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회의 긴급토론회 발제문

이른바 촛불정국을 통하여 드러난 한국천주교회의 상황을 살펴보고, 사회복음화와 교회쇄신을 갈망하는 천주교인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가늠해 보는 기초자료를 제공하려는 의도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최근 교회상황을 되짚어볼 때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은 교회대중의 ‘양극화’다. 즉 같은 천주교인이라 해도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 사이에, 또한 같은 그룹 안에서조차 서로 다른 신앙을 고백하고 있으며, 복음적 확신과 교회 사명에 대하여 다른 인식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저마다 확연하게 차이를 보이면서 소통의 가능성이 차단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1.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인인가?

먼저 우리 자신이 가톨릭 신자로서 폭넓은 스펙트럼 안에서 어디에 속하는지 가늠해 보자. 1975년에 초판이 발행되었으니까, 한국교회에 번역된 지 벌써 30년이나 지난 책이 한 권 있다. ‘희망을 갖기 위하여’란 부제가 붙은 <하느님을 찾아서>(분도출판사)라는 책이다. 이 책은 일본 상지대 신학교수였던 네메세키가 지은 것으로, 여기서는 가톨릭교회 안에 보이는 다섯 가지 유형의 그리스도인을 소개하고 있다.

(1) 보수적 그리스도인 :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방침이 지나치다고 판단하는 사람들로서, 공의회 이전 상태로 교회를 복귀시키려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요한 23세 교황의 개혁사상 때문에 교회가 개신교와 비슷해졌으며, 가톨릭의 본질을 심각하게 훼손시켰다고 본다. 이들은 현대적 사상 조류를 불온시하며, 교회는 절대불변의 영원한 진리만을 선포해야 하며, 다른 새로운 경향에 관심을 갖는 신학자들을 이단으로 취급한다. 가톨릭 신자 가운데 이런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지만, 재계(財界)의 지지를 받으며, 바티칸에도 그 지지자들이 적지 않다. 네메세키는 이들에게는‘장래성이 없다’고 표현하였다.

(2) 진보적 그리스도인 :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공의회를 쇄신의 출발점으로 하여 계속 전진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들은 이 쇄신을 합법적 수단을 통하여 실현시키고자 한다. 연구를 거듭하고 대화를 계속하며 사람들을 납득시켜 교회당국의 승인을 얻는 방법으로 쇄신을 이루고자한다. 이를 이루는데, 교황청과 각 대륙, 나라의 주교회의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네메세키는 가톨릭교회의 변화는 이들의 생각, 노력, 용기, 성령의 인도하심에 달려 있다고 본다.

(3) 급진적 그리스도인 : 교회의 모임과 조직활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며, 교회 쇄신은 점잖은 방법으로 실현시킬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교회 지도부를 향해 비판적 발언과 항의를 시도한다. 연좌데모나 항의집회를 열기도 한다. 그들이 바라는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이며, 복음대로 생명을 걸고 실천하면서 세상에 봉사하는 교회다. 스페인, 남미, 이태리, 프랑스, 네덜란드 등 교회를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이 이 유형이다.

(4) 개인적 그리스도인 :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현대 교회의 제도와 활동에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다. 해마다 늘어나는 이러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으며 그리스도를 자기 삶의 스승으로 받아들이지만, 교회가 그리스도의 영감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형식적이라고 여기는 전례적 삶을 포기한다. 가난한 이들의 벗인 그리스도와 멀어진 교회는 부자들과 자본주의에 타협하고 있다고 보며, 성사(聖事)마저 형식적 부담으로 느낀다. 그들은 자기가 교회조직과 연결되어 있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다고 믿으며, 교회의 쇄신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교회 쇄신에 대한 의욕을 아예 접어둔 채, 자신의 삶 안에서 독립적으로 신앙생활을 한다.

(5) 자치교회 그리스도인 : 교회에 대한 강한 불만을 품고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나 성사를 떠나서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들은 기존 교회의 쇄신을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대안 교회의 건설에 열정을 쏟는다. 그들은 자치교회를 이루어, 교회의 공적 조직에 얽매임 없이 별도의 성찬례를 행하고, 공동으로 기도하며, 대화나 토론방식으로 성서를 연구하고, 복음정신에 따라서 살려고 한다. 이들은 자기들의 모임만이 그리스도의 참된 아가페, 사귐을 경험할 수 있다고 믿으며, 이것이 현대세계에 적합한 생활방식이라고 믿는다.

