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명희의 행복선언]

▲ 요셉의원의 선우 원장은 위암으로 투병하다 2008년 4월 18일 선종했다.(사진/한상봉 기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4월은 아름답지만 잔인하다. 영국의 시인 T.S.Elliot는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 4월에 사랑하는 사람을 땅에 묻는 슬픔의 표현이다.  

4월이 ‘잔인한 달’로 다가온 것은 3년 전이다. 2008년 4월 18일 故 선우경식 원장의 죽음이다. 노숙인 환자와 자웅동체처럼 하나가 되어 운명의 끈으로 그들과 자신을 묶었던 의사 선우경식. 그가 세운 자선병원 안에서 생전의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봤기에 그의 죽음은 안타까움을 넘어 잔인한 것이었다.

3년이 지난 이 4월에도 그의 죽음이 여전히 잔인한 것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남긴 작은 가르침 하나, 노숙인 그들은 강 건너에 사는 ‘다른 종족’이 아니라 결국 되돌아 ‘우리’라는 깨우침 때문이다.

봄빛이 완연한 4월 초, 서울역 노숙인 급식소를 찾았다. 지난 겨울 내내 소식이 끊긴 이씨가 궁금해서다. 이씨와 나는 서로 이야기가 통한다. 10년 전 이씨는 노숙인 자선병원에서 선우경식 원장의 환자로, 나는 봉사자로 만났으니 우리는 동기동창인 셈이다. 그 인연을 시작으로 선우 원장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선우 원장을 의사로, 아버지로, 형님으로 여기며 의지하고 살았다.

툭하면 술에 취해 뒷골목에 큰 대자로 누운 김씨, 선우 원장은 신고를 받는 즉시 출동(?)명령을 내린다. 봉사자의 등에 업혀 진료실 침대에 데려다 눕혀 놓으면 한나절을 푹 자고 일어나서 왈 “영양제 한 병 놔야지! 환자를 막 이래도 되나!” 이것 달라 저거 해내라 막무가내로 떼를 쓰다 거절당하면 “씨팔 x자식!”과 함께 선우 원장을 향해 침 한번 퇴, 뱉고 퇴장한다. 사실 이씨가 선우 원장 곁을 떠나지 않는 속셈은 ‘방’때문이다. 10년째 역 주변과 쉼터를 전전하다보니 지병인 당뇨와 고혈압은 악화되고 무료급식소에서 끼니는 해결하지만 추위와 더위를 피할 내 방 한칸이라도 있었으면 하는게 바람이었다. 그러던 차에 귀가 솔깃한 제안이 들어왔다.

선우 원장은 이씨와 약속했다. 1년만 술을 끊고 자립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사글세방 한 칸은 구해주겠다고. 계약이었다. 술을 밥 삼아, 친구 삼아 살아온 이씨로서는 술을 끊는 일은 지금 수능공부 시작해서 올해 안에 서울대학교 합격해보라는 요구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한편 고아원에서 자라 사십평생을 동가숙 서가식한 떠돌이 이씨로선 내 방을 가진다는 것은 로또 당첨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당뇨와 혈압에다 간경화까지 앓고 있으니 이 제안은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만난 확실한 이정표였다. 드디어 30년동안 하루도 술을 걸른 적이 없고 밥보다 술을 더 좋아한 이씨가 술을 끊기로 결심했다.

한 노숙인의 불행은 혼자 짊어져야 할 운명일까?

30년만의 추위에 두문불출하고 있구나 짐작했는데 뜻밖에 노숙인 정보통 양씨가 이씨의 상태가 “심상찮다”고 전한다. 급식소에 부탁해서 도시락을 들고 이씨가 누워있다는 양씨의 쪽방을 찾았다. “내 사주에 방은 없나봐.” 한평 남짓한 쪽방 벽에 기대어 죽음의 색이 짙게 드리운 얼굴로 아저씨는 한많은 과거를 더듬는다.

이씨는 1953년생 계사년 뱀띠다. 부산에서 태어났다. 먹을 게 없어서 노다지 굶었다. 학교에 가면 강냉이 죽이라도 얻어 먹어서 좋았다. 집에 돈이 없어서 초등학교까지만 나왔다. 신문도 팔고 아이스케키도 팔았다. 그러다 마을 양복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월급은 없고 점심만 먹고 기술을 배우는 조건이었다. “하도 때리싸코 해서 ‘치아삐맀다.(하도 많이 때려서 그만둬버렸다.)”

이씨는 19살에 배를 탔다. 벌이가 좋았다. 어느날 로울러 줄을 풀다가 손이 말려 들어가 손가락 마디 2개가 끊겼다. 22살 때 더 큰 사고가 났다. 잡은 고기를 배의 창고에 넣다가 갑판 바닥에 떨어졌다. 척추 6번이 깨졌다. 병원에 6개월 입원하고 보상비 150만원을 받았다. 그후 일을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젊은 나이에 불구나 다름없는 몸뚱이가 되어 술에 ‘찌들어’ 살았다. 아예 모든 것을 '이자뿌릴라꼬'(잊어버리려고) 서울로 올라왔다. 종로 쪽방촌이 싸다고 해서 여기에 살기 시작했다.

이씨가 암에 걸린 것을 안 것은 6개월 전이다. 간암이었다. 암세포는 빠르게 주변 장기로 번졌다.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안 이상 남은 생이나마 양씨의 쪽방이지만 ‘방’에 몸을 누이고 싶었다. 그날 이씨는 급식소의 도시락을 한 술도 입에 대지 못하고 수저를 놨다. 마약성 진통제만 넘기며.

지금 이씨는 자신의 사연을 가슴에 담고 세상과 이별하는 중이다. 그는 처음부터 가난했고, 아팠고 바닥까지 곤두박질쳤다. 그가 겪은 삶의 불행한 사건은 그의 개인사정이고 그가 혼자 짊어져야 할 운명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정말 그의 불행은 그만의 탓일까? 한 노숙인의 불행은 혼자 짊어져야 할 운명일까?
이씨의 마지막 꿈 ‘방’을 생각할 때마다 선우경식 원장의 죽음이 더 ‘잔인한 것’으로 다가온다. 그의 작은 꿈을 선우경식의 죽음과 함께 이제 곧 닥칠 자신의 죽음과 함께 묻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땅에 묻는 4월은 잔인하기만 하다.

심명희/ 마리아.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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