 영성가들은 어떠한가? 하느님의 자비가 마리아를 통하여 이 땅에 열매를 맺게 되었듯이 생명을 품어내는 땅을 통하여 하느님의 강생사건을 표현한 빙엔의 힐데가르트! 교회권력이 흔히 요구하던 맹목적인 순종을 거부한 막데부르크의 메히틸드와 중세의 여성 신비가들에서 그 사랑을 살아낸 변혁적 영성을 찾아낸다. 그녀가 속했던 베긴회는 12세기 무렵에 교회의 가부장적 위계질서에서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고 수도회의 수행전통에 기대어 만들어진 평신도 여성공동체로, 자율적인 영성을 일구어내고, 도시문화 안에서 결혼이나 수도원의 대안이 되는 새로운 삶의 형태를 찾아내었다. 지은이는 그들에 기대어 오늘날에도 자신의 영적 감각과 응답만으로 기꺼이 투신하고자 열망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또 하나의 교회를 이루게 될 가능성을 역설한다.
사하라 사막의 성자 샤를르 드 푸코에게서, 다른 사람들이 이천 년 가까이 지나쳐버린, 예수님의 30년 시절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나자렛을 발견한 그 사람이 빵과 물만 먹으며 살아가는 동안 오래 전에 교회가 잃어버렸던 사막의 영성이 되살아난 것을 기억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운명을 나누어 갖겠다는 것이며, 그분의 영광뿐 아니라 고난도 나누어 갖는 것을 알게 된다.
현대의 신비가 또는 예언자, 우주적이고 혁명적인 사랑
남아메리카의 성인들은 어떤 길을 보여주는가? 지은이는 남미의 성인들을 통해 남미의 고통과 그 고통을 통해 걸러진 신비의 결을 전해준다. 니카라구아의 에르네스토 카르데날의 고백, ‘내게 남아있는 것은 사하라 사막의 메마른 우물 같은 갈증, 거의 우주적인 사랑에 대한 굶주림, 해소할 수 없는 열망, 빈 마음뿐입니다’에서 가장 종교적인 사람이 가장 혁명적이며, 가난한 이들 속에서 새로운 인간이 탄생하는 것을 본다. 로메로 대주교! 그는 전통적 보수주의자였으나 암살당한 친구 그란데 신부의 추모미사를 집전하면서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를 처음 만나고, 가난하고 억울한 민중의 아버지로서 헌신하다가 순교하기에 이르렀다. 즉, 새 인간은 연대적 인간이고, 다른 사람에게서 이익을 취하는 데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주는데 의미를 두는 인간인 것이다. (266쪽)
이렇게 성인들을 통해 마음의 무장을 해제하고 결국에는 우리의 사랑과 기도가 악을 이겨낼 힘을 얻는다고 희망하는 지은이는 그 신뢰의 근거를 에크하르트에게서 찾아낸다. “내가 하느님을 보는 바로 그 눈이 하느님이 나를 보시는 눈이다”(281쪽) 는 언명을 통해 눈에서 비늘이 떼어져야 비로소 신비가의 눈을 뜨게 되는 것을 전한다. 신비신학의 오래된 방법론이다.
지은이는 고흐 전시회에 다녀 나오며 고흐의 눈빛은 어떤 색깔이었을까? 와 동시에 자신의 눈빛을 가늠해보며 “어떻게 예수가 사랑하던 이들과 세계를 향해 발음해야 할까?” 고민한다. (293쪽)
가난하고 슬픈 눈매를 지닌 채 거리를 서성거리는 사람들
자신이 풀어낸 열망에 함께 할 이들을 부르는 지은이의 달콤한 유혹! 바로 그가 글을 모아 책으로 내어놓은 이유일 것이다. “가난하고 슬픈 눈매를 지닌 채 거리를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가련한 이들의 호소를 하느님의 애달픈 하소연으로 들을 줄 하는 사람은 이미 신비가의 반열에 들어설 준비가 된 사람들입니다. 내 아픔에 붙잡혀 있지 않고 그 아픔을 겪는 세상을 위해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인 예수를 따르는 그의 호소이다.
책을 덮으며, 나를 가늠해본다. 내 어두움의 실체를 찾아 나서고, 발견된 어두움과 고요히 작별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가? 오래된 나의 상처는 무늬로 남아 제 나름의 빛깔을 간직하고 있는가? 지금쯤 예수의 갈망 한 자락을 나누고 함께 걸어갈 주제가 되어가는 것인가?
그의 한 대목을 다시 빌어 답을 찾아본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애를 이끌어 가기를 바라는 것은 여전히 아름다운 갈망으로 남습니다. ‘예’ 하고 온몸으로 한마음으로 대답할 수 있다면, 나는 편안해 질 것입니다. 나의 고유한 몸을 통하여 나와 전혀 다른, 그러나 연결되어 있는 그분이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행하는 일에 내 손을 얹기만 하면 되겠기 때문입니다."(47쪽)
이제 그의 갈망이 이 글을 읽는 그대의 갈망에 이르렀는가? 아직도 미진한 구석이 남아 있다면 다행이다. 그의 글을 직접 만날 적절한 이유가 될 것이다.
최우혁 / 천주교여성공동체회원, 서강대학교, 가톨릭 대학교에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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