네메세키 교수는 성령이 분열이 아닌 일치를 위한 영이기에, 교회의 분리를 낳는 네 번째, 다섯 번째 유형에 대하여 그 심정은 이해되지만, 위험한 태도라고 여긴다. 한편 교회는 세 번째 유형의 예언자적 행동에서 자극을 받아 두 번째 유형의 사람들이 용기를 가지고 추진해야 한다고 말한다. “전교회의 일치를 지키면서 전교회가 성령의 영원한 젊음에 부추김을 당해 젊음을 되찾게 하는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바라는 하느님의 원의(願意)”라는 것이다.

2. 2008년 세계교회의 상황: 보수화의 정착과 세력화

네메세키 교수가 소개했던 다섯 가지 유형의 그리스도인들은 2008년 한국교회에도 그대로는 아닐지라도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끝난 지 40여 년이 지나고 세계교회는 상당한 어려움과 변화를 겪어 왔다. 교황 요한 23세와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제안했던 ‘교회쇄신’을 위한 의제들을 중심으로 전진하려는 이들과 이를 역전시키려는 세력들이 길항작용을 하면서 교회 안에 새로운 과제들을 던져주었던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20세기말 21세기 초엽을 통과하면서 정치적/이데올로기적으로 상당한 혼란과 진통을 겪었다. 그 핵심에 사회주의와 노동운동 세력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이 혁명의 시대에 숱한 지식인들과 노동자세력이 성장하였다. 이는 구체제를 옹호하려는 가톨릭교회에 심각한 도전으로 비추어지고, 교황들은 줄곧 <오류목록> 등 금서목록을 적시하고, 모든 근대적 사상과 저항에 대하여 반발하였다. 교회 입장에서는 반종교적인 프랑스대혁명의 경험이 모든 변화 희구세력을 거부하게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혁명을 갈망하던 마르크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단언짓게 된 배경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불행한 태도는 가난한 대중들의 교회 이탈을 낳았을 뿐 아니라, 스페인 내란과 세계대전을 치르는 역사적 과정에서 교회가 복음적 진실보다 교회의 안위를 걱정하게 되면서 파시즘과 나치즘에 협력하는 결과를 낳았다.(그 가운데 교회의 이러한 태도를 교회 안에서 조직한 것이 ‘오푸스 데이’다)

전쟁 이후 세계를 대하는 태도는 둘로 나뉘어졌다. 한동안 바티칸은 여전히 비오 교황들에 의해 반공전선을 정치적으로 확대하려고 노력해 왔으나, 한편에서는 세상과 맺은 갈등과 반목을 종식하고 교회와 현대세계가 공존하면서 교회 스스로 고유한 복음적 원천으로 회귀하려는 세력이 나타났다. 요한 23세 교황은 우리시대의 화두를 ‘평화’로 상정하면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1958년에 소집하고 62-65년까지 공의회를 열었다. 이 기간 동안 한국교회를 포함한 세계교회가 새로운 견해를 학습할 시간을 얻었다. 교회는 더 이상 교계제도만으로 여겨질 수 없으며, 하느님의 백성으로 다시금 규정되었다. 그 하느님 백성 안에 성직자, 수도자, 평신자들이 평등한 ‘신도’로 참여하며 그 사도직 또한 나누어 갖는다. 더 이상 교회는 권위로 ‘위에서’ 세상을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어머니’로서 세상에 하느님의 자비를 선사하면서, 선의의 모든 세력과 동반하는 ‘품’으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교회는 완전한 사회가 아니라 ‘창녀인 교회’이며, 스스로 거듭나고 복음에 대한 신실성을 보증하기 위해서 기득권을 포기할 뜻이 있음을 밝혔다.

그 결과 교회의 정치세력화 노력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가난한 이들의 참상에 공분하여 참여하는 교회의 예언자 직분이 강화되어, 1967년 발표된 <민족발전촉진에 관한 회칙>에 힘입어 1968년 메델린 주교회의에서 기초교회공동체 건설과 해방신학 탐구에 몰두할 수 있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이 중남미 민중을 위한 해방운동에 대거 투신해 왔다. 세상의 가장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이란 명제가 현실 안에서 힘을 받게 된 것이다. 급기야 1979년에 발표된 푸에블라 주교회의 문헌에서는 문헌의 가장 첫장을 ‘민중사목’에 할애하게 된다. 한국교회 역시 1968년 이후 시기부터 유신독재에 맞서는 민주화 운동에 동참하게 된다.

