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사상연구소 포럼, '이태석 신부의 삶과 신앙' 이야기 나눠

한반도를 울리고, 아프리카를 울리며 우리 곁을 떠난 이태석 신부. 물질문명과 개인주의가 팽배한 우리 사회에 더불어 사는 삶, 사랑하는 삶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실천하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던져준 사랑의 사람 이태석 신부의 삶과 신앙을 조명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한국 그리스도 사상연구소(소장 심상태 몬시뇰)는 4월 4일 오후 2시부터 제 22차 정기포럼으로 고 이태석 신부의 삶과 신앙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고, 형 이태영 신부(꼰벤뚜알 프란치스꼬회)가 이야기 손님으로 초청돼 이태석 신부의 어린 시절과 수도자로서 선교사의 길을 얘기했다.  

▲ 영화 <울지마 톤즈> 사진

“하느님은 정말 사랑이십니다”

“태석이는 요한복음 4장의 말씀을 늘 실천했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의 삶의 목표였을 것입니다. 그가 투병 생활을 할 때 같이 다녔고 장례미사를 치루고 난 뒤 생각해 보니 정말 그가 제일 하고 싶었던 말이 그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태석 신부가 투병 중 치유를 위한 미사를 했다. 미사 강론을 통해 이태석 신부는 “한국에서 내가 만난 하느님, 그리고 톤즈에서 정말 가난하게 사는 이들과 함께 만난 하느님이 다른 하느님이라고 생각했다”라면서 “그러나 투병 중에 같은 하느님이라는 확신이 섰고, 우리의 하느님이며 우리는 한 형제, 자매이며 사랑의 하느님 안에서 함께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말하면서 ‘사랑’을 드러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말씀대로 살 수 있어 행복했고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살면서 다시 되돌아오는 행복으로 기쁘게 살았다고 형 이태영 신부는 전한다.

“태석이는 그곳에서 만난 나환자들을 천국의 열쇠라고 말했다”는 이태영 신부는 “그들은 나로 하여금 사랑을 실천하게 했고, 사랑을 받고 나누면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야말로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열쇠라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고 전해준다.

“이태석 신부가 타고난 것이 많아 그런 삶을 살았다기 보다, 재능이 많아 그 많은 일들을 했다기 보다, 그 삶을 돌아서 생각해 보니 자기 삶을 선택하고 결단을 하면 실천했다는 것이 우리와 달랐구나 싶습니다. 선택과 결단, 그리고 실천을 하며 투신하는 삶이 우리와 달랐기에 그 반향이 큰 것이지요.”

형 이태영 신부와는 2살 터울이었고, 형이 수도원에 갈 때 반대를 한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하기 위해 의과대학에 진학했던 소년 이태석. 그의 종교적 감수성은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 영화 <울지마 톤즈> 중에서

# 1.어린시절 (1)

10남매 중 아홉째로 태어난 이태석. 초등학교 3~4학년 무렵의 어느날 피아노 선율을 듣고 전율했다. 한번 만이라도 좋으니 피아노를 치고 싶었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의 소년은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는 소리를 하지 못했다. 음악적 감성 역시 뛰어났던 그는 성당에 오르간이 있다는 것에 생각이 머물렀고, 학교가 파하면 성당으로 달려가 오르간 건반을 치며 시간을 보냈다. 성당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이 따사로웠고,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소년을 인자하게 품어주었다. 소년의 성소가 싹트고 있었다.

이태영 신부: 오르간과 십자 고상 사이에 저녁 햇살이 내려앉고 태석이는 아버지와 같은 주님의 눈길을 느꼈지 않았나 싶습니다. 가난한 집의 어린 소년이 오르간 소리에 힘을 얻고, 예수님을 사랑스런 눈길로 바라보았겠죠. 가난의 영성이, 사랑의 영성이 어쩌면 어린 동생의 마음 속에서 싹텄을 것입니다. 가난이 성소의 출발이자 동력이 됐을 것입니다.

# 2.어린 시절 (2)

부산 송도. 마리아수녀회 소년의 집이 있던 곳에 소년 이태석은 자주 갔고 고아들의 엄마가 되어 함께 사는 수녀들에게서 많은 감동을 받는다. 어느날 의상실을 하는 누나에게 실과 바늘을 달라고 해서 가지고 나갔다. 그 뒤를 누나가 따라가보니 골목길에 고아들을 모아 엎드리게 해서 옷을 꿰매어 주고 있었다. 당시 소년은 그들과 시간을 오래 보내며 집에도 가지 않으려고 했다. 형이 말했다. 집에 가자고. 소년 태석은 이 아이들은 부모가 없는데 마음이 아파 두고 갈 수 없다고 했단다. 형 태영은 “우리 엄마도 고아야. 네가 있어야 엄마가 위로가 돼”라고 하면서 억지로 어린 동생을 집으로 데려갔다.

