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커스 보그의 눈으로 역사적 예수 읽기-6]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는 미국 오레곤 주립대학 교수이고,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는 ‘예수 세미나’의 대표적 성서학자이다. 그의 글은 쉬우면서 학문적 양심에 솔직하고, 신앙의 성숙을 향한 열정도 담겨 있다. 교회에서의 가르침이 불합리하다고 판단해 어린 시절 다니던 교회를 떠났다가 20여년만에 돌아와 지성적 신앙생활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여러 저작들을 통해 열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은 그의 책 <예수 새로 보기>(원제 Jesus : A New Version, 1987)의 요지를 추리면서 오늘날 어울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어떤 것이어야 할지 간단하게 정리해본 글 중 하나이다.

지난 번 보았듯이, 로마의 지배 하에 있던 유대인들, 특히 유대교 지도자들은 생존 전략의 일환으로 ‘거룩’의 에토스를 지키고자 했다. ‘거룩’은 부정한 것으로부터, 즉 거룩을 더럽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했다. 그러다보니 정결-부정, 성-속, 유대인-이방인, 의인-죄인 도식이 팽배해졌고, 거룩할 수 없는 죄인들이 양산되었다. 이 때 예수는 ‘거룩’이 아니라, ‘자비’를 가르쳤다. 거룩이 ‘분리’라면 자비는 ‘포용’이다. 예수는 죄인을 포용하면서, 거룩의 이분법으로부터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촉구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예수를 선생(랍비)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예수는 건전한 도덕이나 인습적 진리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변혁의 길을 가르쳤다. 모세가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어 새로운 길로 인도했듯이, 인습적 지혜에 대한 비판적 정신으로 무언가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유대교의 율법에 ‘각주’를 달거나 기존 권위에 기대어 해설하는 형식을 취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인간의 직접 경험에 호소하거나,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마태 6,24),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다”(마태 5,15)는 등 각종 격언을 구체적으로 실천했고, “들꽃이 어떻게 자라나는지를 살펴보아라”(마태 6,28),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딸 수 있으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마태 7,17) 등 자연으로부터 배운 교훈을 일상에 직접 적용했다.(135-37)

당시 사회는 ① 가족, ② 부, ③ 명예, ④ 종교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 가운데 ① 가족은 가장 일차적인 사회단위이자 경제단위였으며, 사람들은 가족에 근거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받았다. 개인은 “아무개의 아들”로 불렸다. 이 때 예수는 종종 가족과의 관계를 청산하라거나 가족적인 의무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하곤 했다.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 것은 유대인들의 가장 신성한 가족적 의무였는데, 예수는 그것도 부정했다.(147-48)

그리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② 당시는 부와 소유를 하느님의 축복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예수는 도리어 부자에게는 화를, 빈자에게는 복을 선언하면서 부를 비판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밧줄?)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마태 19,24)면서, 제자들에게 부를 경계하라고 가르쳤다. 물론 예수가 부 자체를 비판했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149) 예수 추종자 가운데는 부자도 있었고, 제자단을 물질적으로 지원했던 이들도 있었기 때문이다.(루가 8,1-3)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가 인습적 지혜에 의해 정당화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③ 예수는 사회적 추구의 대상인 명예도 조롱했다. 연회 자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앉으려는 사람, 장터에서 인사받기 좋아하는 사람 등을 나무랐다. 구제할 때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④ 무엇보다 예수는 인습적 진리의 정점인 종교를 비판했다. 당시 종교는 정체성과 안정성의 문화적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가령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즉 인습적 지혜의 틀 안에서 종교는 쉽게 영예스러운 정체성과 안정성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아브라함을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말하기도 했듯이, 예수도 사회적 관례에 따라 행한 종교적 성취 속에서 삶의 안전과 성공을 구하는 태도를 비판했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일반 대중이 걷는 모든 길 자체를 부정했다거나 저주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예수는 분명히 ‘다른 길’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 이유인즉, 예수가 생각하고 믿는 궁극적 실재, 즉 하느님은 은혜로운 분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궁극적 실재를 무심한 물질이나 에너지, 비생명적이고 비인격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지만,(139) 예수는 실재를 비물질적 ‘영’으로 보았고, 은혜롭고 자비로운 존재로 인식했다.(마태 6,26; 28-29; 5,45) 자연 속에서 드러나는 신적 질서와 특성을 주의깊게 보라고 요청했다.(141) 온 세상에 하느님의 영광이 가득 차 있으며, 하느님의 광휘가 스며있다고 보았다. 이른바 ‘탕자 이야기’에서 드러나듯이, 하느님은 은혜로운 아버지였다.

예수는 하느님의 은혜를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방식으로 구체화했다.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누군가와 음식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그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뜻이었으며, 그것은 하느님이 이른바 죄인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선포이기도 했다.(143)

하느님의 특성을 나타내기 위해 예수가 가장 빈번하게 사용한 언어는 “자비롭다”는 낱말이다. 히브리어로 ‘자비’는 ‘라하밈’이며, 그것은 ‘자궁’을 뜻하는 ‘레헴’의 복수형 명사이다. 라하밈에는 양육, 출산, 포용, 부드러움 등의 의미가 들어 있다.(143-144) 인습적으로는 하느님을 거룩과 분리의 질서에 부합하지 못하는 이에 대한 심판자로 간주하곤 했지만, 예수의 하느님 이미지는 그 반대였다. 예수의 하느님은 은혜로운 분이었고, 어떤 사회적 기준을 충족시켜야 보상해주는 그런 분이 아니었다.

하느님이 은혜롭다는 것은 구약시대, 특히 출애굽과 바빌로니아 포로시대에도 중심적인 가치였지만, 사람들은 점차 인습적인 지식에 경도되면서, 보상과 처벌, 의와 불의, 가치와 무가치 식의 이분법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왜곡했다. 주인의 처사에 항의했던 포도원 일꾼들과 집을 떠났다 돌아온 둘째의 형이 제기했던 항의 속에서 인습적인 의식을 읽을 수 있다.(144)

오늘날 교회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은 상당부분 인습적인 말이 되고 말았다. 자비와 사랑이라는 말도 그저 교회 안에 나오는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제한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심지어 하느님마저 예배당 안에 가두어두는, 사실상의 우상숭배를 행하기도 한다. 하느님이 은혜롭다는 것은, 예수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듯이, 하느님이 인간의 인습적인 진리에 갇히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편견을 늘 뛰어넘어 모든 곳에서 공평하게 작용하는 분임을 의미한다. 정말로 그렇게 보고 산다면 그만큼 혁명적인 삶도 더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는 혁명적인 삶으로의 인도자라고 할 수 있다.

* ( )속 숫자는 마커스 보그, <예수새로보기> 김기석 옮김(한국신학연구소, 2004)의 쪽수입니다.

이찬수 / 종교문화연구원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