한편 바티칸에서는 요한 23세 이후에 바오로 6세 교황이 유지를 이어갔지만, 끊임없이 교황청 관료들의 역(逆)바티칸공의회 압력에 시달려 왔으며, 이어서 요한바오로 1세 교황이 등장하여 “가난한 이들은 교회의 보물”이라고 주장하며, 마피아의 검은 돈 거래와 돈세탁의 창구로 의심받던 바티칸은행을 내사하라고 지시하자 교황청 관료들은 ‘요한 23세의 부활’이라는 악몽에 시달렸다고 전한다. (요한 바오로 1세는 최초로 대관식을 거부한 교황이었고, 세속 권력의 상징인 삼중관을 뉴욕 경매에 내놓아 그 수익금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기금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후부터 교황은 교권을 상징하는 주교관만 사용하고 있다) 결국 요한바오로 1세 교황이 33일만에 죽자,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이 1979년부터 2005년까지 집권하게 된다. 공산치하의 폴란드 출신의 교황은 사회적 민감성과 노동자들에 대한 선호를 분명히 하였으나, 교회 내적으로는 바티칸공의회 이전의 로마중심적 중앙집권주의로 회귀시키려는 보수성을 보여줬다. 이 와중에 1981년에 독일 출신의 라칭거 추기경을 신앙교리성(전 종교재판소) 장관으로 재직시키면서, 1984년 전후부터 해방신학과 기초공동체에 대한 대대적인 압박정책을 구사해 왔다. 이는 한국천주교회가 1980년대를 거치면서 서서히 보수화되어 가고, 1990년대를 넘어가면서 보수적 성향으로 확정되는 상황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 와중에 2005년 라칭거 추기경이 베네딕트 16세 교황이 되면서, 독일의 가톨릭 평신도 개혁운동단체인 <우리가 교회다>의 크리스티안 바이스너 대변인은 “라칭거 추기경은 이제라도 교회 개혁이 자신의 임무라는 점을 알아차리고 전임자와 같은 길을 걷지 않기만을 바란다”고 지적했으며, 또 다른 가톨릭 개혁 단체인 <아래로부터의 교회>의 베른트 괴링 대표는 “라칭거 추기경의 새 교황 선출을 재난으로 본다”고 비난하는 데 이르렀다. 최근 바티칸과 이슬람권과 빚은 마찰이나 라틴전례의 부활, 여성사제직 자동파문 등의 조치들은 그 부산물로 해석된다. 교회는 앞으로 상당한 기간동안 ‘어머니’에서 다시 ‘교사’ 또한 ‘검열관’의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즉, 현실은 첫 번째 유형의 그리스도인들이 교권을 장악한 상태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교회 지도부의 보수화와 사목정책이 곧 모든 가톨릭교회의 보수화, 또한 바티칸공의회 이전으로 완전히 돌아갈 가능성은 높지 않다. 이미 바티칸공의회의 새로운 교회관과 사목관을 습득한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이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으며, 이들이 현재 상당수 교회권력에서 소외되어 있지만 사목/생활현장에서 여전히 자신의 소신대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유신시대적 발상에 젖어 있는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었다 해서 한국 민주주의가 쉽게 전복될 수 없는 것과 같다.

3. 2008년 한국교회의 지도부-신자들의 선택

한국교회는 1974년 지학순 주교의 구속사건 이후로 1987년 6월 민주화대투쟁을 거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 특히 그 과정에서 등장한 정의구현사제단은 중남미의 해방신학과 기초공동체 건설에 비견할만한 변화를 겪었다. 민중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절박감과 진보적 사회운동에 대한 사제들의 헌신은 대단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중남미 교회의 경우에는 중남미 주교회의 자체가 1979년에 푸에블라문헌에서 보듯이, 그 시대적 징표를 ‘민중해방’에 두었으며, 해방신학을 중남미의 공식적 신학으로 공인하였다. 그러므로 네메세키 교수의 표현대로라면, 교회 지도부가 집단적으로 진보적 태도를 견지하였다는 점에서 교회의 희망적 전망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합법적으로’ 교회를 쇄신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상황은 달랐다. 1970년대에 김수환 추기경, 지학순 주교, 김재덕 주교, 두봉 주교, 1980년대의 윤공희 대주교로 대표되었던 진보적 교회 지도자는, 교회적-사회적 차원에서 지속적인 진보적 견해를 관철하지 못했을 뿐더러, 1970년대부터 이제까지 내내 정치-종교적으로 보수적 견해를 대표하였던 몇몇 주교들이 1987년 이후에는 교회 지도권을 장악해 왔다. 이는 점차 전국적 현상으로 나타나는데,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이후의 정치-종교적 보수화 경향과 무관하지 않는 것 같다. 이른바 ‘한국교회는 로마교회의 복사판’이라는 지적이 틀린 말이 아니라면 말이다. 교황이 방한한 1984년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행사와 1989년 세계성체대회 당시에 ‘로마보다 더 로마 같은 한국교회’라는 말이 나왔다. 그 사대주의적 경향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낳은 토착화 논의를 압도하였다. 비슷한 예전의 교리-신학적 태도에 한복만 걸친다고 아조르나멘토가 이뤄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선교 200주년에 즈음해서 다양한 논의를 거쳐 작성되었던 <사목회의 의안> 역시 중남미의 <푸에블라 문헌>처럼 공적으로 선포되지 못한 채 교회에서 유실되고 말았다.