이태영 신부: 자비와 사랑에 대한 감수성 역시 그의 어린 마음 안에서 싹트고 있었겠죠. 그는 끝없는 나눔만이 행복을 이루는 정석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알았고, 아프리카에서 그것을 더 확실하게 배웠습니다. 그는 사람을 만날 때, 사람을 대할 때 하나의 영혼과 마주한다고 했습니다. 의사로서 환자를 만날 때도 아주 잠깐이라도 눈을 마주하고 바라보았답니다, 주님 안에서 영혼과 영혼이 만나는 것이니 그 울림이 클 수 밖에 없겠죠. 우리가 만나는 것은 석어 없어질 육체가 아니라 하느님을 닮은 고귀한 영혼입니다.

# 3. 청년시절

군의관 시절 부대와 가까운 성당에 다녔다. 제대를 얼마 남기지 않고 그곳 본당 신부가 군대 막사에서 자지 말로 사제관에서 같이 지내자고 했다. 돈도 안들고 좀 편할 것 같아 그리 하겠다고 했는데, 며칠 지내고 나니 “하느님 한테 당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성소가 비로소 형태를 갖기 시작했다.

이태영 신부: 어머니는 우리를 너무 고생시켰다고 생각했습니다. 의사가 되어 좀 편하게 살기를 바랐는데, 결국 태석이도 수도자의 길을 택했습니다. 선택을 앞두고 태석이가 찾아왔을 때 의사로서 봉사하는 삶을 원하면 산간벽지에 가서 봉사하면서 의사의 길을 가고 수도생활을 원하면 이 길을 가라고 말하면서 몇 개의 수도원을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좋아해 살레시오회 입회를 결정했어요.

“그가 톤즈로 간다고 했을 때 어머니와 누나들이 기후도 안맞고 가난하고 힘겨운 곳으로 가느냐고 물었죠. 태석이는 ‘내가 가 본 곳 중에 그곳이 제일 가난하며, 또 그곳에는 아무도 가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내가 가야한다’고 말했어요.”

“너희가 네 형제 중 가장 작은 이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 40)  

▲ 영화 <울지마 톤즈> 중에서

"공간과 시간 뛰어 넘어 마련해 준 하느님의 안배"

이태석 신부가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평생을 실천하면서 살았던 말씀이다.
선교사로 아프리카 톤즈 지역에 들어가 처음에는 밀려드는 환자 진료에 온 힘을 쏟았고, 그 땅의 미래, 톤즈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아이들의 정서를 어루만져주기 위해 브라스 밴드를 결성했다. 그 옛날 이태석 신부가 어린 시절 성당에서 오르간을 치면서 하느님께 위로를 받은 것처럼. 아이들의 음악적 감수성은 대단했다. 한국의 은인들을 통해 악기를 지원받았고, 두달 남짓 연습을 해서 합주를 했다. 첫 합주곡이 너무나 아름다워 이태석 신부도 울고 아이들도 울었다.

“태석이는 어릴 때 성당에서 오르간을 치던 모습과 아이들이 연주하는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하염없이 울었답니다. 그제서야 예수님께서 이미 오래 전에 자신을 어떻게 쓸지 알고 계셨던듯 하다고 말했어요. 한국 땅과 아프리카 땅, 그리고 30여년의 시간, 그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어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놓았던 것을 이해했답니다.”

이태석 신부는 그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사는 것이 자신의 성소임을 다시한번 깨닫는다. 그의 책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에서는 “마음이 더 가난할 수록 더 행복하고 그 아이들이 더 평화롭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삶과 성소를 돌아보면 첫 번 째 마음에 담은 말씀이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었다고 밝힌 이태영 신부는 가난 안에서 평화와 행복을 나누는 선교사가 이태석 신부였다고 밝혔다.

