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떠나야 교회가 산다-6]

교회의 처지로 볼 때, ‘개인적 그리스도인’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경우일지 모른다. 그들은 기존의 제도권 교회에 대하여 불만을 갖고 교회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길 원하지만, 교회의 사목적 관행과 교회문화의 변화, 그리고 영적 개혁과 복음적 진정성이 회복된다면 언제든지 교회 지도부의 용기있는 행동과 교회를 끝내 포기하지 않으시는 성령의 은혜에 감복하여 갈채를 보내며 다시 교회의 품으로 되돌아올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어머니 없는 자식의 고단함과 쓸쓸함을 뼛속 깊이 새기고 사는 게 그들이기 때문이다.

교회를 떠나도 애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엄마가 엄마 역할을 포기했을 때, 떠밀려난 자식들은 스스로 독립해야 한다는 엄정한 현실 앞에서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만에 하나 그들이 복음서에 나오는 탕자였다 하더라도, 아버지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가 마음 깊은 곳에 경험적으로 깔려 있지 않았다면, 그 탕자는 결코 종의 신세로라도 집에 돌아오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천대받더라도 남의 밑에서 받는 설움이 부모에게 설움 받는 것보다 덜 가슴 아프기 때문이다. 원숙한 어머니와 관대한 아버지라고 믿을 수 있어야 귀향이 남의 종살이보다 낫다는 판단이 내려질 것이다.

그날이 올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못된 부모 밑에서라도 슬하에 깃들어 사는 형제들이 있다는 생각에, 그 자매형제들을 생각해서 함께 고난을 겪기로 다짐하는 장한 자녀도 있을 법하다. 그들에게 어쩌면 좀더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거나, 아니면 다른 데서라도 에너지를 충전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를 떠나도 혈육지정(血肉之情)은 사라지지 않듯이, 교회를 떠나도 교회에서 쌓았던 애증(愛憎)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전혀 관계가 없는 이들끼리는 증오도 없고 당연히 사랑도 없을 것이다.  

▲ 사진/한상봉 기자

양육적인 어머니에게 입양되는 그리스도인

그러나 개인적 그리스도인 가운데는 다양한 계기를 통하여, 다른 사상과 종교에 입양되는 경우도 있다. 나름대로 판단하기에 더 따뜻하고 양육적인 양친을 만나게 되면, 그녀가 생모(生母)냐 아니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들은 교회와 교회 아닌 어떤 것들을 모두 초월해서, 더 큰 어머니(태모 太母)가 있음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원형을 발견했다고 믿는 까닭이다.

그 어머니가 양육적이라면 거기서 그들은 ‘생명의 하느님’을 만날 것이고, 그 어머니가 공정하다면 거기서 그들은 ‘정의로운 하느님’을 만날 것이다. 그 어머니가 나를 위로해 주신다면 거기서 그들은 ‘치유자이신 하느님’을 만날 것이다. 그 이름을 무엇이라 부르든 그 이름이 이젠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를 부처라 한들, 그를 예수라 한들, 그를 알라라 한들, 그를 하늘이라 부른들, 그를 땅이라 부른들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은 거기서 새로운 얼굴을 가진 성모 마리아를 만나고, 관세음보살을 만나고, 어느 어둑한 골짜기에서 인디언 어머니를, 가이아 여신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람들은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상당히 위험하고 불온하고 이단적이며 어처구니없으며 한심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교회로 돌아올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에 가장 불행한 전(前)그리스도인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들은 거기서 나름대로 행복하지만, 교회는 그들이 얄밉고, 그래서 ‘반(反)그리스도’적이라거나 ‘악마주의’라는 꼬리표까지 달아주고 싶을 것이다.

신영성운동, 하느님의 극약처방(?)

그러한 흐름을 가리켜 종교학자들은 ‘신(新)영성주의’라고 부르고, 인천교구의 차동엽 신부 같은 이들은 신영성운동의 부정적 측면을 고취시킨다는 의미로 ‘신흥영성운동’이라고 고쳐 부르기를 주문한다. 그래야 특히 가톨릭 신자들이 “이 운동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에 대해서 즉각적인 직감, 곧 경계심을 갖게 될 터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사목 2004년 4월호 121쪽). 이러한 태도는 신영성운동에 대한 교회의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교황청에서도 이미 1993년에 교황 요한바오로2세가 미국주교단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뉴에이지운동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고, 문화평의회와 종교간 대화평의회에서는 ‘뉴에이지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성찰’이라는 부제가 달린 문헌을 발표하여 뉴에이지운동을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가장 긴급한 도전 중의 하나”이며, “위기에 빠진 문화”에 대한 “잘못된 응답”이라고 밝혔다. 한국 주교회의 역시 신앙교리위원회에서 뉴에이지운동을 포함한 신영성운동이 ‘건전한 신앙생활을 해친다’는 소책자를 1997년, 2003년 두 차례에 걸쳐 발표하였다.

그러나 정작 위기에 빠진 것은 문화가 아니라 교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 위기는 다름 아닌 교회의 각성을 촉구하는 시대의 징표가 될 수 있다. 구태의연한 교회를 위한 하느님의 극약처방 같다는 말이다. 요즘은 교회 밖에서 ‘영성’이라는 주제가 더 많이 더 대중적으로 더 실감나게 이야기되고 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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