한국교회에서 1970년대에는 두 번째 유형의 그리스도인들이 세 번째 유형의 그리스도인들과 공존하는 모습이었지만, 지난 20여 년 동안 주로 세 번째 유형의 그리스도인들이 남아서 외롭게 ‘세상에 봉사하는 교회’를 주장해 왔다. 이들은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해야 하며, 이를 위해 복음적 가난을 살고 영적으로 이를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들을 위해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였으며, 그 현장에서 민중을 위해 헌신하면서 복음을 증거했다. 그리고 민중에 대한 그 열정과 교회에 대한 사랑이 컸던 만큼 안온한 교회에 대한 비판의 강도도 높았다.

1984년에 조직된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를 비롯해서 그 이후에 만들어진 모든 진보적 교회 단체들의 목적란에는 늘 ‘사회복음화’와 나란히 ‘교회쇄신’이란 문구가 뒤따라 다녔다. 교회가 곧 자신의 신원(身元)이며, 자기 운동의 원천이 투명하고 자랑스럽기를 원하였던 까닭이다. 어머니이신 교회의 젖을 먹고 힘을 길러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젖은 대체로 메말라 있었다. 어머니는 대체로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부자였던 큰아들의 환심을 사는데 골몰했으며, 가난한 둘째 셋째 아들에겐 상당히 무심하였다. 한국교회에서는 명백한 다섯째 유형의 그리스도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인 공교회의 무심함 때문에 스스로 젖을 얻을 방도를 모색해야 하였던 이들은 이른바 ‘공동체 전례’라고 부르는 살아있는 전례를 행하고자 하였다.

본당 미사를 참례하지 않더라도, 간헐적으로 주어지는 ‘의식있는’ 사제가 집전하는 소규모의 전례에 참석하며 서로 격려하고 에너지를 주고받았다. 공교회와의 형식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내용적으로는 자신들의 사회-종교적 열망을 채워줄 수 있는 다른 통로를 열어두고 있었다. 교회 제도권의 입장과 무관하게 ‘교회’ 그 자체는 이들에게 마르지 않는 친교와 투쟁의 원천이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교리적 태도와 상관없이, 여전히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평신자/수도자/사제들이 그 교회 안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교회 제도권에 대한 저항세력이면서, 동시에 교회가 완전히 부패하지 않도록 막아주는‘소금’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의 한국교회에 가장 큰 도전은, 교회를 떠나 개인적 신앙을 살고자 하는 네번째 유형의 그리스도인들이다. 이들은 공교회에서 쉽게 ‘냉담자’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그 스펙트럼은 지극히 다양하다. 이들의 영적 갈증이 크고 선명할수록 교회에는 엄청난 파급효과를 갖고 있는 까닭이다. 2000년대야말로 한국사회가 처음 맞는 개인주의 시대가 아닌가? 한국교회가 외형적으로 급성장하였다지만, 전체 신자의 75%가 사실상 반(半)냉담 상태에 놓여 있는 상황이다. 중산층 이상의 신자층이 늘어난 탓에 아직까지 교회재정에 압박을 받고 있지 않은 상태여서인지 교회 지도부는 걱정은 하면서도 사목대안을 구체적으로 내놓고 있지 못한 상태다.

이 반냉담 상태의 신자들이 바라보는 교회는 (1) 가톨릭교회와 사회의 복음적 차별성을 느끼지 못한다. (2) 교회 전례/성사가 일상에 영적 활력으로 작용하지 못한다. (3) 부자들만의 잔치다. (4) 도덕적 사회적 영향력이 감퇴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에 신자들이 급성장했던 일차적 시기는 한국전쟁 직후였으며, 두 번째 시기는 교회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고 세계적인 행사를 벌였을 때였다. 즉 교회가 물질적으로 배고픈 이를 먹이거나, 국민들의 주권을 되찾아 주거나, 영적 활력을 북돋아 줄 때 교회는 성장했다. 최근 10년 동안 70% 이상 급성장한 교세는 전문가들에 따르면, 대체로 한국 개신교의 영적 파산선고와 문화적 혐오감에 따른 반작용의 결과로 보인다. 그러므로 한국천주교회의 최근 성장은 의미있는 수치가 아니라, 오히려 주의/경고의 징표라고 보아야 한다.

