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떠나야 교회가 산다-5]

▲ 사진/한상봉 기자(자료사진)
네메세키 교수가 <하느님을 찾아서>라는 책에서 분류한 바에 따르면 세 번째 유형에 속하는 선배가 있다. 그녀는 ‘급진적 그리스도인’이었다. 지난 삼십여 년 동안 가톨릭노동청년회와 노동사목에 종사하면서 ‘자발적 가난’을 통하여 가장 가난한 노동자들의 처지에 가슴아파하면서, 복음적 요청 그대로 살려고 애를 써왔다. 그가 자신을 송두리째 세상과 인간을 위하여 ‘가톨릭신앙’을 고백하며 봉헌해 왔으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교회 제도권의 차가운 눈빛이었다. 너무 과격하다는 것이다. 어쩌면 가톨릭교회의 외피를 쓴 빨갱이라는 오해도 받았을 것이다.

노동자 출신이었던 그녀는 1970년대의 가혹한 노동의 시절을 거치고, 스스로 노동자의 벗이 되기로 작심하였다. 1980년대 90년대의 폭력적인 노동세계 안에서 그가 한 일은 참으로 인간다운 요구였지만, 전통적으로 ‘반공주의’를 표방했던 교회는 색안경을 쓰고 노동운동을 바라보았으며, 그녀가 활동했던 교구가 1970년대 이후에 줄곧 친정부적 보수색깔을 유지해왔던 곳이기 때문에 그녀가 겪어야 했던 고통도 그만큼 컸다. 밥 한술은커녕 쪽박을 깨지 않으면 다행인 형국이어서, 어머니인 교회가 그녀에겐 엄마노릇을 거절했다고 보면 맞겠다.

어느 날 본당에서 레지오 마리에 활동을 하는 자녀가 이런 말을 했다.
“엄마 요즘 내가 무슨 지향으로 묵주기도 하는지 알아?”
“모르지.”
“엄마가 회개하고 성당에 다시 나가라고 기도해.”
“……”

레지오를 맡고 계신 수녀님인지 누가 이 자녀에게 엄마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해주었다는 것이다. 성당에만 나가면 ‘열딱지 나서’ 그냥 있는데, 아마도 수녀님 보시기에 그 딸네미의 엄마는 ‘냉담중’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자기 자식이 엄마의 회개를 위해 날마다 기도한다는 것을 알게 된 선배는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평생 자신을 한 번도 '교회를 떠났다'거나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선배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톨릭 신앙 때문에 고난의 세월을 견디어오고 헌신할 수 있었다고 믿었던 선배는 다시 한번 교회에 정나미가 떨어졌을 게 뻔하다. 복음 앞에서 부끄럽게 사는 교회가 보잘것 없는 형식적 잣대로 신자들을 냉담자로 낙인찍거나, 가슴이 식었는지 미리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주제넘은 짓인지 생각하는 것이다. 교회야 말로 ‘내 탓이요!’ 운동을 자신을 겨누어 다시 해야 할 판이다.

▲ 사진/한상봉 기자(자료사진)

교회를 떠난 그리스도인, 가여운 교회

그동안 교회 안팎에서 생활하면서 참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날 기회가 있었다. 초록은 동색(同色)이라고, 예전에 사회운동을 하던 이들은 더욱 친근감이 느껴지고, 지금 그가 마음공부를 하거나 귀농해서 살거나, 여느 직장에서 돈벌이를 하거나, 학원강사로 고전하고 있다 해도, 그 마음의 바닥에선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갈망이 여전히 식지 않았음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가톨릭 신자였던 이 친구들 가운데 지금도 성당에 나가고 있다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별로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오래간만에 소식이 닿아서 친구들을 만나면, 한 때는 첫 인사가 “너, 요즘 성당에는 나가냐?” 하는 질문이었다. 돌아오는 답은 ‘애석하게도’ "이젠 교회를 졸업해야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네들은 예전보다 더 인간적으로 성숙해 있었다.

사회운동만 알던 사람이 사람의 마음도 헤아릴 줄 알게 되었다. 전투적인 해방신학만 아니라, 자연에 맛들이며 사는 법을 몸에 익혔다. 많이 평온해지고 좀더 행복해하는 것 같았다. 신앙, 성당… 이야기가 나오면 그냥 웃고 만다. 할말이 없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결코 냉담하지 않다. 여전히 가슴이 따뜻하고 복음적 진실이 무엇인지 아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성당에는 나가지 않지만 사제들과 교회에 대하여 좀더 너그러워진 것 같았다. 상처 투성이 교회에서 벗어나자 심간(心間)이 편해진 것이다.

그들에게 교회는 일종의 ‘관료사회’였다. 그 울타리가 무력한 자신을 보호해줄 때도 있었지만, 정작 중요한 결단을 내릴 때에는 갑갑해서 견딜 수 없게 만든다. 어머니가 없이 아버지만 있는 교회는 너무 유치하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곳에 가지 않는다. 엄격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아이들은 대학에 입학하는 동시에 ‘종교적 독립선언’을 하는 경우도 있다.

문득 예전에는 아이들 교리반을 초기교회 신자들이 쓰던 이름 그대로 ‘명도회(明道會)’라고 하였는데 지금도 그 이름이 남아있는지 궁금해졌다. 무조건 믿을 교리를 그저 답습하는 ‘교리반’보다는 진리를 밝히는 ‘명도회’란 이름에서 더 활력있는 신앙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잿밥보다 염불에 마음 쓰는 성직자들과 그리스도인, 그리고 교회가 가여운 느낌을 자아낸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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