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떠나야 교회가 산다-4]

교회가 세상 속에서 대안적 가치를 잃어버릴 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현상 중의 하나가 ‘개인적 그리스도인’의 출현이다. 더 이상 교회에 기대할 것이 없다고 느낀 진지한 신앙인들은 ‘복음적 진실’을 밝히기 위하여 새로운 길을 열고 있다. 사랑은 ‘무한한’ 에너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에너지가 하느님에게서 오는 한 마르지 않는 샘처럼 그치지 않고 퍼서 쓸 수 있다는 믿음도 있다.

그러나 특출난 영성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현실을 사는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소유한 에너지의 한계를 가늠할 수 있겠다. 에너지가 많은 사람은 세상을 위하여 더 많은 고민을 하고, 더 많은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질적으로 에너지가 적은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절약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 변화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일에서 아예 손을 거두어들이고, 효과 있는 사랑을 위한 투신에 자기 에너지를 나누기를 원하게 된다.

▲ 사진/한상봉 기자

교회쇄신에서 자기쇄신으로 

이런 점에서 ‘교회쇄신’이란 주제는 교회의 부정적 측면에 주목하고 그 변화를 꾀하기 위하여 에너지를 주는 과업인데, 자기 경험을 통해 교회쇄신의 어려움을 체득했던 사람들은 에너지의 방향을 바꾸어, 교회쇄신보다는 확실히 마음만 제대로 먹으면 조율할 수 있다고 믿어지는 자기쇄신을 위해 공력을 쏟는다.

타인을 변화시키는 일이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게다가 타인들이 움직이는 ‘교회’라는 시스템 자체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몇몇 개인의 노력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그래서 개인주의적 신앙인들은 ‘자기변혁’을 통하여 세상을 변혁시키고자 한다. 공동체로서 교회가 복음을 살지 못하더라도, 자기 자신만큼은 그와 상관없이 복음을 살고자 원한다. 이러한 길을 걷는데, 교회란 울타리는 때때로 불필요한 간섭을 해대는 성가신 존재가 될 수 있다. 교회는 스스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살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마저 ‘교도권’이라는 잣대로 헛갈리게 만든다고 믿는다. 오히려 간섭 없이 자유롭게 ‘복음에 기대어 사는 사는 것’이 그에게 충만한 기쁨의 원천이 된다고 확신한다.

개신교의 경우에, 우찌무라 간조 선생의 영향을 받아 일제시대부터 시작된 ‘무교회주의’ 정신은 이런 생각에 공감하던 사람들이 시작한 신앙운동이다. 김교신, 함석헌 등은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통하여 정신적 교감을 나누었지만, 정례적인 짜여진 전례도 성직자도 없이 개인적 성화(聖化)에 목숨을 걸고 복음적으로 살려고 노력해왔던 사람들이다. 그러한 삶은 성서와 성령에 대한 깊은 신뢰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나는 네가 되고 싶다
가파른 산 위를 오르다
어느덧 그토록 깊은 외로움에 곤두박친
네가 되고 싶다

숨결이 갈라지고
네 등언저리에 몰아쳤던 스산한 눈빛이
내 얼굴에 솓아진다 해도
나는 네가 되고 싶다

없이 살다
없이 간 이
그토록 자유로이 참을 통해 날아간 비행 따라
내 날개도 환하게 펼쳐질 수 잇다면
네 수모가 오늘 내게 비수가 되고
네 눈물이 지금 내 뺨에 다시 흐른다 해도
나는 네가 되고 싶다