4. 2008년 한국교회의 진보-보수세력의 형편

현재 한국교회는 언제나 그랬듯이 다양한 견해와 신앙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각개약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세계교회 지도부는 바티칸을 중심으로 급격히 보수성향으로 바뀌었으며, 일부 유럽과 중남미, 아프리카 주교들을 제외하고는 지난 20여 년 동안 보수적 인사들로 대체되었다. 한국교회 역시 1970년대 민주화운동을 경험한 주교들이 작고하거나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이며, 요한바오로 2세와 베네딕트 16세 교황의 영향아래서 주교나 교구장으로 임명된 사람들이 교회 최고지도부를 구성하고 있다. 이는 교회 상층부의 보수화 경향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로 작용한다.(예전에는 교황을 한때 한국교회 안에서 ‘교종(敎宗)’이라고 불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교황(敎皇, 교회의 황제)으로 되불렀다) 이는 한국교회의 심장부라고 말할 수 있는 서울대교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보수적 성향의 주교가 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교회 보수화에 쐐기를 박는 인상을 주었다.

이번 촛불정국에서 정의평화위원회 명의로 성명서를 발표한 교구는 서울, 대전 인천 수원 교구 등이다. 이 중에서 성명서만 발표하고 시국미사나 촛불행진에 참여하지 않은 교구는 서울대교구가 유일하다. 또한 광주, 전주, 부산, 안동 등의 교구에서는 주로 정의구현사제단을 중심으로 성명서를 채택하고 촛불미사와 시위에 나섰다. 여기서 나타나는 흥미로운 현상은 1970년대 이후 전통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던 대전과 수원교구에서 교구차원의 대응을 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특히 대전교구는 이번에 정의평화위원회를 새로 발족하고 시국미사를 드렸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그리고 수원교구 역시 사회사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과거에 정의구현사제단의 창립과 활동의 핵심을 이루었던 서울대교구는 교구 사제들의 개별적인 참여를 논외로 친다면 이번 사태에 가장 소극적인 대응을 보였다. 이것은 교구마다 차별성을 보이면서 ‘교구 현실진단과 사목정책’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대체로 사제들의 자유로운 사회참여가 위축된 분위기임을 보여준다.

