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이야기-김덕진]

나는 1982년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인 김은숙 씨를 만난 적이 없다. 사실 ‘부미방’의 문부식, 김현장이란 이름은 기억이 나고, 이들을 숨겨주었다가 구속된 원주의 최기식 신부는 알지만, 김은숙이란 이름은 생경하다.

게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 문부식이란 사람이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했네”, “변절을 했네”, “뉴라이트가 되었네”, “부산 동의대 사건은 민주화운동이 아니라고 떠들었네” 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탓에, ‘부미방’ 자체에 대한 이미지도 좋지 않았다. 과거에 자신이 했던 일을 후회하고 부정하는 일은 개...인의 자유니까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자신의 “회심”을 합리화하기 위해 다른 이들의 정신과 행동까지 폄훼하는 사람은 부산미문화원 아니라 백악관에 불을 질렀던 사람이라도 난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은숙 씨의 암투병 소식과 함께 그녀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이 남긴 글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전두환 군사독재정권과 밀월을 즐기는 미국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때,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과 독재정권 비호에 대해 미국이 책임지라고 나섰던 ‘부미방’이 바로 이 땅의 반미운동의 시작이었다고 하는 박원순 변호사의 글, 조금 더 자주 만나지 못했던 날들을 돌아보며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라고 한 김별아 작가, 김은숙 하나도 지켜주지 못해서 너무 미안하다며 울먹이는 통일일꾼 임수경……

▲ 뒷줄 왼쪽에 김은숙 씨, 임수경씨, 소설가 유시춘 씨가 서서 사진을 찍었다. 앞줄에 작고하신 리영희 선생이 부인과 앉았다.(사진출처/'서정' 블로그)

그들의 글을 읽으며 목이 메이고 눈물이 흘렀다. 대부분 자신의 과거를 팔아먹으며 높은 자리에 서고 싶어 할 때, 그녀는 ‘부미방’ , ‘무기수’ 라는 그 좋은 ‘스펙’ 안 팔아먹고 스스로를 ‘백리(百里)’라고 칭하며 작가로 살았고, 평화시장 노동자 아이들의 친구로 살았단다. 특히 미국 민주화 운동의 아이콘이자 포크 음악계의 제왕이자, 좋아하는 밥딜런의 평전을 번역한 ‘김백리’가 김은숙 그녀라는 사실은 너무 놀랍다. 제주 4․3항쟁을 기리며 첫딸의 이름을 유채라고 지었다는 그녀는 분명 조용히 살았어도 결기가 있는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을 외롭게 해서는 안 된다"는 박원순 변호사의 말이 참으로 옳은 말이다. 난 김은숙을 모른다. 아마 앞으로도 그녀를 알게 될 일이 없으리라. 하지만 김은숙과 함께한다는 작은 음악회에는 꼭 가보려고 한다. 누가 노래를 하는지, 누가 시를 낭송하는지는 몰라도, 용산참사 부상철거민들을 무료에 가깝게 1년 넘게 치료해 준 고마운 병원 ‘녹색병원’ 로비에 가서 멀찍이 떨어져 보고 들으리라. 그러다가 김은숙, 그녀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30년 전, 당신은 참으로 용기 있고 의로운 일을 하셨습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라고 나즈막히 속삭이며 눈인사라도 건네고 싶다.

4월 5일(화) 오늘 저녁 7시 면목동 녹색병원 로비에서 고은 시인, 함세웅 신부, 평화의 나무 합창단 등이 함께하는 음악회가 열리고 임수경씨가 김은숙 씨와 아이들을 후원하자며 계좌를 열었다. 말은 꺼내도 누구하나 실천하지 않는 일을 임수경씨가 또 하고 있다. [농협 302-0378-0560-01 임수경]

이 계좌로 모인 후원금이 모두 김은숙 씨와 그 가족들에게 전해진다는 것은 내가 확실히 보장한다. 지난주, 내가 이 통장을 직접 보았다. 나도 지금 월급의 10% 입금하려고 한다. 그래봐야 얼마 되지 않는 돈이고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겠지만 김은숙씨, 아니 김은숙 ‘선배’에게 마음이라도 ‘보이고’ 싶고, 그래야 할 것 같기 때문이지 말이다. 

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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