아직도 나는 백 살배기 바보새
나는 네가 되고 싶다

▲ 함석헌 명상집 <너 자신을 혁명하라>,김진 엮음, 오늘의 책
함석헌 선생이 지은 '백 살백이 바보새, 나는 네가 되고 싶다'라는 시편이다. <너 자신을 혁명하라>라는 함석헌의 글을 엮어놓은 책이 2003년에 나왔다.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이 책을 엮은 김진은 이렇게 말한다. "혁명은 하늘에서 내린 명(命)을 새롭게(革) 하는 것을 의미한다. 함석헌은 사회혁명 이전에 자기혁명, 자기해방을 강조했다. '참 나'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씨알로서의 삶(개인)과 씨알혁명(사회)의 시작이고 끝이다. 새로운 문명의 도래를 희망하고 그것에 헌신하는 사람일수록 자기자신을 끊임없이 '혁명'해야 한다. 함석헌은 자기혁명 없는 사회적 실천, 실천 없는 자기명상은 결코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지 못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신도들 개개인의 변화가 없이 교회쇄신은 불가능 하다. 결국 성직자들의 잘못도 교계제도의 불합리한 모습도 결국 바탕에는 이를 지지하고 밀어주는 신도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하나의 교회'인 '나'를 먼저 쇄신시켜야 한다고 역설할만 하다. 그래서 개인적 그리스도인들은 방법적으로 '나'에 주목한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나에 주목하다 보면, 결국 교회 자체를 잃어버리게 되고, 교회와 상관없는 주관적 신앙에 빠질 위험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교회란 '공동식별'을 가능하게 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관계를 통해 검증된 신앙은 주관적 신비주의 만큼 소중하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늘 '자기혁명'과 '사회혁명'을 견주어 보면서 묵상했다.  

죄 짓지 않으려고 성당에 안 가

예전에 대학 동창이 집에 찾아 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교회’이야기까지 화제가 번졌다. 그 친구는 얼마 전까지 교리교사를 하느라고 정신없이 바빴다고 한다. 그런데 교리교사를 그만 두자, 불쑥 성당에 왜 나가야 하는지 모르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교리교사를 하는 동안에는 자기 일 때문에 ‘교회와 신앙’에 대하여 사실 깊이있게 성찰할 기회가 더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적 여유가 나자 정신적 여유도 생겨서, 강론말씀도 다시 듣게 되고, 교회 분위기도 다시 살피게 되고, 결국 자신이 봉사해왔던 교회가 그다지 복음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급기야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짜증을 느낄 바에야 차라리 성당에 나가지 않는 게 죄를 덜 짓는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고 한다.

이런 사례는 너무나 많아서 모두 나열하기 힘든 지경이다. 최근 천주교회의 주일미사 참석률이 평균 25%안팎이라는데, 나머지 70% 이상은 나름대로 '교회 때문에' 신앙적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신부님 강론을 듣다보면 울화가 치밀어 올라서.." "저런 이야기를 왜 하는 거지. 도통 알아 먹을 수가 없네.." "그래서 어쩌란 이야기지, 공자님 말씀이군.." 현실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복음해설, 세상에 눈 감고 영혼의 구제에만 골몰하며 신자들을 교회 안에 잡아두고 싶어하는 심리를 읽을 때마다 사람들은 '(사제를 욕하고 교회를 모욕하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성당에 가길 포기한다.

이 엄청난 역설을 어떻게 이해할까? 몇몇 영성가(?)를 빼고는, 본당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많은 이들이 어쩌면 자기 성화나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성당에 열심히 나가는 것이 아니라, 성당에서도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활동에 매진한다. 맡겨진 일과 자신을 지지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어느 누군들 교회 활동에 계속 몰두할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들에게 교회는 ‘가치중립적’이다. 교회 자체가 복음적인지 아닌지 중요하지 않다. 거기에서 마땅히 할 일이 있으면 족하고, 어떤 성취감과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게 더 중요하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충분치 않다는 게 복음적 요청이다.

교회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개인적 신앙을 가다듬는 사람들은 그래서, 자신과 세상 그리고 하느님에 대해서조차 어쩌면 다른 이들보다 ‘진지한’ 신앙인인지도 모른다. 교회가 돌보지 않은 신앙을 스스로 돌보기로 작정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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