한편 교회 공식부문(공인단체)의 평신도 상층부라고 말할 수 있는 ‘한국평신도사도직전국협의회’(이하 평협)의 경우엔, 이번 사태에 대하여 일절 발언을 자제하고 있다. 이는 1970-1980년대 중반까지 평협이 보여준 적극적인 참여의식에 비추어 볼 때 납득할 수 없는 모습이다. 그러나 1987년 이후로 평협 지도부가 한용희 교수 등 진보적 성향의 인사에서 보수적 인사들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줄곧 그들이 장악해 온 평협이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전국평협이나 특히, 서울대교구 평협에서 이러한 태도는 뚜렷이 나타난다. 평협은 현재 사학법 개정 문제나 낙태 문제 등 교회 안에서 적극 추진하고 있는 사안에 대해서만 반응하고 있는 실정이며, 교회 내의 평신도 영향력의 신장과 더불어 또 다른 권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촛불정국에서 평협은 두 차례에 걸친 이름 도용과 관련된 잡음에 엮인 적이 있는데, 지난 7월 7일 <한국천주교회는 더 이상 상처받을 수 없다>는 광고를 조선, 중앙, 동아일보에 게재한 단체가 ‘뜻있는 천주교평신도전국협의회’라는 아리까리한 이름을 사용해서 물의를 빚었으며, 7월 14일에는 조선, 문화일보에 광고를 실은 ‘대한민국국가정체성회복국민협의회’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단체가 ‘한국평신도사도직협의회’ 이름을 도용해서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이번에 물의를 빚은 ‘뜻있는 천주교평신도전국협의회’이란 단체는 2007년 11월 27일 명동성당 꼬스트홀 만남의 방에서 삼성비리를 고발한 정의구현사제단을 비난하는 성명을 ‘뜻있는 천주교평신도 모임’이란 명의로 발표한 적이 있는 단체로서, 이번엔 이름만이라도 거창한 단체로 과시하듯이 ‘전국협의회’라고 바꾸어 광고를 냈다. ‘천주교 뉴라이트전국연합’ 역시 그저 ‘천주교뉴라이트’라고만 부르다가 광고를 내면서 ‘-전국연합’이라는 꼬리표를 달았으며, 이 두 단체가 모두 교계로부터 인준받지 않은 ‘임의단체’이며, 상임의장이 공히 ‘김현욱’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두 단체는 홈페이지도 없고, 연락처도 공개하지 않으며, 대표 이름만 있고 회원도 알 수 없는 실질적으로 ‘유령단체’에 가깝다. 실상 불교, 천주교 뉴라이트가 모두 대선을 앞두고 작년에 만들어졌지만, 정작 ‘뉴라이트전국연합’ 홈페이지에는 종교부문과 관련한 이 단체들에 대한 흔적이 전혀 없다. 즉, 사안에 따라 등장했다 사라지는 이슈형 돌출단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김현욱(전 민정당, 자민련 국회의원) 등은 개인카페와 <인터넷저널 광야의 소리 http://aware.co.kr>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들은 정의구현사제단을 ‘빨간사회구현사탄단’이라고 부르며 ‘사제단 박멸’을 자신들의 소명을 밝히고 있다. 김현욱은 한때 공식단체인 평신도사도직협의회는 위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으나, 그 원색적인 반북친미성 발언, 그리고 일방적인 교황청에 대한 애정고백, 사실상 신앙과 유리된 정치집단인 탓에 평협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번 촛불정국에서 나름대로 기여를 해 온 그룹은, 네메세키 교수의 유형대로라면 세 번째/네번째 유형에 해당하며 교계의 관점에서 볼 때 '임의단체‘라고 말할 수 있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그리고 공식단체에 속하는 남자수도회장상협의회와 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가 있다. 특히 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는 한국교회의 역사적 행보에서 일정한 수준의 진보성을 꾸준히 보여왔으며, 교회쇄신과 사회복음화를 위해 가장 주목할 수 있는 그룹이다.(필자의 견해로는 그들이 여성수도자라는 점이 원천적으로 교회권력에 참여할 가능성이 봉쇄되어 있는 교회현실에서 일정한 진보성을 강요받아 왔다고 본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그 활동의 파급력 때문에 가톨릭 친미반북수구세력에게서 가장 신랄한 공격대상이 되어 왔으며, 자발적 결사의 특징을 띠고 사안에 따라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개방형 단체라는 점에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성격이 ‘임의단체’라는 점에서 교회의 민주화 요구수준에 따라서 비슷한 업무를 감당하는 공식단체인 ‘정의평화위원회’와 결합하여 교구 안에서 큰 공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고, 때로는 교권의 동의 없이 단독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출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사제들이 주교에 종속되어 있는 교회구조 안에서 활동력이 왕성한 사제들의 경우엔 교구장 주교의 성향에 따라 교회 중심부에서 밀려나는 경향이 있으며, 어쩔 수 없이 활동에 제약을 받는다. 따라서 최근 급격히 보수화되는 교회상황에 맞물려 정의구현사제단은 운신의 폭이 좁아졌으며, 활동에 참여하는 사제도 상당히 줄어들었다. 특히 서울대교구의 경우엔 명시적인 정의구현사제단 사제들이 거의 와해되었다. 따라서 이들 사제들이 자신의 소신을 펴고 사회복음화에 나설 수 있는 조건이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교회쇄신’은 절대절명의 과제가 아닐 수 없으나, 현재 이러한 노력이 미진한 게 사실이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은 1984년에 결성된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가 모태가 되어 출범한 평신도 사회운동 그룹의 결집체로서, 역시 비공인 ‘임의단체’이며, 사제단과 마찬가지로 이들이 비공인 단체로 남아 있는 이유는 “교권으로부터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기 위해서다. 이 단체 역시 1990년대 중반까지 의미있는 역할을 수행하며 활성화되었으나, 대중조직화에 실패하여 지난 10수년 동안 침체를 거듭해 왔다. 지금은 노동, 농민, 청년, 여성, 인권, 신학연구 등 각 부문단체의 연결망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천주교 진보운동의 대변자로서 활동하고 있다. 촛불정국에서 천주교 운동이 분명하고 효과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던 것은 천정연이 대중성을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운동의 중심을 꾸릴 역량이 미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정의구현사제단이나 평신도운동 그룹은 가톨릭운동의 사회적 측면을 계승해온 유일 집단으로서, 향후 운동에 지속적인 복음적 영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가장 먼저 세상속에서 복음적 가치를 발견하고 인간화를 위해 헌신해 왔으며, 지난한 과정을 통하여 의미있는 경험을 쌓아왔다. 즉, '검증된 사도‘라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자신들의 영적 실천적 역량에도 불구하고 자기 운동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될 수 있는 신자들의 정서와 관심에 주목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어려움을 안고 있는 것이다.