“세상에서는 이태석 신부를 가리켜 ‘우리가 만난 성자’,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칭합니다만 그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은 선교사”라고 말한 이태영 신부는 “요즘 각 교구나 본당에서 신자 배가 운동을 펼치면서 선교를 하고 있는데 숫자를 늘이기 보다 한사람의 영혼에 감동을 주며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선교일 것”이라면서 이태석 신부의 선교사로서의 삶을 얘기했다.

마지막으로 이태영 신부는 이태석 신부의 장례식을 치른 후 가족들이 모여 나눈 얘기를 전하며 자신도 감감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심정을 털어놨다. 
 

▲ 이태영 신부가 이태석 신부의 자작곡인 <묵상>이란 곡을 부르고 있다. (사진/상인숙 기자)

# 4. 이태석 신부를 보내고

어머니:
내가 고생을 할 때마다 하느님께 기도를 하면 다 들어주셨는데, 이태석 신부가 죽고난 후 이제는 내 기도를 들어준다는 확신이 없어졌다. 아프리카 오지, 너무 고생스러운 곳에 가서 고생하고 있었는데, 가족들이 너무 모른 척해서 그것이 마음이 아프다.

누나: 하느님께서는 왜 착하고 열심히 살았던 태석이를 그렇게 빨리 데려 갔느냐? 신부인 네가 대답을 좀 해라.

이태영 신부: 잘 모르겠지만....하느님은 제일 아름다울 때 그를 데려가고 싶었던 것 아닐까. 그의 삶이 아름다웠고, 그가 죽은 후에도 이렇게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만큼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태석 신부의 삶이 우리의 삶으로 이어지는 기억으로 살려냈으면 한다. 성체성사도 예수님에 대한 기억을 오늘에 되살리는 것 아닌가.

“태석아, 미안해.”

“그가 숨을 거둘 때 가족으로 참 슬펐고, 수도자로서 그렇게 살지 못한 내가 부끄러웠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이 참 부러웠습니다. 평생 꿈꾸었던 것,‘사랑’에 모든 것을 쏟았고,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이 부러웠습니다. 이태석 신부에 대한 기억이 예수님에 대한 기억과 함께 우리 삶 속에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이태영 신부는 이태석 신부의 장례 미사 때 아프리카에서 유학온 지 한달이 된 2명의 현지인을 보며 “태석이의 몫이 여기까지”라고 생각했고, “그 유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 이태석 신부의 삶을 기억하며 살아갈 수 있게, 이제 남은 것은 우리의 몫이다”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은 씨앗입니다. 이태석 신부는 그 씨앗을 심고 떠났습니다, 이제 가꾸고 꽃피우고 열매를 맺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할 몫입니다.”

이날 포럼 참석자들은 이태석 신부가 중학교 때 작사 작곡을 한 ‘묵상’이란 곡을 이태영 신부의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했으며, 그를 기억하기 위해 피아노 반주에 맞춰 또 노래하기도 했다.

묵상

십자가 앞에 꿇어 주께 물었네
오-오-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
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
왜 당신은 보고만 있냐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께 물었네
세상엔 죄인들과 닫힌 감옥이 있어야만 하고
인간은 고통 속에서 번민해야 하느냐고
조용한 침묵 속에서 주님 말씀하셨지
사랑 사랑 사랑 오직 서로 사랑하라고
난 영원히 기도하리라 세계 평화 위해
난 사랑하리라 내 모든 것 바쳐
난 영원히 기도하리라 세계 평화 위해
난 사랑하리라 내 모든 것 바쳐 사랑하리라
사랑하리 서로 사랑 서로 사랑 사랑하여라

▲ 이태석 신부가 중학생 때 작사작곡한 <묵상> 악보 (사진/상인숙 기자)

그는 이 자작곡의 노랫말처럼 불꽃같은 사랑을 불살라 세상을 깨우고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 한국 그리스도 사상연구소 소장 심상태 몬시뇰은 “어릴 때부터 주님 안에서 뜻을 찾고 영성을 키워온 이태석 신부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들을 하면서 짧은 생을 살다가 갔다”면서 “우리는 매순간 세상과 타협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봐야 하며 이태석 신부의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삶이 귀감이 되어 우리도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바란다”면서 이태석 신부의 신앙과 삶을 포럼 주제로 정한 이유를 밝혔다.

이날 참석자들은 이태영 신부의 이야기를 듣고 질의 응답을 한 후 2003년 한민족 리포트로 방송된 바 있는 “아프리카에서 찾은 행복 -이태석 신부” 영상물을 감상하며 이태석 신부에 대한 영성을 되새기며 그리움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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