5. 한국교회 쇄신과 사회복음화를 위해 2008년 촛불정국에서 배워야 할 것

(1) 교회 쇄신 없이 사회복음화 없다.

촛불집회에 참석하면서 가톨릭 대중들의 갈망과 열정은 확인되었으나 그 열정을 담아낼 그릇이 없었다. 정의구현사제단이 시국미사를 하고 단식농성을 하면서 잠시 가톨릭대중들이 일시에 결집되는 현상을 보였으나, 사제단의 천막철거와 동시에 이들 가톨릭대중들은 길잃은 양처럼 이리저리 고아처럼 거리를 떠다니며 비애를 씹었다. 명동성당은 이미 ‘사촌보다 이웃이 좋다’는 말을 실감나게 하였으며, 자기 활동의 신앙적 근거나 활동의 교회적 지지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사제들은 본당 신자들과 주교의 눈치를 보아야 했으며, 수도자들은 장상들의 눈치를 보고, 평신도들은 본당에서 무심한 교회에 대한 분통을 터뜨렸다. 가톨릭교회의 일치는 때로 힘이 되지만 때로 맥을 풀리게 한다.

교회가 보수화되고, 사회적 제 현상이 교회에서 확인될 때마다 ‘뜻있는’ 신도들은 절망한다. 실상 우리가 이명박 대통령의 독선에 대하여 분노하지만, 교회도 마찬가지로 독선을 자행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경제적으로 ‘강부자’라면 교회도 ‘강부자’를 선호한다. 현 정권이 신분적으로 ‘고소영’이라면 현 교회는 ‘성직자 중심’이다. 우리 안의 파시즘을 외면하면서 세상에 대하여 파시즘을 논한다면 누가 동조할 것인가? 먼저 여전히 교회권력의 일부를 나눠 갖고 있는 각성된 사제들이 교회쇄신운동의 전면에 서야 한다. 사제갱신운동에서 시작해서 교회갱신으로 나가야 한다.

(2) 조직이 아니라 네크워크다.

촛불집회의 시작은 촛불소녀와 네티즌들이었으며, 운동조직은 오히려 활성화된 에너지를 잠식해 왔다. 그리고 지금도 방송국 앞에서 촛불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모여든 네티즌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시간과 돈을 써가며 세상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그들이 이러한 헌신을 통한 권력에 대한 참여를 바라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들의 움직임은 대안적이며 복음적이다.

우리가 조직을 말하는 순간 복음은 증발한다. 우리가 교계제도를 강조하는 동안 하느님 백성은 교회를 떠나고 있지 않은가? 사제라는 이유로 중심에 서지 않고, 다만 복음적 신실성과 가톨릭신자들에게 대한 공감만으로 누구든지 언제든지 어디서든 다양한 중심에 설 수 있는 네트워크 방식의 운동이 필요하다. 이는 교계중심적 교회에 대한 대안이며, 조직 중심의 사회운동에 대한 대안이다. 온-오프라인을 겸비한 대중의 자발적 의사와 행동에 신뢰를 보내는 운동이 필요하다. 공동식별을 통해 ‘가톨릭적 다중지성’을 발달시키고, 일상활동에서 모은 지혜를 전국적 차원에서 공유하는 운동이 필요하다.

(3) 대안적인 인터넷/오프라인 언론이 필요하다.

촛불시위를 활성화하고 공간적으로 직접 참여할 수 없는 이들에게도 그 열기를 전달할 수 있으며, 여론을 형성하는데 가장 큰 몫을 한 것은 당연히 언론이다. 방송의 역할도 중요했지만, 결국 수많은 인터넷 매체들이 생중계하고 시간단위로 상황을 알려주고 인터넷 상에서 토론하고 의견을 모으고 행동을 조직한 것도 인터넷 공간을 통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운동방식을 고민하면서 인터넷 매체를 상정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논의가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상황을 알리고 생각을 나누고 행동을 모을 수 없는 가림막 없는 개방된 매체가 필요하다. 현재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교계언론인 평화신문과 가톨릭신문이 있지만 촛불정국에서 교계의 관심만큼만 보도하고 있을뿐더러, 교계의 공식적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인터넷상으로 그나마 활용될 수 있는 것은 이른바 ‘서울대교구’에서 운영하는 ‘굿뉴스’ 게시판뿐이다. 이 마당에 가톨릭인터넷언론으로 등장한 것이 <지금여기>다. <지금여기>가 가톨릭의 ‘아고라’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면 바랄 나위 없을 것이다. 이는 많은 사람들의 적극적 참여에 의해 가능할 것이다.

한편 인터넷 매체뿐 아니라 낮은 차원에서나마 오프라인 매체가 필요하다. 한 장짜리 종이신문이라도 있어야 현시국과 교회상황에 대한 우리의 뜻을 일상적으로 전파할 수 있다. “한번 어디 들어가 보세요!”라는 말로는 파급력을 가질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매체를 전달하는 작은 실천활동 가운데 자긍심을 느낄 수 있으며, 비슷한 생각을 지닌 벗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도로시 데이가 미국 전역에 ‘환대의 집’과 ‘농경공동체’를 만들었던 가톨릭일꾼운동이 제일 먼저 <가톨릭일꾼>이라는 신문에서 시작되었음을 기억하라.

(4) 근거지가 필요하다

여기서 근거지란 일종의 ‘진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진지는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 어느 곳이든, 오프라인 형식의 어떤 소모임이든 다양하게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일상을 살아가는 서민들이 생활감정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생협모임이든 생태모임이든 학습모임이든 봉사단체이든 상관이 없겠다.

한편 이러한 노력은 네메세키 교수가 말한 네 번째 유형에 해당하는 ‘개인적 그리스도인’들을 규합할 수 있는 마당이 될 것이다. 이들은 교회의 제도적 측면에 실망한 나머지 교회를 떠났지만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가톨릭신앙 안에서 생활한다. 이들이 다시 본당구조로 돌아온다는 것은 그리 녹록치 않고 꼭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현대 사회는 공간적 제약을 넘어서서 활동하고 신앙한다. 그러므로 이들이 인터넷 매체와 카페를 통하여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소통할 수 있도록 배려함은 당연한 요구일 것이다.

다만 다양하게 방식으로 소통하는 개인과 집단이 서로 만나 자신의 신앙을 공동고백하고 나눌 수 있는 일정한 공간이 요구되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 <천주교 시국회의>가 그러한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현재 촛불정국이 언제까지나 똑같은 방식으로 지속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단지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하는 5년 동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로도 언제든지 우리의 노력과 투신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 달에 한번씩이라도 정기적으로 시국미사(이름을 바꾸어도 좋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시대의 미사’ 또는 ‘세상을 밝히는 촛불미사’)를 열어 공감대를 형성한 사람들이 모여서 전례에 참여하고 경험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부산교구 정평위와 사제단이 공동주최하고 있는 월례 아름다운 세상을 여는 미사‘처럼 매달 홍세화, 박노자, 이제민 신부 등을 초청해서 강론 대신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면 좋겠다.

그래서 각자 생활공간에서 가능한 방식으로 접속하고, 성별(聖別)된 공간에서 함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고 현실 안에서 공유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우리 신앙과 실천을 아우르는 ‘조직없이’ 가능한 ‘진지(공간)’를 얻게 될 것이다.

(5) 가톨릭 촛불잔치를 열자

우리 신앙과 실천을 축제로 만들 수 없다면 이미 ‘복음’도 아니고 실패한 영성일 것이다. 교회쇄신과 사회복음화를 위한 우리의 투신은 단순히 우리와 생각과 실천방식이 다른 이들과 다투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살아내려는 활동이며, 그 복음을 세상에 육화/강생하려는 노력이다. 그러므로 이는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영성의 문제이며, 이 일을 하는 과정에서 언제나 즐거워야 한다. 이를 위해 고난의 시간이 오더라도 서로 위로하고, 경쾌한 춤을 추듯이 따뜻하게 어려움을 받아들여야 하리라 생각한다. 오늘 이 시간도 그러한 시간이 되리라 믿는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이 자리에 머물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를 축성하시고 그분이 우리를 이끌어 가실 것이다.

“부유한 이여, 가난한 이를 기억해 주십시오. 직업을 가진 이여, 무직자를 기억해 주십시오. 건강을 가진 이여, 병든 이들을 기억해 주십시오. 가톨릭이든, 불교든, 이슬람이든, 개신교든, 심연의 공허를 지고 살아야 하는 인간이 종교에 영혼을 기댈 때 무엇을 기대하는 것인지 고위직 성직자들이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요한바오로 1세 교종.


/한상봉 2008-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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